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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35

    <535 – 여긴 어디 난 누구>

     

    오크노디의 부재로 인해 어부지리로 학년수석의 자리를 차지한 용사 이슈타르.

    981기수 내에서 그토록 벼르던 정점에 올라선 그녀였지만 그 사실에 기쁨은 느껴지지 않았다.

    용사인 자신을 그토록 처절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던 당사자가 정작 아카데미에 없기 때문이다.

     

    “당한 거 아니야? 그 아이 때문에 애먼 너만 엄청나게 많은 학기의 강의를 다 들었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이슈타르.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지?”

     

    눈치 빠른 소꿉친구 유피가 가자미처럼 가늘게 눈을 좁히며 이슈타르를 흘겨보았다.

     

    “오크노디가 제국의 황녀가 되었어.”

    “재단의 사악한 계획이라도 있겠지. 그게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보다 소중했을지도 모르고. 제국 4황녀의 자리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잖아?”

    “그게 문제야. 그 아이는 나와 같이 디스트로이어 교수의 강의를 들었으니까.”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도 있어?”

    “있지. 디스트로이어 교수는 누차 경고했으니까.”

     

    지금도 그녀의 귀에는 그날 느꼈던 충격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황제는 용사의 우군이며 백성들의 어버이다. 하지만 모든 어버이가 자식들에게 훌륭한 어버이는 아니지. 언젠가는 용사에게도 그럴지도 모르고. 니알라토텝이 벌인 짓은 용사의 적이 될지도 모를 황제에게 새로운 골칫거리를 안겨주고 시간을 번 것에 가깝다.

    -…

    -적어도 진상을 막 깨달았던 그 무렵의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의 선배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전대용사에 대해서, 그리고 황제에 대해서.

    -맞춰봐라. 2학기가 끝나는 날에 내놓을 너희의 답이 2학기 기말고사의 답이 될 것이다.

     

    수강생 전원에게 미이수 강의시간을 이수처리하고 학점도 취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위로금으로 소정의 포인트까지 지급되었다.

     

    그것이 그녀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기다렸는데.

    그 물음에 답할 마지막 강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교수님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우리에게도 같은 답을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했던 디스트로이어 교수.

    언제나 그렇듯 모든 정답을 알고 있을 오크노디.

    두 사람만이 아카데미를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슈타르는 마치 혼자만 뒤처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계최고의 교육기관이라고. 그렇게나 많은 강의를 듣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단 말이야. 그런데도 왜 이 가슴속의 공허함은 사라지질 않는 거야?’

     

    마치 딸기케이크에서 가장 소중한 딸기를 빼앗긴 것처럼 가시질 않는 상실감.

     

    <명상>

     

    동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자 또 다른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잖아! 용사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걸. 지역이벤트로 출몰하는 지역보스도 열심히 죽이러 다니고 마왕도 죽이고 황제도 죽여야 하고!

    -당신은 용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무인도경매에서 오크노디가 자신과 유피에게 당당하게 선포했던 이야기.

    마치 용사라면 마땅히 그래야한다는 것처럼 어느 용사도 떠올리지 않았을 과업을 감히 입에 담았던 무지한 아이.

    그러나 정말로 무지한 자는 누구였는가.

    디스트로이어 교수의 가르침을 받아온 지금은 이슈타르의 심경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 그녀에게 잇달아 아카데미 밖의 소식이 들렸다.

     

    <카넬레 시에서 혁명가 사망.>

    <구심점을 상실한 혁명군 궤멸.>

    <제국 4황녀로 즉위한 오크노디.>

    <제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혁명군의 잔당들>

     

    이슈타르는 결심했다.

     

    “가야겠어.”

    “어디를?”

    “제도에.”

     

    유피가 팔을 뻗어 제어수갑처럼 이슈타르의 몸을 꽉 안았다.

     

    “못 가.”

    “유피.”

    “오크노디의 바보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지? 적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 어떡해.”

    “유피.”

    “넌 자존심도 없어? 그 아이한테 굴욕을 느낀 게 몇 번인데 명령까지 따르겠다는 거야?”

    “유피.”

     

    거듭되는 부름에 유피의 표정이 흐려졌다.

    이슈타르를 붙잡은 손은 끊어지기 직전의 수갑처럼 이미 힘이 빠진 지 오래였다.

     

    “네 말대로 나는 바보일지도 몰라. 내게 수많은 굴욕을 안겨준 적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어. 그래도 답을 찾지 않으면 아무리 강해져도 ‘성장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어.”

    “신기술도 개발했으면서.”

    “기술의 문제가 아닌 걸 알잖아.”

    “그러니까 더 걱정이지. 황제는 용사를 후원하는 최대의 후원자라고. 대체 지금의 혼란스러운 제도에 들러서 뭘 어쩔 작정이냐고…”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결정을 내리겠어.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로 이어져있는지. 용사로서 내게 주어진 진정한 과업이 무엇인지.”

     

    불의한 자들을 위해 겨누어야 할 검의 끝에는 정말로 황제가 있을지.

    있다면, 이 검이 황제에게 닿기까지 앞으로 몇 걸음을 더 내딛어야 하는지.

     

    “모두에게는 비밀로 해줘.”

    “몰라. 나도 따라갈 거니까.”

    “유피.”

    “이번만큼은 진지한 얼굴로 속삭여도 절대로 안 들어줘. 너 혼자만 보낼 것 같아? 이 바보야.”

    “…고마워.”

     

    용사친위대 너머에서는 인망이라고는 쥐뿔도 존재하지 않는 이슈타르였지만 소꿉친구인 유피에게는 단 한 번도 서운할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유피의 밝은 표정을 보며 이슈타르는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남자나 여자나 동성친구끼리 사이가 너무 좋으면 이성을 만날 시간이 없다는데…

    이러다가 나, 연애도 못해보고 유피랑 둘이 평생 살게 되는 거 아닐까?

    엉뚱한 잡념은 붕붕 젓는 고개와 함께 흩어졌다.

     

    ‘둘이면 어때.’

     

    유피는 소꿉친구.

    평생을 함께 해왔던 소중한 친구이다.

    심지어 용사와 성녀.

    용사파티의 핵심인 두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남자가 없어도 용사파티는 유지될 수 있지만 유피가 없으면 그녀는 용사로서 존재할 수 없다.

    마치 다크프린세스 오크노디의 곁에 암살자 즈앙이 함께 하는 것처럼 말이다.

     

    ‘흥. 싱 그 남자의 한심한 꼴을 보면 남자 따윈 어차피 못 믿을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졌지.’

     

    그렇게나 오크노디의 검이 되고 싶은 것처럼 졸졸 따라다닌 주제에 정작 오크노디가 아카데미를 떠날 적에는 함께 하지 않았다.

    지금도 오크노디를 따라 나선 사람은 즈앙이지 싱이 아닌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용사파티에 남자가 하나도 없는 것도 아니고.’

     

    전송마법진으로 떠나려던 그녀의 앞을 뾰족한 귀의 그림자가 가로막았다.

     

    “우릴 두고 어딜 그렇게 바쁘게 떠나는 겁니까? 관광에 갈 거라면 소리없이 다녀왔다가 선물만 주는 것보단 함께 즐기고 싶은데요.”

    “스콜라. 당신까지 무리해서 따라올 필요는 없어요. 제도는 아인종의 무덤입니다.”

    “흥. 제국에서 수련해온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요? 신궁의 후예를 두고 떠나서야 그게 어떻게 용사파티라 불릴 수 있겠어요. 용사라면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 떠나서는 안 되지.”

    “스콜라…!”

    “저희도 있다구요 용사님! 용사친위대를 두고 떠나지 말아주세요오오!”

     

    쌍둥이탱커 바닐라 남매가 은근슬쩍 기회를 틈타 이슈타르의 품에 안기려 달려들었다.

    용사는 붉은 천을 보고 달려드는 투우를 가볍게 따돌리는 투우사처럼 가뿐히 두 사람을 흘려보냈다.

    와당탕 넘어진 남매가 서로를 헐뜯으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에 용사친위대가 와하하 웃었다.

     

    모두가 따라왔다.

    그리 좋은 대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용사라는 이유만으로 불합리한 수련을 강요했는데.

    오크노디처럼 조직의 사기를 올려줄 만한 채집놀이나 모래사장 놀이, 종이비행기 놀이, 숨바꼭질 놀이에 어울려준 적도 없는데.

    놀지도 않고 바보처럼 묵묵하게 수련만 하며 따라와준 고마운 친위대원들.

    그들의 면면들을 보며 이슈타르는 느꼈다.

    이거구나.

    이 경치였어.

    아무리 신기술을 연마하고 기능을 정교하게 가다듬어도 부족했던 무언가가 여기에 있었다.

     

    ‘용사란 모두의 소망을 짊어진 자. 자신의 소망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소망도 함께 짊어져야만 해.’

     

    그러지 못한 용사들은 아무리 밝게 빛나도 만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폭염에 지나지 않는다.

    어두운 밤하늘에 밝게 빛나며 내일의 희망이 있음을 외치는 별처럼 나아갈 길이 되어주는 자, 모두의 희망이 되어주는 자, 그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했다.

    용사란 그런 직업일지도 모른다.

     

    [용사 이슈타르의 이해도가 10 올랐습니다.]

     

    오크노디라면 그런 알림이 떠오를 정도로 작지만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이슈타르.

    아집과 독선으로 뭉쳤던 그녀가 용사친위대와 용사파티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 시키는 감동적인 순간에 절그럭거리는 사슬소리와 함께 엉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벽력성천신교의 수녀 되는 자, 정의로운 용사의 행보에 빠질 수 없죠. 힘을 빌려드리겠어요.”

    “제냐도 왔다냐!”

     

    유피가 이슈타르의 어이없는 심정을 대변했다.

     

    “너희들은 오크노디의 친구잖아요. 무슨 속셈으로 용사파티에 끼어들려는 거죠? 도움을 핑계삼아 훼방놓을 속셈이라면 소용 없어요. 용사친위대만 있어도 우린 충분히 강하니까!”

    “속셈. 그거야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니세가 갑옷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부들부들 떨었다.

     

    “일 년 내내 교복 아래에도 사슬갑옷을 입고 다니고 밤에도 잠옷 대신 갑옷을 입고 잘 정도로 힘들게 노력하며 벽력성천신교의 벽력을 터뜨릴 스트레스를 모아왔는데 자신의 스트레스가 아닌 타인의 스트레스를 터뜨리는 사악한 기도술을 전파시키다니!”

    “?!”

    “성광의 마데우스를 선신이 아니라 악신으로 뒤바꾼 죄, 그리고 제 사슬갑옷을 입고 지내온 노력을 멍청한 짓으로 만든 괘씸한 오크노디를 이 강철가시메이스로 메챠쿠챠 혼내주겠어요!!”

    “제냐는 니세의 친구라서 따라왔다냐!”

    “그, 그런 이유가 있었군. 어떡할래요, 이슈타르?”

    “따라와도 좋아.”

     

    성검의 진위판별 기능이 없어도 누구나 간단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벽력성천신교의 수녀 니세는 진심어린 개빡침을 보여주었다.

    학기 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전력증강을 이루어낸 용사파티와 용사친위대, 그리고 새로운 조력자 니세와 제냐를 받아들이며 이슈타르는 제도로 향하는 전송마법진에 발을 올렸다.

     

    “황제를 폐위하라! 황제를 폐위하라!”

    “폭군은 물러나라! 폭군은 물러나라!”

     

    그리고 방음마법진이 다 흡수하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내지르는 구호가 들리고 대지가 진동하는 당혹스러운 현상과 마주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죠?”

     

    전송소 너머로 나선 순간, 그들은 목격했다.

    고작 십여 명의 전력 따위가 우습게 보일 정도로 많은, 물경 수백 만에 달하는 인파의 선두에서 환영마법진으로 모두의 위에 펼쳐진 지휘관들의 모습을.

    파케 히우그마그.

    제국의 황태자와 그를 따르는 고관대신들.

    그를 지지하는 노선을 갈아탄 제국십구강의 몇몇.

    마지막으로 거물들이 즐비한 자리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여긴 어디고 난 왜 여기에 서 있지 하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서 있는 손오천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반란군 장군 손오천
    입학동기파티 의문의 개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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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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