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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닥. 다그닥.
황궁에 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과거의 내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도 황제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수상한 떨거지였다면 지금은 그냥 황제 폐하께서 부른다 해도 특별히 이상할 것 없는 명성 높은 무림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과거의 내가 황실에 불려갔다면 대번에 ‘황실에서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기에 일류 떨거지 낭인을 부르는 것일까? 수상해!’ 라는 구설수가 붙었다면 지금의 나는 ‘뇌검낭인쯤 되니까 황실에도 관심을 받는구나.’라는 소문 정도가 도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절차들을 거쳐 황실에 입성했다.
“내가 살면서 황궁에 들어와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허나 대사형의 본가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지는군요.”
“그런데 이래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황궁에 입성한 일행들은 저마다의 감회를 토로했다. 들뜬 기색, 긴장한 기색, 그리고 나를 향한 염려가 섞인 기색까지.
낙양에 오기까지 혁기린의 입을 통해 유경이 중증의 동생바라기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한 일행들이었으니 그러한 걱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가포목점의 장모님마저 처음에 일행들을 마주했을 때는 노여움을 금치 못하셨거거늘, 일행을 마주한 순간 중증의 동생바라기인 유경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불을 보듯 훤한 것이었으니까.
그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이유는…
“후후, 걱정하지 마시지요. 오라버니께서는 여러분들을 반가이 맞이해 줄 테니까요. 무엇보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여러분들을 오라버니께 소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디가지나 유경이 평범한 오빠,아니 이해심이 차고 넘치는 오빠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혁기린 때문이었다.
일행들의 얼굴에 일제히 쓴웃음이 떠올랐다. 누구보다도 황궁을 동경하던 독고이설마저 그런 표정을 지었으니 뭐 더 이상 말을 해서 무엇할까.
“힘내요. 선배.”
“그래, 죽지 않도록 열심히 해봐야지.”
뭐 내가 선택한 길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일행을 본 유경의 눈이 뒤집힐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지만 설마 날 잡아 죽이기야 하겠는가?
하하 너무 그럴 것 같아서 걱정이네.
땅이 꺼져라 한숨이라도 내 쉬고 싶었지만 오래간만에 돌아온 황궁에 얼굴이 확 핀 혁기린을 봐서 꿀꺽 삼켰다.
이런 저런 걱정을 안고 도착한 궁청전에서 익숙한 궁녀들에게 익숙한 주의사항을 받으며 환복했다. 전과 달리 몇 가지 사항만 확인한 궁녀들은 자유로이 날 풀어 주었고 일행들은 어쩌고 있나 확인해 보려 했더니 한창 궁녀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뭐 아마 황궁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겠지.
경험상 금방 끝날 일이 아니라고 여긴 나는 산책을 하기 위해 나섰다.
심심해서라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혁기린.
혁기린은 무려 세 가지 신분을 지니고 있다.
남장여자이자 점창파 대제자인 혁기린. 유야 공주. 그리고 나의 일행으로 무림에 이름이 조금 알려진 황소월까지.
혁기린의 신분으로는 아예 나와의 혼인 자체가 불가능하고 유야 공주라는 신분으로 나와 결혼하는 일도 현실적으로 절대 쉽지가 않다. 반면 황소월이라는 신분은 혼인 자체는 수월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소월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혼인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점창파와도, 그리고 황실과의 연결고리도 모두 끊기는 일일 뿐인데 말이다.
어렵다 어려워.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던 나는 문득 앞을 보며 이 고민이 너무 사치스러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멀리서 익숙한 내관복을 입은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경, 아니…두작은 나를 향해 연신 가까이 오라 손짓하고 있었으나. 화경 고수인 내 눈에는 온화한 표정에 걸맞지 않게 이마에 선 핏줄과 함께 조금도 웃고 있지 않는 눈이 포착되고 있었으니…
나는 방금전까지 했던 내 고민이 아주 사치스러웠다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장탄식을 터트렸다.
일단은 살아 있어야 혼례고 나발이고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아이구우, 두작님!”
일단 나는 유경을 향해 반가워 죽겠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내 예상보다 몇 발 빠르게 나타난 유경.
동생바라기인 사람이니 최우선적으로 혁기린을 만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계산이 틀어졌다.
그야말로 내 입장에서는 급습이나 마찬가지인 만남이었으니 일단 나는 한껏 반가워하며 유경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웃는 낯짝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으니 이렇게 반가이 맞이하면 황제 폐하의 분노도 좀 누그러들지 않겠는가.
“참으로 반갑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하하하하! 자네가 내 누이를 데리고 사지를 쏘다니는 것을 가슴 졸이며 보느냐고 속이 남아나지 않은 것을 제하면 별고랄 것이 있겠는가!”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허. 알긴 아는 모양일세. 근데, 정말 알고는 있었던 것 맞나? 정말 알고 있었던 사람이 이제야 황성에 도착한다는 것이 말이 될 수 있을지 본 황, 아니 내관은 정말 의문일세.”
등에 절로 식은땀이 나는 상황!
형세는 나에게 지극히 불리했다.
혁기린이 황실을 떠나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던 이유는 분명히 나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활로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유야 공주님께서 오라버니에 대한 그리움을 자주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뭣?”
“이 일에 대해서는 정말 깊은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는 오라버니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거늘…”
유경의 얼굴에 분노 대신 궁금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느 사람이라도 궁금해 할 일이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낸 대상이 자신이 아끼는 동생이고 오고 간 말의 낌새가 긍정적인 느낌이라면?
“대 황국의 일원으로써 참으로 책임을 통감…”
“사과는 이제 됐네! 큼…크흠. 그래서 유야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다는 건가?”
어떻게든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겠지.
애써 딴청을 부리는 유경이었지만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유경의 두 귀가 완전히 활짝 열려 있음을!
나는 머릿속의 뇌세포를 모조리 활성화시켰다.
찾아라! 기억의 편린! 언젠가 들었던 스쳐지나갔던 유경의 언급을 모조리 끌어모은다!
“국정을 열정적으로 돌보신다던가…신하들을 상대로 위엄을 세우는 법을 아신다던가…”
“흠! 정말로 유아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폐하. 아주 입꼬리가 승천하시겠습니다.
애써 의심하는 척을 해 보았지만 연신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이 누가 봐도 흡족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상황.
천상루 때도 짐작하긴 했지만 정말 동생 좋아하는 사람이다.
칭찬 몇 마디 들었다는 소식이 그리 기쁠까.
“제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흠. 흠…그렇구만..”
혁기린이 나에게 저런 말을 한 건 사실이다.
다만 혁기린이 유경을 칭찬할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오라버니께서는 너무 열정적인 분이라 신하들을 쥐 잡듯이 잡고 계신 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신하들을 상대로 위엄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포용력을 발휘하는 편이 좋을 텐데요….’와 같은 걱정의 부산물 같은 말이었지만…
뭐 괜찮겠지!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유경은 행복하고 나는 살아남았으니 모두가 좋은 결말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양심통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다인가?”
“…예?”
“그대는 분명 평소 존경해 마지않는 오라버니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다고 했는데 말이야. 유야가 나에게 한 칭찬이 그게 전부냐는 말일세.”
“아.”
“어디 한번 늘어나 보게나. 평소에 유야가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주 궁금하구만!”
유경의 말에 나는 내 스스로 나의 무덤을 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증의 혁기린바라기인 유경이 칭찬 한두 마디로 만족할 리가 없었거늘…!
내 머릿속의 기억을 박박 긁어내서라도 혁기린의 칭찬 한 마디 더 들어보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빛나고 있는 유경의 시선!
“어허, 뭐하나? 빨리 말해보라니까?”
…나는 일행들이 날 찾으러 올 때까지 유경에게 붙잡혀 기억을 쥐어짜내야만 했다.
*** ***
“반갑소. 본인은 유야의 오라버니 되는 사람이오.”
내관복을 입고 등장한 유경. 그런 유경이 황제임을 익히 알고 있는 일행들은 바짝 긴장해 스스로를 소개했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소녀는 소연화라 하옵니다. 무림에서는 흑묘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지요.”
“점창파의 제자, 여일예라 합니다.”
“암룡문의 독고이설이라 합니다.”
“모용세가의 모용연화입니다.”
“음. 다들 반갑소. 내 이 나라의 황제임은 사실이나 지금은 그저 유야의 오라비로써 친구들을 맞이하는 자리이니 너무 부담가지지 않았으면 하는구려.”
“하해와 같은 배려에 그저 감사드립니다.”
“후후. 아니오. 나 역시 감회가 새롭구려. 사실 유야의 친구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오.”
일행들은 유경의 온화한 태도에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바깥에서 혁기린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유경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고 일행들은 혁기린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찍찍!
“유야 공주님께서는 서공을 처음 본 순간부터 무척 좋아하셨지요.”
“서공이라는 이름 역시 공주마마께서 붙이신 것입니다.”
“이 조그마한 녀석이 영물이라니 참으로 놀랍군.”
애완동물은커녕 동물도 가까이 해 본 적 없는 유경은 영물인 서공을 쓰다듬으며 감탄사를 터트리기도 했다.
그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알현 아닌 알현이 끝나고 장내에는 유경과 유야만이 남았다.
“좋은 이들이지 않습니까?”
“그래. 저들이 널 아끼고 있음은 익히 알겠다. 그러니 너 역시 소연화라는 자의 부당한 처우에 분노하여 어사패를 요구했겠지.”
“황실의 일원으로 응당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유경은 자신의 칭찬에 쑥쓰러워하는 혁기린을 보면서 허허 웃었다.
“그나저나 산책로에서 호천안 대협과 담화를 나누셨다지요?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후후, 별 것 아닌 이야기였다. 그냥 골탕 좀 먹였을 뿐이지.”
“…오라버니.”
혁기린이 눈이 가늘게 좁혀졌음에도 유경은 껄껄 웃었다.
호천안의 예상보다 한발 빠른 기습을 통해 호천안을 잔뜩 골탕 먹인 유경.
호천안이 쩔쩔매는 모습도 실컷 보고 엎드려 절 받기나 마찬가지였지만 혁기린이 했다는 제 칭찬도 잔뜩 들었으니 유경의 입장에서는 생각만 해도 유쾌해지는 일이었다.
“앞으로 볼 때마다 골탕을 먹일 것이니 그리 알거라. 남의 집 귀한 동생을 그리 부려먹었으면 그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하아,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시지요.”
유경은 웃었고 혁기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대화가 끊기며 장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유경이었다.
“할 말이 있는 표정이구나.”
혁기린은 유경의 점잖은 재촉에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호천안 대협과 혼인을 하고 싶습니다.”
올게 왔는가.
유경은 유야의 입에서 혼인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음에도 차분함을 유지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어째서일까.
담담히 그 답을 고민하던 유경은 오래지 않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어려운 이야기로구나. 아주 어려운 일이야.”
“….예.”
유경의 답에 유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경의 말대로였다. 호천안과의 혼인은, 정확히는 혁기린의 혼인은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유야 공주의 신분으로 호천안과 혼인을 올린다. 참으로 개연성 없는 이야기지. 정략혼이라 할 수 있는 혼인도 아니었고 너와 호천안 사이에 알려진 인연도 없으니 네 혼인에는 천하 만민이 의문을 표할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황실을 등지고 무림의 이름 없는 야인으로 혼인을 치른다는 것은 더욱더 말이 되지 않는 일. 평생을 해로해야 할 혼인을 어찌 가짜 신분으로 이어나갈 수 있겠느냐.”
거기까지 말한 유경은 유야의 답을 기다렸다.
“오라버니의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제 복잡한 신분을 생각하면 어디 혼인이라는 단어가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하지만…”
유경은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유야의 눈을 바라보았다.
역경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래도 하고 싶고, 해 보고 싶습니다.”
유경은 유야의 눈빛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림인 혁기린의 면모를 보이며 깨달음을 갈무리했던 그 순간을. 무림인 혁기린과 황국의 공주인 유야 인생 그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던 그 순간을.
혁기린의 눈에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강한 의지가 반짝이고 있었으니 유경은 그저 쓰게 웃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오라버니 이전에 첫 번째 조력자임을 자처해버렸으니 혁기린이 이렇게 의지를 불태우는 일을 어찌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함께 해보자꾸나.”
“…오라버니.”
“제독.”
“하명하십시오.”
유경은 사마경휘를 부르며 호천안을 떠올렸다. 동생을 도둑질하려는 도둑놈! 그러나 그 도둑놈도 이 일의 당사자였으니 당사자 없이 일을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호천안이라면 무언가 생각해 놓은 바가 있을 테니 그 계획을 들어보는 것 역시 나쁜 일은 아니겠지.
“그놈을 불러오게나.”
삼자대면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