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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3

       전화로 주고받은 내용은 딱 하나.

         

       ─ 집으로 와라.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두려운 말도 없었다. 클라이스는 아버지에게 불려가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했다. 그 한 마디 만으로도 종아리가 얼얼해서, 어린 시절에 들었던 버릇이 도졌다. 클라이스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맞다, 채점….”

         

       무언가 할 일이 떠오른 클라이스는 생쥐 쥐구멍 빠져나오듯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중간고사 시험지와 정답지를 꺼내고는 책상 앞으로 앉았다.

         

       [과목명 : 기초화계마도]

         

       클라이스가 내는 시험문제는 아카데미 내부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기초 과목이면서 기초 수준의 문제를 내지 않는다. 학생들의 공분을 사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클라이스가 담당하게 된 특별한 학생들의 학업역량을 무시해선 안 된다. 그들은 충분히 수재들이다. 어지간한 문제는 다 풀어낸다.

         

       그걸 감안하고도 클라이스의 시험문제는 어렵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변별력이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클라이스는 미리 만들어 두었던 답안지를 따라 채점을 시작했다. 슥, 슥, 슥. 눈과 비가 교차해서 내렸다.

         

       평균을 낸다면 40점 전후.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은 점수이리라. 그나마 괜찮은 점수를 낸 사람은 여태까지 둘뿐이었다.

         

       [로테 살리에르 : 93점]

       [버멜 호르데 : 90점]

         

       살리에르야 화계마도로 유명한 가문이니 납득할 만한 점수다. 그런데 공계정령의 축복을 받은 엘프 유학생의 점수가 90점인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학생은 입학시험에서도 모두 90점씩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우연인가? 잘 모르겠다.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다음 학생은 틀린 문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채점을 끝내고 나서야 클라이스의 눈에 그 학생의 이름이 들어왔다.

         

       [에테르 : 100점]

         

       “또….”

         

       설마 또 다 맞았다고? 입시에 이어서, 이번에도?

       

       인정할 수 없었다. 클라이스는 재검토에 들어갔다.

         

       개념에서 틀린 점은 없을까. 계산 실수한 곳이 있는데 자신이 놓친 곳은 없었을까. 한 줄 한 줄을 꼼꼼히 훑어보며 틀린 점을 필사적으로 짚어내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부분에서 이상이 없었다. 아예 틀리라고 낸 킬러 문항조차도 여유롭게 풀어냈다.

         

       마치 답안지를 복사해서 그대로 붙여넣은 듯한 답안. 기계가 시험을 본 것이라고 얘기해도 믿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

         

       채점이 끝났다. 동이 트기 전에 교무실로 온 클라이스는 시험지와 답안지를 동료 교수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 쪽지 하나와 은화 몇 장을 내려놓았다.

         

       “공작님,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클라이스는 마지막으로 교실을 둘러봤다. 자신이 맡았던 특별반의 풍경을 두 눈으로 담았다.

         

       등을 돌리자,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더는 여기 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

         

         

       ─ 애애앵.

         

       “아.”

         

       이 개같은 거.

         

       ─ 애앵.

         

       쾅!

         

       척수반사로 벽을 치자 손바닥에서 무언가 박살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가루로 된 철제 부품이 손금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슬슬 여름이네요.]

         

       이 세계에서도 모기는 해충이다. 그냥 해충도 아니고, 마수로 분류되어 아예 씨를 말려야만 하는 해충.

         

       그냥 해충과 마수를 구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그것이 철과 기름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어떻게 된 게 세계관이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냥 모기도 아니고, 기계로 된 모기한테 피를 빼앗겨야 하는 세상이라니.

         

       “으.”

         

       그나저나 회포를 너무 세게 풀었나? 주말 동안 넘긴 양주가 위장에서 내려가질 않고 있다. 양치질을 해도 입김에서 알코올 향이 스며나왔다. 이것 때문에 두 번 취하는 느낌이다.

         

       관자엽을 꾹꾹 누르며 등교하니 교실에 누군가가 교탁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헤를라인 선생님이었다.

         

       뭔데.

         

       “왔니? 시험지 받고 앉아있으렴.”

       “…선생님이 왜 저희 교실에 들어와 계세요?”

       “그건 이따 조례시간에 설명해줄게.”

         

       헤를라인 선생님은 그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반장을 불러 친구들이 오는 족족 시험지를 건네 달라고 부탁한 뒤 교실을 떠났다. 물론 나도 한 장 받았다.

         

       기초화계마도 시험지였다. 이걸 왜 헤를라인 선생님이 건네주시는지.

         

       설마 하스펠트 교수가 친구에게 짬을 때린 건가? 와, 세상에.

         

       “오늘은 앞에 안 앉아?”

       “아니. 오늘은 별로.”

         

       저번 주에 그 난리를 피웠는데 하스펠트 앞에서 떡하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로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뒷좌석에 앉았다. 바로 뒤에는 꼬맹이, 바로 앞에는 귀쟁이 유학생이 있다. 로테는 조심스레 내 곁으로 와 앉았다.

         

       프레이가 나한테 인사했다.

         

       “야! 플레어 특허 푼 거 말인데, 그거 잘 처리됐다고 하더라!”

       “누구한테 들었는데?”

       “실눈 선생님!”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플레어로 넘어갔다. 이게 걸즈 토크라니.

         

       “그런데 우리 셋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그래도 조금 아쉬운걸! 맥줏값도 못 받았잖아!”

       “글쎄.”

         

       난 여기서 얼마를 벌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대륙에서 평생 살 생각도 아니니까.

         

       특허를 판 돈으로 다른 마법을 연구할 자금을 마련한다는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래도 플레어를 무료로 풀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

         

       “다들 알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기억이라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동시에 어깨를 움츠렸다.

         

       입학식에서 벌어졌던 마수 습격 사건. 두 달이 지났음에도 그 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 사건의 경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 이건 인사치레에 불과해.

         

       단지 그 배후에 절멸급 마수가 있다는 것만을 알 뿐.

         

       절멸급 마수. 인간의 말을 할 줄 알고, 마왕을 부활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수많은 괴물을 제 발아래에 두어 다스릴 줄 아는 마수들의 정점. 또한 천 년 전에 봉인되었던 마왕을 부활시키고자 활동하는 악의 최측근.

         

       “한 번 그랬으니 수도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틸레트에선 공계를 제외한 나머지 세 분야의 원소마도를 익히고 튀어야 한다. 그 전에 북방 전선이 무너지면 내 계획에도 지장이 생긴다.

         

       “플레어 특허를 풀었으니 이걸로 세상은 더 봐줄 만한 쪽으로 변하겠지.”

         

       “그렇겠지…?”

       “그럼.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레어는 아직 시작에 불과해.”

       “시작에 불과하다니?”

       “뭔갈 또 만들 생각이구나!”

       “더 센 걸 만들어야지. 세상을 아예 흔들 정도로 강력한 걸로.”

         

       절멸급을 잡는 데 플레어만으로는 부족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할 거면 아예 확실하게 해야지.

         

       핵무기를 개발하면 마왕이 부활해도 이 세계 사람들이 대처할 수 있다. 동시에 개발 과정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도를 여럿 익히는 것도 가능하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플라스마 발생기를 만들었으니 이제 그걸 가두는 법을 개발하면 될 듯한데.

         

       “그간 평안하셨나?”

         

       영 좋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얼굴을 보니 다들 평안하긴 한가 보군.”

         

       클리온 필리우트 제2황자.

         

       녀석이 머리에 붕대를 돌돌 감은 채로 나타났다. 내 인상이 삽시간에 찌푸려졌다. 황자놈은 버멜의 바로 옆에 앉고는 삐딱한 자세로 등을 돌렸다.

         

       아, 또 시작이네.

         

       “하이고, 오랜만에 등교하니까 머리가 다 으깨질 것 같군.”

         

       톡, 톡, 톡.

         

       그가 검지로 내 책상을 두들겼다. 벌써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결투에서 이기면 나와 엘리예프한테 더 이상 집적거리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이야, 그렇지. 그건 지켜야지. 그래도 명색이 제국의 황태자인데 말이야. 기사도 정신으로 승부했는데 진 놈이 말을 많이 하면 추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툭, 툭, 툭.

         

       “이거 이러다간 병원비가 좀 깨지겠거든.”

       “뭐 어쩌라고.”

       “흐흠, 너흴 나무라는 건 아니야. 내 병원비는 세금으로 빠져나가거든. 그걸로 충당하면 돼.”

       “날 노리고 한 발언이냐?”

         

       내 본래 신분이 평민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자극하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다.”

       “내 지갑사정 말고, 그쪽 학점이나 걱정하세요. 중간고사 끝날 때까지 학교에 나온 적도 없으면서.”

       “아, 중간고사! 그렇지…. 근데 이거 어쩌나!”

         

       톡, 톡, 톡.

         

       “시험이라면 황실에서 따로 치렀거든! 네 바람과는 달리 유급할 걱정은 없으니 안심하라고. ”

         

       황자는 요사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뭔가.

         

       뭔가 이상한데.

         

         

       **

         

         

       한편.

         

       버멜은 앞쪽에서 에테르 일행이 이야기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야! 플레어 특허 푼 거 말인데, 그거 잘 처리됐다고 하더라!”

         

       플레어의 특허를 풀었다고…?

         

       플레어가 개발되면 스토리가 진행된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에테르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버멜도 그 일을 도와줘야만 헀다. 스토리의 호흡을 조절하는 것보단 에테르의 스트레스를 관리해주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했지만 적극적으로 실험까지 지원해줬다. 단지 소녀가 만든 플레어가 마수를 쓰러뜨리는 일에만 사용되길 빌었다.

         

       전개 속도는 이 이후로 원상복구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특허를 풀었다는 건…….’

         

       이제 모든 사람이 플레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곧 최상급 화계마도가 담긴 스크롤이 단돈 1천 원에 북방 전선으로 보급됨을 의미했다.

         

       어찌 보면 좋은 소식이었지만, 모든 전개와 루트를 알고 있는 버멜에게는 쥐약을 먹는 일과도 같았다.

         

       ‘1차 시련이 시작된다.’

         

       시련. 메인 스토리에 반드시 존재하는 관문.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남은 플레이타임에 상관없이 그 회차는 버려야 한다. 게임 오버가 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인류가 제1차 저지선에 있는 ‘철의 마탑’을 공격하면 발생하는 이벤트가 첫 번째 시련의 트리거였다.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마수들은 철의 마탑에 모여 회의를 연다. 그리고 그 결과, 제국을 내부에서 한 번 휘저어 버리자는 의견이 통과된다.

         

       ‘공략법을 알고 있으니 그건 괜찮아. 근데….’

         

       에테르의 상태가 중요하다. 에테르가 특정 발언을 내뱉는다면 1차 시련 외에도 4차 시련이 동시에 찾아올 가능성이 생긴다. 두 시련이 한꺼번에 닥치면 그날로 이 세상은 멸망한다.

         

       버멜은 귀를 쫑긋 세워서 에테르와 친구들이 얘기하는 걸 엿들었다.

         

       “플레어 특허를 풀었으니 이걸로 세상은 더 봐줄 만한 쪽으로 변하겠지.”

         

       ─ 아, 좋네. 이제야 세상이 조금 볼만해졌어.

         

       “그렇겠지…?”

       “그럼.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 어때. 너희도 그리 생각하지 않아?

         

       “아.”

         

       목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플레어는 아직 시작에 불과해.”

         

       ─ 이건 시작에 불과해.

         

       “시작에 불과하다니?”

       “뭔갈 또 만들 생각이구나!”

         

       금안족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더 센 걸 만들어야지. 이걸로 만족하기엔 부족할 것 같아서.”

         

       ─ 난 이걸로는 만족 못 하거든.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다.

         

       ‘역시 도와준 건 악수였나…!’

         

       아니, 악수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플레어 개발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에테르의 스트레스 수치가 확 올라갔을 것이다. 이 상황에선 진퇴양난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좆망겜. 진도 한 번 빠르네!’

         

       그래도 해야만 한다. 해피엔딩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버멜은 게임에서 플레어가 상용화된 직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상기해냈다.

         

       플레어가 거의 무료로 풀린 직후, 마왕군은 북방 전선에서 큰 타격을 입는다. 전개대로라면 이때 마탑에 모인 절멸급 마수들 중 하나가 북방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는 한편, 다른 절멸급 마수는 성도의 활력을 잃게 만들 생화학무기를 뿌린다. 그 생화학무기를 저지하는 것이 1차 시련의 핵심 소재다.

       

       ─ SYSTEM : (긴급) [제1차 시련]이 시작될 가능성이 99%에 진입했습니다.

         

       말은 1차지만, 난이도는 23개에 달하는 모든 시련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어렵다. 때문에 유저들은 1회차에서 주요 인물 몇 명을 희생한 채로 나아가야 한다. 고인물이라 불리는 플레이어들이라고 할지라도 서브 캐릭터 한둘은 버리고 진행하는 것이 최적의 빌드였다.

          

       ─ SYSTEM : (긴급) 지금부터 <흑사병> 이벤트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 SYSTEM : 해피엔딩으로 가려면 아카데미 내부의 그 누구도 죽게 두지 마십시오.

         

       실전은 다르다. 달라야만 했다.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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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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