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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3

       * * *

       

       

       

       

       “하지만 폐하께서는 혈우병 보인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여 만일.”

       

       

       말하기 꽤 곤란해 보이는데. 입을 우물거리면서 참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대강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상은 간다.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도 혈우병을 물려받을 수 있겠죠.”

       “예. 폐하. 그리고 문제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국내 순행은 가급적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뭐 그건 다 알고 있는 거니 상관없다.

       

       애초에 형식 상 검진 받는 거지 뭐.

       

       지금 보니까. 이 몸은 여전히 약한 것이 맞다.

       

       다만 마치 탕후루처럼 몸에 무언가 기적 같은 것이 코팅된 것과 비슷한 거겠지.

       

       

       “그 점은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러시아 의학 발전을 위해 노력해주세요.”

       “예. 반드시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베라 게드로이츠가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면서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이 몸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래. 애초에 애 낳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후계로 생각해둔 애가 있는 데다가, 내가 멱살 잡고 러시아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혈우병 기록은 알고 있다.

       

       이러면 후계가지고 말이 많을 테니. 핀란드 왕국에 있는 블라디미르라도 빨리 데려오는 것이 맞겠지.

       

       어차피 지금 황족들은 방계든 뭐든 감히 내 권위에 도전하지 못한다.

       

       

       살리카법 따위는 내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러시아 차르 겸, 동로마 황위에 오른 이상, 저 흑해 바닥 어딘가에 처박은 꼴이다.

       

       이 상황에서 방계 황족들이 어쩌지는 못할 거다.

       

       권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강력한 권위를 가진 입헌 군주. 전우들이 육편이 되어가는 피바다 속에서 당당히 함께 하면서 백군의 지지도도 하늘을 찌른다.

       

       이런 상황에서 방계 황족이 끼어든다?

       

       어림도 없지. 말이 안 된다.

       

       오히려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정착하려면 눈총 받을 거다.

       

       지금의 러시아는 ‘아나스타샤’를 따르는 거지. 과연 다른 황족들을 반길지는 알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 건강 문제야 괜찮겠지.

       

       어쨌든.

       

       나는 아나스타샤 안에 있는 무언가지. 아나스타샤가 아니니까.

       

       내가 살던 세계는 일명 러시아, 중국, 북한으로 인해 시작된 핵전쟁으로 말아 먹었다.

       

       말만 공산주의가 아니지. 실상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이나 중공, 북한 모두.

       

       그것들로 인해 세상은 망했다.

       

       그저 그런 미래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빨갱이를 뿌리부터 근절시키는 것. 그게 최대 목적이지.

       

       어마어마한 산업력을 가진 독일이 적화되었다?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독일 역시 소련을 두들겨 잡고 오로지 공산주의를 증오하며 태어난 백계 러시아 합중국과의 최후의 싸움을 준비하겠지.

       

       러시아 합중국의 모든 정책은 공산주의 독일에게는 치명타일 테니까.

       

       여기에 동프로이센의 카이저도 남아있고.

       

       이러면 안슐루스라도 방어를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

       

       오스트리아가 실제 역사와 다르니 버텨주려나.

       

       독일도 지금 내전의 후유증도 좀 있고.

       

       공산주의 특유의 광적인 것이 있다고 하지만. 흠. 좀 더 지켜봐야지.

       

       

       “폐하. 조지아의 공산당이 토벌되었다고 합니다. 듣자하니 그쪽은 소련이 멸망하고 나서도 조지아 내의 혁명을 주도해보려 했다는군요.”

       

       

       내무부 장관 보리스 사빈코프가 조지아 쪽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그 베리야란 친구가 참 일은 잘하는군요.”

       

       

       일 하나는 제대로 하는 인물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놈 외에 빨갱이 중에 우리에게 전향할 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빨갱이 중에 인재가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저번 처형에서 죽일 만큼 죽였으니 남은 놈 중에 뽑을 놈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수용소에 처박힌 놈 중에 제법 있을 거 같은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란 자로 관료주의자입니다.”

       “빨갱이들이 싫어 할만한 짓을 빨갱이가 하는군요.”

       

       

       그 인물이 그런 인물이었나.

       

       아마 트로츠키가 엄청나게 쪼아댔을 거 같은데.

       

       

       “예. 좀 특이합니다만. 이자도 모스크바가 함락될 때 항복했습니다.”

       

       

       처형 명단에 없기는 했다.

       

       그자도 레닌 치하를 겪고, 지금 내가 바꾸고 있는 러시아를 보면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는데. 글쎄다. 과연 합중국에 합류시키는 것이 맞나.

       

       당장 베리야만 하더라도 레닌을 몽상가로 몰아버리고 스탈린과는 아예 인연도 없는 것처럼 나오던데.

       

       

       “한번 말은 해봅시다.”

       

       

       싫다고 하면 그냥 시베리아에서 계속 굴리면 된다.

       

       어쨌든 빨갱이들은 무조건 토벌하는 것이 맞으니까.

       

       

       “튀르키예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튀르키예에서는 무스타파 케먈 아타튀르크가 정국을 수습하고 내부 수습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무스타파 케먈이 실제 역사대로 튀르키예 국부에 올랐다면, 이쪽이 좀 도와줄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일찍 죽는 것은 사절이니까.

       

       실제 역사를 아는 만큼의 동정이라고 할까.

       

       개인적으로 튀르키예는 앞으로 러시아가 주도할 국제 조직의 일원으로 남기고 싶거든.

       

       로마의 땅을 점유하거나 후계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의 국제조직. 콘스탄티노플 조약기구 같은 거 말이다.

       

       공산주의 독일이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붉은 역병이란 건 굉장히 위험한 거니 말이지.

       

       

       “그쪽도 나름 손은 써둬야겠죠. 관계 개선은 해야 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신생 오스만의 국호는 어떻게 됩니까?”

       “튀르키예 국민 합중국이라고 합니다.”

       

       

       나한테서 영향을 받은 국명이다.

       

       내가 소수민족을 합중국에 포함했듯, 아타튀르크도 나한테서 아이디어를 따 중동 쪽으로 뻗어 나가겠다는 의지겠지.

       

       민족자결주의로 인해 독립하고 싶어하는 민족들을 합중국 아래에 편성하겠다.

       

       미합중국과는 다른 의미의 러시아식 합중국을 아타튀르크가 수용하겠다는 뜻이다.

       

       다른 의미로 오스만을 재건하려는 의지가 보이는데.

       

       

       “나쁘지 않네요. 그럼 손 좀 벌려보세요.”

       “자기들 땅 뜯어간 저희를 좋아하겠습니까?”

       

       

       글쎄. 이쪽은 명분이 확실하다.

       

       우리는 ‘동로마’를 걸고 넘어지면서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의 아나톨리아 강역을 얻으려고 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어떨까.

       

       전혀 이쪽과는 관련이 없는 놈들이 지랄 맞게 굴고 있다.

       

       특히 아타튀르크는 처칠에게 이를 갈고 있을 터다.

       

       

       “콘스탄티노플이나 폰토스 그리스는 우리가 명분이 강하니 어쩔 수 없죠. 더군다나 아타튀르크는 거저 얻어먹은 우리보다야 이전부터 패악질을 부린 영국과 프랑스에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애초에 아타튀르크는 저를 믿고 협상한 겁니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소리죠.”

       

       

       협상장에 없던 이들은 모르겠지.

       

       결국 아타튀르크는 날 믿고, 러시아 합중국이라는 우방을 선택했다.

       

       

       “폐하. 튀르키예를 돕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영국과 프랑스와 싸울 생각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미쳤다고 상륙 불가능한 브리튼 해적 놈들이나 독일 역병을 정면에서 처맞아야 줘야 할 프랑스와 척을 질까.

       

       우리는 뒤로 밀 뿐이고 혁명을 일으킬 독일 놈들을 잡기 위해 영프가 열심히 피튀기며 싸우면 결국 시리아며 이라크쪽이며 다 빠질 것이다.

       

       그때. 살짝. 튀르키예를 밀어줄 뿐이다. 아주 사알짝.

       

       

       “게다가 저는 두마에서 올라오는 안건에 결제만 하는 차르입니다. 그런 건 군부에서 알아서 하셔야죠.”

       “그, 차리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참. 음.”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뭐. 나 진짜 그런 편한 역할만 하고 싶어.

       

       난 권력에 미친 사람들 이해가 가지 않는다니까.

       

       적당히 명성만 유지하면서 평생 호의호식 사는 게 더 좋지 않냐? 나는 니콜라이 꼴이 될 생각은 없다.

       

       그나마 지금도 귀족들이 갈려나가고 황족들도 내 절대적인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어서 개혁이 쉽고 두마가 안정적으로 정착된 거다.

       

       그리고 나는 멱살 잡고 백계 러시아가 이기도록 했다.

       

       이 정도면 내 할 일은 충분히 다 했다고.

       

       

       “폐하. 교육부에서 한 가지 차리나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쪽은 이미 교육부 장관께서 알아서 개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육부는 내전 당시 영국군 도움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온 파벨 니콜라예비치 이그나티예프가 장관 소임을 맡았다.

       

       실제 역사에서도 러시아 교육을 개혁했다던데. 이번에 내가 개혁을 주장하면서 아주 러시아 교육의 근간을 뿌리부터 바꾸겠다는 거 같다.

       

       

       “사실 교육부 장관으로서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쟁의 피해가 있다 보니 한 번 가봐야 할 거 같아서요.”

       

       

       모스크바 국립대학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소련 때는 공산주의 국가의 고위층 자녀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엘리트 코스가 바로 모스크바 국립 대학이었지.

       

       백계 러시아가 된 지금도 뭐 크게 다를 거 같지는 않다.

       

       이럴 거면 나도 한 번 가볼 걸 그랬나.

       

       

       “저도 한 번 가볼 걸 그랬군요.”

       “차리나께서 직접 왕림해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이었을 듯하군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차리나께 좋은 일이지요.”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나한테 좋은 일은 그냥 사치나 부리며 즐기는 삶이다.

       

       

       “한번 말해보시죠.”

       “모스크바 국립대학은 현재 좀 학력이 되면 학생들을 받아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입학한 한 학생이 글을 썼는데. 꽤 그럴 듯해서요.”

       

       

       무슨 글이길래?

       

       

       “예를 들면?”

       “공산주의가 얼마나 처참하고 절망적인지에 대한 글인데, 학교에서 크게 칭찬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글입니다.”

       

       

       

       

       교육부 장관이 준 것을 받아 보니 그렇다.

       

       

       진짜 뭐 레닌이 뭐 훔쳐가기라도 했는지. 그 여학생이 쓴 글은 무지성적인 반공정신이 깃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공산주의를 파고 또 파고들어 그 속내를 밝히는 그런 글이었다.

       

       모든 것이 억압된 채, 자유롭지 못한 그런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

       

       반면에 내가 주장한 수정자본주의는 미래를 지향하는 자유가 느껴지는 사상이라고.

       

       솔직히 나는 내 입맛대로 내뱉은 것이긴 한데.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인들 마음을 돌리기 위해 주장한 거에 불과하지.

       

       

       “흐음. 나에 대한 찬양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공산주의 혁명이 얼마나 열악하고 수정자본주의는 이에 비해 얼마나 이점이 많은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군요.”

       “네. 이해력이 뛰어납니다.”

       

       

       꽤 괜찮은데.

       

       이걸 이제 대학생이 썼다고?

       

       지금 시기는 공산주의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시기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이름이 뭐라고 합니까?”

       “알리사 로젠바움이라고. 원래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유복하게 자란 유대계 가문의 딸입니다.”

       

       

       알리사 로젠바움.

       

       그 사람이 누구더라. 미국 쪽 사람 아니었나. 러시아인이었다가 미국으로 넘어간 작가인가.

       

       

       “볼셰비키에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겠네요.”

       “예. 볼셰비키가 싹 다 국영화한답시고 뜯어갔습니다. 이후 모스크바가 백군에 탈환되고 페트로그라드에서 가족들과 탈출하여 모스크바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볼셰비키를 싫어할 만하겠군.

       

       죄다 다 뜯어가서 나눠준다면 누가 좋아하겠냐.

       

       그야말로 길거리에 나앉은 가난한 이들이었다가 공산주의에 혹해서 붉은 깃발을 든 빨갱이들만 좋다고 하지.

       

       그런데 이 시기에 이런 글을 쓰다니.

       

       흠. 나쁘지 않다.

       

       공산주의는 아직도 남아있다.

       

       당장 저 독일제국이 붉게 물들어버리지 않았나.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반공정신이야말로 지금 러시아인들이 가져야 할 것이죠. 학교 교과 과정에도 반공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 방법입니다. 훗날 독일을 대비해서라도 반공교육을 하는 것이 나을듯합니다.”

       

       

       반공교육을 하는 만큼 러시아 내에는 붉은 역병에 조금이라도 면역이 되겠지.

       

       백계 러시아가 통일하고 여기에 반공까지.

       

       실제 역사의 소련이 보면 굉장히 놀라워하지 않을까.

       

       

       “그럼 그쪽에서 준비해주세요.”

       “예. 폐하.”

       

       

       그런데, 지금 문득 든 생각이 있다.

       

       다들 이렇게 나한테 시험 채점 받으려고 하듯 보고하는데.

       

       이거. 지금 입헌군주제가 의미가 있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일러스트는 열일곱살 아나스타샤로… 아마 마음이 넓은 일러스트는 20대 아나스타샤가 될듯합니다만. 다음 일러스트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닷..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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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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