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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3

       고급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아카데미 상업 지구, ‘일성’ 그룹이 운영하는 호텔 스위트룸의 응접실.

       

       “그, 그게…… 무슨, 무슨 소리에요?”

       

       소파 맞은 편에 앉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한유리의 턱이 잘게 떨렸다.

       

       스스로를 매사에 이성적이라 자부하는 그녀라 할지라도 들려온 목소리가 가히 충격적인 까닭이었다.

       

       “네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

       

       자상한, 평소와 같은 따스함 가득한 아버지의 표정에 한유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상해.’

       

       정말, 정말로 이상했다. 그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일성’의 황태자는 왜 그녀에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은 것일까.

       

       “다시 말하마. <승천전>의 준결승, 일성은 불특정 다수의 학생에게 신약을 투여할 생각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살포에 가깝겠지.”

       “그러니까 왜요? 아빠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만.”

       

       한유리의 말을 끊은 그녀의 아버지, 일성 그룹의 이인자 한석구는 서늘한 시선을 그의 딸에게 던졌다.

       

       꽈악.

       

       일평생 단 한번도 한유리에게 보인 적 없던, 냉막함 가득한 차가운 눈빛. 그에 한유리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아버지의 뜻이다. 네 할아버지의 뜻이라는 건, 무슨 의미인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할아버지의 뜻……?”

       

       한유리의 표정이 일순간 멍하게 변했다. 요 며칠 전, 할아버지… 그러니까 일성 그룹의 회장이 그녀를 호출했다.

       

       호출의 이유는 간단했다. 사랑하는 손주딸의 얼굴도 보고, 할아버지의 간단한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는 것.

       

       “서, 설마? 내가 복제한 ‘물질’…….”

       

       부탁은 일성의 연구소에서 실험 중인 ‘물질’을 창조해달라는 것. 실로 간단한 부탁에 한유리는 마음껏 능력을 사용하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하아.”

       

       한유리는 일순간 호흡이 가파르게 변하는 걸 깨달았다. 들뜬 호흡에 어지러운 머리. 갑작스레 지끈거리는 머리는 애석하게도 그녀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잘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혼란스러웠으나, 상황은 지독히 간결했다. 

       

       며칠 전부터 연거푸 터져나오던 비정상적인 아카데미 내부의 일련의 소동들. 미지의 약물이 유통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위 괴수의 침입까지. 이 모든 것들의 뒤에 ‘일성’이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에 가까워 보였다.

       

       ‘알려야 해.’

       

       꾸욱.

       

       주먹을 강하게 말아쥔 한유리는 곧장 그녀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당장 학생회 내부엔 ‘일인군단’이라 칭할 만큼이나 강력한 초능력자가 한가득. 거기다 최근 찬란한 재능을 만천하에 드러낸 임혜성도… 그녀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았고.

       

       “일단 저는 돌아가겠어요.”

       

       평소의 사근사근한 말투가 아닌, 날이 잔뜩 선 목소리다. 딸아이의 급격한 변화에 쓰게 웃은 한석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안은?”

       “……보류. 아직 준결승이 열리려면 시간이 남았으니까요.”

       “그래, 그렇게 알고 있으마. 하지만 기억해 두거라. 우리 그룹은 몬스터의 통제 기술, 게이트의 발생 기술, 인간을 ‘몬스터 화’시키는 기술까지 습득했다.”

       “…….”

       “유리는 똑똑한 아이이니 잘 알고 있겠지. 아버지가 그리시는 ‘꿈’이 무엇인지.”

       “……꿈.”

       

       그 단어는 한유리가 퍽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야 얼마전, 그 꿈 때문에 온갖 고생을 했던 한유리가 아닌가.

       

       저벅저벅.

       

       응접실을 나서기 위해 한유리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촉박하다. 설마하니 그녀의 가문, 그러니까 ‘일성’이 아카데미 이런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끼이익!

       

       그리고 그녀가 문을 힘차게 열던 순간.

       

       “유리야.”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은 한석구가 나지막히 그녀를 불렀다.

       

       “네.”

       “그 남자 말이다. <현상거절> 임혜성. 그와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거냐?”

       

       무표정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한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한유리는 저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아직, 은요.”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쿠웅!

       

       응접실을 나선 한유리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굳이 그의 이름을 언급한 사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회사의 단독 소행일까?’

       

       여태 있었던 일들이 모두 ‘일성’의 공작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성격을 떠올리면…….

       

       ‘나는 중요하지 않은 거야.’

       

       그 사실이 한유리의 마음을 더더욱 조여왔다. 가족에게는 한 없이 따스하지만, 외부인에겐 기어이 싸이코패스가 되는 이들. 그것이 바로 기업가란 족속들의 특징이다.

       

       그렇다는 말은, 애당초 ‘한유리’는 계획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는 것은 이미 계획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 * *

       

       ‘기억’의 유효기간을 아는가?

       

       대부분의 인간은 기억한 내용의 80%를 20일 이내에 망각한다고 한다. 끝 없는 반복숙달이나, 뇌리에 박힌 기억이 아닌 이상 기억은 천천히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제 날씨 좋네.”

       “…….”

       

       바로 지금, 나는 무표정한 핸드폰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화면엔 장황한 텍스트가 끝 없이 자리해 있었다. 예를 들면 ‘1장 흑막’이라던가, ‘3장으로 가는 열쇠’ 같은 세세한 메모가 가득했다.

       

       “이야, 천하의 <현상거절>이 이렇게 따분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줄 누가 알겠어?”

       “아이씨.”

       

       흠칫!

       

       쉬지 않고 들려오는 지방 방송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툭 튀어나왔다. 그런 내 반응에 상대도 놀랐는지, 깜짝 놀란 얼굴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좀 가라. 친구 없냐고.”

       “흐, 흐흐. 친구? 미안하지만, 이 몸에게 그따위 것은 필요치 않다.”

       “에휴.”

       

       옅은 한숨을 내뱉은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금 내가 여유를 만끽하는 곳은 기숙사 건물의 옥상이다. 평시엔 학생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지만, 애당초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위인이 아니다.

       

       아무튼.

       

       옥상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살피고 있던 사이, 불청객 하나가 나를 반겼다.

       

       <신속>의 최영웅. 일전에는 나를 죽이니 살리니, 지껄이던 놈이 자존심도 없이 내 관심을 구걸하는 것이다.

       

       “좋은 반응이다. 역시 내 라이벌.”

       “까고 있네.”

       

       떳떳한 놈의 목소리에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니,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자기 라이벌이란 말인가. 하물며 <뇌전검>보다 나약한 녀석이란 평가를 내린 게 바로 이 <신속>인데.

       

       “흐흐흐. 왠지 모르게 네놈의 그런 반응이 좋단 말이지.”

       

       오소소 소름 돋게 만드는 목소리. 인상을 찡그린 나는 놈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참 특이해! 분명 네 상대는 평범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 놈을 압도한 주제에 이리 침착한 모습이라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큼큼.”

       

       큼큼은 무슨.

       

       어울리지 않게 뜸 들이는 <신속>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내 시간을 방해하는 건 아니었지만, 촉새처럼 옆에서 나불대는 꼴이 영 불편했거든.

       

       그러자.

       

       “너는 아는 것이 제법 많아 보이더군.”

       “뜬금 없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이상할 정도로 아는 것이 많은 D급, 아니… 이제 곧 ‘랭커’에 입성할 녀석이지.”

       “본론을 말해라. 터지고 싶지 않으면.”

       

       움찔.

       

       주먹을 치켜 들며 중얼거리자 최영웅은 슬쩍 거리를 벌렸다.

       

       “그저 묻고 싶은 것이 생긴 거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맞을래?”

       “으, 으음! 강해지는 법을 묻고 싶다.”

       “……강해지는 법?”

       

       이 뇌 속이 꽃으로 가득찬 <신속>이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워낙에 독선적인 놈이라 <히사있>에서도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이녀석은 나중에도 도통 ‘랭커’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는데…… 이런걸 내게 물을 줄이야.

       

       “강해지는 법은 많지. 아주.”

       “그, 그렇지? 나는 그걸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아무래도 라이벌인 내게 알리고 싶지는 않겠지만…….”

       “좀 닥쳐.”

       

       끄덕끄덕.

       

       힘의 우위를 본인도 잘 아는 모양이다. 입으로는 라이벌을 울부짖던 놈이 내 말 한마디에 이리 침묵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신속>이 강해지는 건 내게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강해진 신속이 나서서 괴수나 빌런을 토벌할 경우엔 오히려 좋겠지. 그럴 수록 희생자가 줄어드는 거니까.

       

       “한 마디만 할게. 잘 들어라.”

       “……알겠다.”

       “네가 가진 능력은 독특해. 물리법칙을 초월한 수준의 속도, 그게 네 능력이지. 그덕분에 랭커에 입성한 거고.”

       “그렇…… 지.”

       “하지만 등신처럼 칼을 휘두르는 것 부터가 에러. 검술에 ‘검’ 자도 모르는 놈이 멋 때문에 검을 들고 다니는 것도 웃기고.”

       “으, 으음!”

       

       신랄한 질타에 말문이 막힌 최영웅은 침음을 흘렸다. 나름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려고 한 말이었지만, 저리 얌전히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네 능력은 검 따위를 휘두를 게 아니야.”

       “그, 그러면! 대체 능력을 어찌 써야한단 말이냐!”

       “넌 능력을 잘못 쓰고 있어.”

       

       스윽.

       

       한숨을 내뱉은 나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설마하니 자신을 때릴 줄 알았던 건지, 최영웅이 가드 자세를 잡는 순간.

       

       “속도는…… ‘무게’.”

       

       그 짧은 찰나, 무언가 느낀 것이 있던 걸까?

       

       “‘빛’의 속도로 차여본 적 있나?”

       

       쿠구궁-!

       

       그 날, <신속>의 최영웅의 세계가 무너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조금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게자 박고 인사드립니다.

    간략한 사유는 공지에 따로 등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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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Hiding My Power at Hero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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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Hero. Everyone admires them as they wield supernatural powers that defy the laws of physics. The ability I possess is to 'reject' those p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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