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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3

       

       

       루이스 벨라온 백작.

       데미시아 공작령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둔 평범한 백작가의 가주이자 아버지였다.

       벨라온가(家)는 명망 높은 가문은 아니지만, 이제껏 큰 풍파 없이 건재했으며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도 듣지도 않는 가문이었다.

       오히려 루이스 백작은 대외적인 평판이 훌륭해 인근의 평민들에게도 이따금씩 칭송을 받고 있었다.

       

       그에게 하나 있는 아들 또한 평판은 나쁘지 않았었다.

       귀족이란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이용할 줄 아는 것이 기본 덕목이라는 가르침을 잘 이행한 덕이었다.

       악하게 키우지는 않은 자신의 덕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덕에, 제 3 북부대공녀의 혼약대전의 최종 후보가 되는 영광을 거머쥐었다고 여기는 그였다.

       어쩌면 벨라온 백작가가 윈터펠 대공가를 등에 업고 찬란한 미래를 맞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그였었다.

       

       출발한 것이, 때에 맞지 않게 돌아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버지!”

       

       카일 벨라온.

       가문의 희망이 되어라는 바람을 담아 출발했던 제 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누추한 꼴이 되어, 남루한 꼴이 되어.

       혼약대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제게 읍소했다.

       

       “내정자가 있었습니다…! 그, 그래서 그냥 기권하고 왔습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해 죄송합니다…!”

       “…….”

       

       루이스 백작이 창백해진 제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불호령 같은지, 카일은 감히 마주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말없이 서신 하나를 꺼내 자신의 앞에 던졌을 때, 카일은 일이 제 바람과 반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아버지…? 이게 무엇입니까…?”

       “읽거라. 그리고 답하거라. 그것에 적힌 내용이 전부 사실인지.”

       “예…?”

       

       카일이 급히 서신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고.

       

       잠시 후.

       

       “거, 거짓입니다-!! 저를 음해하려는 새빨간 거짓이라고요-!”

       

       카일은 발뺌을 해야 했다.

       서신에 적힌 내용은 그래야만 했으니까.

       추악한 진실이 담긴 서신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쳐온 자신의 고욕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랬다.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잘 이용하는 자가 득세하는 법이라고 말이다.

       

       “거짓? 음해?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예, 예?”

       “그리 허술한 거짓으로써 진실을 숨기려 하느냔 말이다. 그리고 감히 이 아비를 능멸하려 들어?”

       “아, 아버지-!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 주둥이 닥치거라-! 내 너를 잘 키웠다 생각했건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만이었는지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 얼마나 원통한지 알기나 하느냐-!”

       

       카일의 온몸이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떨린다.

       진노한 아버지의 얼굴이 두려웠다.

       자신을 보듬어주리라 여긴 저택이 어느 순간, 지옥 불구덩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물으마. 서신의 내용. 진실이더냐, 거짓이더냐. 신중히 답하는 것이 좋을 게다.”

       

       이미 서신의 내용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 아버지에, 결국 카일은 ‘도망친 곳에 안식은 없다’라는 격언을 되새길 뿐이었다.

       

       “지… 진실입니다….”

       

       잠시 후.

       

       “여봐라. 저놈의 다리를 부러뜨려 마상감옥에 처넣어라. 내 그것을 직접 몰아 윈터펠 대공성에 다녀올 테니.”

       

       도망자의 무릎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까무러칠 비명이 울려퍼졌다.

       

       콰직!

       

       “끄아아아악-!!”

       

       환희의 함성이 울려퍼져야 했을 저택에, 힘겨이 도망쳐온 보금자리에, 지리멸렬한 악성만이 울려퍼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악성은 쇠창살에 갇힌 채, 울려퍼져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거로부터 무사(無死)히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은 도망자는 그렇게 있어야 할 자리로 호송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안녕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은 채로.

       

       

       **

       

       

       도망자의 악성이 울려퍼진 시각.

       르미앙과 겔우드가 대치하고 있었다.

       흉악했던 과거를 꺼내려는 이와, 미련한 현재를 덮으려는 이의 극명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멈추신다면, 대공전하께서 아시지 못 하도록 대책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부디 이 늙은이의 청을 고려해 주십시오. 대공녀님.”

       

       뭘 멈춰야 하는데.

       시작도 못 한 걸 어떻게 멈춰야 하는 건데?

       넌 그놈의 멈추란 말 밖에 못 해?

       윈터펠 대공가를 위해야 하는 인간이, 나를 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인간이, 고작 그딴 말 밖에 못 해?

       진실을 알았다면, 아카데미에서의 사건을 알았다면, 나를 막을 게 아니라 폭력자들의 몰락을 응원해야지!

       

       “그러는 넌, 막지 말라는 내 명을 들어줄 생각은 있어?! 풀지 못 한 원한을 네가 풀어줄 수 있냐고-!!”

       

       재차 터져나오는 르미앙의 악성(惡性).

       표독스레 뜨인 눈동자엔 풀지 못 한, 어쩌면 영원히 풀 수 없을 원한이 차올라 일렁인다.

       박동하는 심장이 지독한 울분을 혈관으로 흘려보낸다.

       그 울분이 들끓어 피를 증발시키고, 피가 증발해 공허해진 곳엔 거둘 수 없는 또 다른 원한이 차오른다.

       

       무려 3년간 당한 조롱과 폭력이었다.

       무려 3년간 참아낸 고통이었다.

       억울해 미칠 노릇이었다.

       다시금 그날로 돌아가 ‘참아야’ 하는 자신이 너무도 비통하고 비참한 르미앙이었다.

       

       “대공녀님의 원한을 풀어낼 법적인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법적인 방법?

       

       “웃기지마! 그딴 방법으로 풀어질 원한이었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어-!!”

       

       내가 당한 게 법적이지 못 한 것이었는데, 어떻게 법적인 방법으로 원한이 풀리겠어!

       비이성적으로 당한 폭언과 폭행이었는데, 어떻게 이성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단죄한다는 거냐고!

       괴인족을 토벌하던 아빠도 그랬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백성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한 괴인족은 그 씨를 무차별적으로 말려야 한다고 그랬었어!

       

       “원한을 푸실 수 있도록 사적인 조치도 마련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이상 가문의 전통을 욕보이는 것은 부디 멈춰주십시오. 대공전하께서 아신다면 분명 엄한 문책이 따를 것입니다.”

       

       겔우드의 간절한 바람에, 르미앙이 탄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또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욕보인다]

       그 허무맹랑한 말에 그득히 차오른 울분이 가셨다.

       움켜쥔 두 손이 풀렸다.

       지난 날, 자신이 보아야 했던 모욕은 욕이 아니란 말일까.

       오금을 저려야 했던 지옥보다 가문의 전통이 더 중요하다는 걸까.

       참으로 악랄하고도 쓰라린 말이 아닐 수 없었고, 그 말로 인해 르미앙의 표독스런 눈빛이 풀리고 말았다.

       

       “마음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으나, 더 이상 대공녀님의 걸음을 지켜볼 수만은 없는 제 심정도 헤아려 주십시오. 그 걸음이 대공녀님을 다시금 지옥으로 이끌고 있는데, 어찌 제가 지켜보고 있겠습니까.”

       

       하.

       하하.

       하하하.

       웃겨, 정말.

       

       늘 근엄하기만 했던 겔우드도 재밌는 구석이 있구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걸음인데, 그 걸음이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용케 해내는 재주가 있는지 몰랐는걸.

       

       히죽.

       쓰게 웃은 르미앙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나보고 어떡하란 거야? 네가 멋대로 용서해준 엘든을 나도 용서하란 거야?”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이 혼약대전이 명성과 전통에 걸맞게 무사히 결말을 맞았으면 할 따름입니다.”

       “무사히……?”

       

       말끝을 길게 늘리는 르미앙.

       그러다 히죽, 또 다시 웃었다.

       무사(無私)는 사사로움없이 공정하다는 뜻이다.

       무사(無事)는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무사(無邪)는 사악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 세 가지의 뜻 중, 그 어떤 것도 혼약대전의 결말과 어울리지도, 부합하지도 않아 웃음이 나왔다.

       단 하나의 뜻이라도 결말에 동참하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엘든 라펠리온, 데려와.”

       “예…?”

       “네가 말한 그 ‘무사’한 결말을 바란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야. 엘든 돌려내. 그럼 멈춰줄 테니까.”

       “예…?”

       

       겔우드가 곤혹스런 얼굴을 했다.

       과거를 증언해주는 대가, 공명정대한 혼약대전의 명성에 나버린 흠집을 비밀로 붙이는 대가, 그리고 그 흠집의 증거들을 전부 넘겨주는 대가로써 엘든에게 석방을 내린 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엘든이 가져온 증거들과 뺨의 상처는 혼약대전의 명성에 흠집이 아닌, 커다란 균열을 일으키기 충분했으니까.

       더욱이 대공녀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했다 했었고, 앞으로도 그 마음을 되새기며 살겠노란 다짐도 했었다.

       그의 기권을 더 이상 억류할 수 없었고, 그렇게 석방을 대가로 내어주었던 겔우드였다.

       

       그가 침통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만, 조약을 무를 수 없습니다. 대공전하의 명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히죽.

       미소 짓고 있는 르미앙이 보였다.

       그 미소가 점차 벌어지더니 웃음이 되는 것이 보였다.

       곧, 르미앙이 배꼽을 잡으며 웃기 시작했고 겔우드는 곤혹과 침통에 이어 당혹을 얼굴에 담아야 했다.

       

       “하하하-!”

       “왜, 왜 그러십니까….”

       

       두렵다.

       갖은 풍파를 거쳐 공포란 것에 무뎌진 그조차 두려울 정도로, 르미앙의 웃음은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잠시 후, 르미앙이 눈끝에 맺힌 물방울을 걷으며 웃음을 멈추었다.

       

       “겔우드.”

       “예.”

       

       르미앙 윈터펠.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곁에서 목도하고 있는 겔우드지만, 오늘만큼은 마치 다른 사람을 눈앞에 둔 것만 같았다.

       만년설 정원에서 엘든의 쪽지를 거칠게 찢으며 소리를 내지르던 르미앙의 모습이 한순간의 폭도였을 거라 여겼었다.

       한순간의 충동이었으리라 여겼었다.

       한데, 아무래도 기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두려웠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혼약대전이 무사히 끝나길 바랐던 마음이 얼마나 우매했던 것인지 깨달아야 했던 겔우드였다.

       

       

       “우승자가 됐어야 할 엘든 라펠리온을 멋대로 보내놓고, 이 혼약대전이 무사히 끝나길 바라는 거야? 너도 농담이란 걸 할 줄 알았구나?”

       

       

       그날 밤, 엘든이 레이첼과 함께 파티장으로 출발하던 시간.

       

       두 통의 서신이 켈리드 공작가와 로스펠 후작가로 출발한다.

       

       데론의 켈리드 공작가로.

       

       블런드의 로스펠 후작가로.

       

       벨라온 백작가에 도착한 서신과 같은 절망을 담은 것이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서신을 보낸 르미앙은 다시금 짙은 회한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라펠리온 백작가에는 서신을 받아줄 이가, 그로써 엘든의 기권을 무효화시켜줄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사망했고, 그 어머니는 고아의 평민이어 가문이 없었으니까.

       

       세상이 나서서 그의 탈주를 돕는 것 같은 황당한 착각마저 드는 르미앙이었다.

       

       또한.

       

       엘든 라펠리온의 빈자리를 마주하지 못 하겠는 르미앙에게, 혼약대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되어주지 못 했다.

       

       복수도, 해방도.

       

       전부.

       

       그리고 그날 밤, 또 다른 서신 한 통이 대공성을 나섰다.

       

       윈터펠 대공가의 가주, 로건의 귀환을 바라는 겔우드의 긴급 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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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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