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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35

    알 수 없는 파동에 휘말린 후,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세운 그는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

    고통이라, 있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미 환상통조차 잊어버린지 오래, 이제와서 이런 감각들이 느껴질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눈앞에는 언제나와 같은 암흑이 아닌, 다른 색상이 그의 흐린 눈을 자극하고 있었으므로.

    “…….”

    그가 서서히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건……. 

    하얀색, 이었나?

    무한히 펼쳐진 백색의 공간,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삭막한 풍경조차도, 그에겐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극이었다.

    모든것이 너무나도 기껍기만하다.

    -스윽….

    시선을 내려보면, 자신이 입고 있는 거적떼기에 가까운 옷과, 빈 틈 없이 붕대로 칭칭 감아둔 두 손이 보였다.

    그것은 모든 것을 침식하는 저주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처음으로 둘렀던 구속이었다.

    어깨를 돌리자, 뻐근한 고통과 함께 찌릿하고도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다른 세계를 부수는 책임이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찝찝한 체향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간 전혀 알아챌 수 없었던 격렬한 여정의 흔적이었다.

    혀를 움직이자, 입 속에서 짭짤한 피의 맛이 났다.

    그것은 그 모든 일을 행했음에도, 스스로가 아직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목울대를 울리자, 녹이 슨 철판을 바닥에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것은 자기자신조차 오래전에 잊어버린 낡은 의지였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돌아온 감각들을 음미했다.

    비록 아무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공간이었으나, 어떤 감각도 허락되지 않은 채 지내온 세월은 그 무자극을 형상화한 공간조차도 너무나도 즐거운 환락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완전했다.

    마치,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

    그 때, 공간 한켠에서 무언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이라, 틀린 말은 아니군요. 이곳은 세계에서 벗어난 존재들의 안식처. 세계가 ‘잠들면’ 맞이할 결말이기도 하니까요.”

    누구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가 새로운 자극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익숙한 모습의 소녀가 서있었다.

    허공을 밟아선 채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동대륙풍 의상을 입은 소녀.

    그 소녀는 굳어있는 그를 향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듯 걸음을 내딛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참으로 기이한 곳이죠. 현상에 아무런 법칙도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당신의 ‘저주’도, 이곳에선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요.”

    운명으로부터 거부당한 가여운 인간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거부당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무엇에게도 인정받을 수도 없는 공간이지만, 한평생을 거부와 함께 지내온 이에겐 그것만으로도 축복이리라.

    “…….”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형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순히 새로운 자극에 의한 호기심의 작용은 아니었다.

    붉은 머리칼의 묘한 느낌을 간직한 눈동자와, 작은 체구와는 모순적인 강대한 존재감은 그로하여금 소녀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경계가득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여전히 허공을 걸으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비유하자면, 이곳은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무대 뒤편같은 거에요. 새로운 연극이 시작되지 않으면, 아마도 계속 이런 상태겠지요.”

    ‘영원’이란, 필연적으로 끝을 관장하게 되어있었다.

    그야 마지막까지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것들의 끝을 지켜본다는 뜻이니까.

    세계의 끝, 그 이후의 세계도 그녀에겐 여전히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그러나 그런 추상적인 개념은 이제 막 눈을 뜨고 사고하기 시작한 그에겐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이었던 걸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없이 기계적으로 소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당신. 그대는 저를 기억하시나요?”

    “…….”

    소녀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물론이고, 애초에 형태로 남은 기억이라곤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소녀는 끝내지 않고 다시 한번 더 물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요. ‘케일 프롭슨’. 당신은 저를……. 기억하세요?”

    그녀의 문장에서 강조되어 흘러나온 단어.

    그것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본인의 이름이었다.

    ——

    시동 걸린 자동차 안.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미셸은 초조한 듯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다가 잠시 끄응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네. 내가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다니.”

    쉬는 날, 월급 외 수당이나 잠깐 벌어볼까 하는 마음에 가볍게 생각한 운전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사건이 터질 줄이야.

    원래 사건사고라는게 미리 알고 발생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이 정도 규모의 사건은 평범한 일반인의 입장에서 쉽사리 예상하기 어렵다.

    저택에 갑자기 테러리스트가 찾아왔고, 도련님의 학급 친구의 친모도 테러리스트였으며, 그 둘의 싸움으로인해 저택은 반파, 주변 지형도 난리가 났으며, 저택에 상주하던 경찰들은 진작에 전부 쓰러져 숨만 쉬고 있는 상태로 도움을 바랄 수도 없다.

    그런데 자신은 아이들이 고작 ‘브로치’ 하나 때문에 다시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걸 막기는 커녕, 이렇게 동조나 해주고 있다니.

    지금도 자신이 하는 일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머리를 핸들에 박은 채 중얼거렸다.

    머리를 비우고 진정시키려 했지만, 차에서 홀로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이 그런 생각들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미셸의 머릿속에선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대체 왜 갑자기 저택에 테러리스트가 찾아왔을까?

    테러리스트가 테러를 일으키기전에 무슨 준비를 하는지는 몰라도, 루체스트 타워 테러만으로 꽤나 여력이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하지만 아무래도 물어볼만한 기회도 없었던데다 그럴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보니, 넘겨짚는 것만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테러 조직 내에서 뭔가 이념적인 충돌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루크 아가씨를 납치하거나 해치는 것으로 모성애를 인질로 잡고 제대로 휘두르려던 속셈이었던 거지.

    그런데, 그러면 루크 아가씨를 왜 버린걸까?

    보아하니, 루크 아가씨쪽은 어머니로 인정하는 것 같지도 않던데.

    하긴, 자신을 버린 사람이니까 당연하려나.

    그나저나, 그 남자랑은 별로 사이가 좋아보이지는 않던데, 테러조직 내에선 그하고 대체 무슨 관계였으려나?

    사이가 별로 안좋은 직장동료?

    직장갈등은 테러조직에도 있는건가? 

    하긴, 테러나 저지르는 사람들이 성격이 좋을리가 없을테니까…….

    그런 생각을 이어나가던 중, 그녀는 문득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하아, 역시 찾으러 가야하나….”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어봤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텐데.

    그 순간이었다.

    -똑똑.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시루드가 루크와 함께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곧장 화색하며 차 문을 열었다.

    운전을 시작하면, 아무런 잡념도 떠오르지 않게 될 테니까.

    “조금 늦으셨네요? 탈출 준비는 끝났어요! 어서 타세요!”

    그러나, 루크와 시루드는 차에 올라타기는 커녕, 조금 난처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고만 있었다.

    그에 미셸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두 분 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혹시, 안에서 브로치를 찾지 못한 건가요?”

    “아니에요, 미셸. 브로치는 찾았어요. 다만…….”

    시루드는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루크를 바라보았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말이었기 때문에.

    루크는 시루드의 시선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젠 도주할 필요가 없어졌어.”

    “네? 도주할 필요가 없어졌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에 미셸은 혼란스러워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였으면서, 이제와 갑자기 도망칠 필요가 없다니?

    그것은 계획이 중간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바뀌었을 때 으레 느끼는 자연스러운 정도의 혼란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한창 들려오던 폭발음이나 타격음이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정보는 지금 상황에선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주변이 좀 조용해지긴 했네요. 그 남자는 해결된 모양이죠?”

    상황을 이해한 미셸은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둘 중에 하나가 결판을 냈고, 도련님과 아가씨도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건 승리자는 아무래도 그 여자 쪽이라는 이야기가 되니까.

    그러고보니 그 여자, 뉴스에서 한창 보도되던 내용을 보면 꽤나 수완은 있어 보이던데.

    역시 자신했던만큼의 실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녀와 함께 돌아오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미셸이 물었다.

    “그 여자는요? 계획은 모두 다 같이 오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그분은 어디로 갔죠?”

    “아, 그건 말이죠. 그러니까…….”

    그러자 시루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말 끝을 흐렸다.

    그것은 이걸 자신이 말해도 되는 걸까, 하는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입고 있던 코트 자락을 쥔 루크의 손에 조금 힘이 실리는 것이 보였다.

    “아.”

    그 모습에 미셸은 그제서야 시루드와 루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비언어적 표현이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미셸은 곧바로 아이들을 향해 괜찮다는 듯 위로의 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알겠어요.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대답하기 힘들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에 루크는 처음 시루드를 향해 그랬던 것처럼 괜찮다는 듯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네, 이런 때일수록 할 일을 해야겠지.”

    “할 일이요?”

    “경찰들을 한데 모으는 걸 도와주게. 그들을 이 추운 바닥에 언제까지고 눕혀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레니에가 왜 성녀복이 아니라 동대륙풍 의상을 입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기억력이 참 좋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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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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