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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

        

         – 아, 사랑하는 고객님? 의뢰하신… 실종자 탐문조사가 완수되었기에 연락 드렸습니다! –

         

         “…….”

         

         테이저 건에 직격당했던 쇄골 언저리가 뜯겨 나간 것처럼 화끈거리고, 머리가 지끈지끈한 와중에 듣기엔 상당히 열 받는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면… 때마침 전화가 걸려온 덕분에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이 정도?

         

         사실 그 마저도 내가 수신음 때문에 깨어난 건지, 아니면 전기와 관련된 특성이 있어서 감전에 묘한 내성이 있었던 건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주변 상황을 몰래 살펴보기는 더욱 어려웠고.

         

         “……이젠 하다하다 멀쩡한 경찰도 실험체로 쓰나? 이거 우리도 위험한 거 아니야…?”

         “씨발, 실험체는 무슨…! 검사도 진행하지 말고 바로 수술실에 가져다 놓으랬으니, 완전 규약위반이야! …어쩌면 프로젝트가 끝물이라는 게 진짜일지도 모르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두 남자의 음성엔 다 억누르지 못한 초조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소시민적인 면모가 엿보였지만… 민감한 주제로 잡담을 나누는 걸 보면 그들도 비밀 프로젝트에 종사하는 파라다이스 소속 직원들.

         상류층에 가까운 그들이라도 떳떳치 못한 업무에 투입된 데다가 실질적인 권한이나 통제능력도 없으니 무섭겠지 그래….

         

         잠재적 적들에게 공감하는 게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착지와 도시, 용병과 경찰, …실험실과 집. 본의 아니게 한 두 달 사이에 잦은 이직을 경험한 내 견해다.

         

         명쾌한 흑백 논리로 피아를 가를 수 있었다면 훨씬 살기 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을 휩쓸리게 하는 건 상황, 그 잔인한 형편이 모든 걸 결정할 뿐이다.

         

         …안에 들은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고려하는 게 인생이고.

         

         – …고객님? 숙녀분…? 혹시 대답하기 곤란한 처지십니까? –

         

         그럼 지금 내가 고를 수 있는 해법엔 뭐가 있을까.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미미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가끔 근무 중에 보던 환자 이송용 침대에 얹어진 채 옮겨지는 도중에 의식을 찾은 것 같다.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던 팔…은 발각될 위험이 커서 무리였고. 손가락과 다리만 진동에 맞춰서 살짝 움직여서 몸을 더듬어봤지만 당연히 권총도, 단말기도 만져지지 않았다.

         

         “….”

         

         슬쩍 실눈을 떠서 살펴보니 이 인간들은 무슨 전신 방호복 같은 걸 챙겨 입고 있어서 내 생체 테이저 건을 이용해 제압하긴 무리가 있어 보였다.

         

         – 으음… 원래 규정상, 유출 위험이 있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전해드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만…. 계산도 아직인데, 신변에 문제가 생기시면 큰일이니 일단 송부해드리겠습니다. 빠른 시일내 귀하의 재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기업과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는 정착지 조사 리포트가 전송되고 통화가 끊어졌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끝내주게 빠르다.

         

         여기까지 일이 꼬이고, 이미 프로젝트 개요도 대충 알아냈는데 이제 와서 몇 가지 세부사항이 추가된다고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내 혐오감을 키우는 데는 분명 쓸모가 있었다.

         

         무작정 메트로폴리스에서 살겠다고 떠난 주민.

         시민증 브로커 대신 저렴한 밀입국 브로커를 택한 사람.

         소리소문 없이 자리를 비우고 사라진 방랑자.

         

         하베스트 플래닛 인근에 위치한 삼십여개의 정착지에서 한 달간 발생한 실종자만 해도 거의 천명에 육박한다.

         

         이게 몇 년간 지속되었으니… 그 크기는 최소 만 단위.

         

         그야 모든 실종의 배후에 파라다이스 사가 관여했을 리는 없겠지만, 각 게이트가 처리하는 방문객 규모와 게이트 숫자.

         그리고 24시간 가동하는 검문 체재까지 고려하면 이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문을 두드렸다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을 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덜컹…!

         

         매끄럽게 굴러가던 침대가 예고도 없이 정지했다.

         

         “…마취제나 진정제는?”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고민하진 말자고, 좆되기 싫으면. …정 불안하면 가스실이라도 다시 가던가.”

         

         “……그건 더 싫군.”

         

         무례하게 파고든 손이 내 몸을 번쩍 들어 푹신함이라고는 눈꼽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금속판 위로 옮겼다.

         

         철컥철컥하고, 수술대로 추측되는 곳에서 튀어나온 고정용 장치가 관절 부위를 꼼꼼하게 포박한다.

         

         이제 이 직원들이 자리를 비우는 대로 얼른 탈출해서 헬레나를 찾아야겠….

         

         “그리샤님? 준비 끝났습니다.”

         

         “수고했어요. 적출 수술을 진행하실 분만 남고 원래 업무에 복귀하셔도 좋아요.”

         

         …미리 와 계셨구만, 앤 그리샤.

         

         상당히 들떠 보이는 목소리 톤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익숙한 고음.

         아무래도 내 실수로 인해 벌어진 난장판을 수습하는데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많이 남지는 않은 게 분명하다.

         

         “역시 레나야! 근거리에선 징수 부대여도 시간벌이조차 힘드네♪”

         

         신경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혼잣말이 귀청을 두들겼으나 애써 무시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맞닿은 금속 표면과 방에서 흘러 들어오는 한기를 감내한 채, 내 의식을 전기신호로 치환해서 안쪽 회로를 향해 퍼트린다.

         

         원래라면 덜미 잡힐 게 걱정돼서라도, 절대 경유지로 쓸 단말기나 장치가 없었다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긴급상황.

         

         …지직!

         

         힘조절이 어긋났는지 미세하게 불꽃 튀는 잡음이 났으나 접속 자체는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늘 익숙하게 발을 내디디던 도서관이 아니라 조금 색다른 풍경이 그려졌을 따름이다.

         

         어두컴컴했던 시야에 어지러운 선이 나타나고, 빛이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다 묘사되지 않았음에도. 단번에 어떤 그림이 칠해지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얼어붙은 회백색 세계에서 고유한 색을 가진 건 오직 인간과 전파밖에 없었다.

         중앙에 얌전히 쓰러져 있는 내 몸. 그 옆에 있는 수술용 장비에 착석한 직원. 네모난 신호 덩어리, 자신의 단말기를 탐독하듯 바라보는 앤.

         

         앤의 손가락이 스크린 위를 춤출 때마다 오고 가는 신호 줄기가 뒤틀리고… 변화한다.

         

         내가 미쳤다고 어비스 다이브를 강행한 것도 아닌데, 이미 구축된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끼어들어서 벌어진 현상일까?

         아니면 설치된 CCTV가 많아서 영상 데이터가 많아서 이렇게 보이는 걸까?

         

         “흡…!”

         

         “……?”

         

         멋대로 까딱거린 수술용 집게를 본 직원이 잠시 장비를 쳐다보다가… 이내 관심을 끈다.

         

         만일을 대비해 여전히 의지에 따라 해킹이 가능한지 점검해 본거지만, 이러니 마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한 폴터가이스트가 된 것 같아서 긴장이 좀 풀렸다.

         

         하지만 난투로 치달으면 나에게 승산은 없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몸은 현실을 떠나지 못하니, 유리한 전장을 구축하는 걸로 십분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렇게… 무기로 활용할 만한 장비들의 성능을 살피고 있던 와중, 소름 끼치는 협박이 들렸다.

         

         “자… 레나? 선택해줘. 난 네가 저기 있는, 백명이 넘는 불쌍한 사람들을 풀어 달라고 하면 가진 권한을 전부 활용해서 무사히 바깥으로 돌려보낼 거야. …대신 아샤는 완전히 해체되겠지만.”

         

         …앤 이 미친년.

         

         재빨리, 어지럽게 얽힌 신호 줄기에서 헬레나와 연결된 걸 찾아 의식을 파묻는다.

         

         그러자 잠깐 안본 새에 많이 초췌해진 헬레나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떠올랐다.

         

         헬레나가 애원하면 앤은 잘라낸다.

         헬레나가 화를 내면 앤은 기뻐한다.

         

         악몽이 강요한 문제는 한 명의 가족이냐, 혹은 무수한 타인이냐의 양자택일.

         도덕성, 이기심, 정의를 시험하는 부조리한 딜레마.

         

         “……어?”

         

         이거 그럼… 의미가 퇴색된 거 아닌가?

         그녀의 일방적 주장이지만 하인리히 할배의 목숨 빚, 그리고 공유하게 된 이름 때문에 복잡한 사정이 있긴 해도 나는 헬레나의 친동생은 아니다.

         

         외려… 앤처럼 감추는 게 많은 주변인이지.

         그러니 선택을 해야만 하는 가책은 느낄지언정 헬레나 발렌타인을 망가트리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련이고 역경이다.

         

         “차라리 내가….”

         

         “자기희생은 이 자리에선 의미가 없어.”

         

         그런데 이상하다.

         왜 그녀는 저렇게도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왜 뻔한 대답을 피하기만 하는 걸까.

         

         헬레나의 번민과 고뇌가 내 정신까지 좀먹어 들어가는 게 생생하게 다가왔음에도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건 설마… 기대감? 나는 그녀가 예상을 꺾고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라는 이단아를 선택해주기를 내심 바라는 건가? 그렇지만 이건…….

         

         앤 그리샤처럼. 헬레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뒤틀린 기대와 비슷했다.

         

         “…우웩!”

         

         음습하고 멍청한 생각을 날려버린다.

         잘 모르겠다고, 준비가 안 됐답시고 그 절세미녀의 고백도 차버린 주제에 무슨 허튼 망상을.

         

         일부러 구축한 백도어는 유지한 채로 조심스럽게 의식만을 되돌린다.

         드레이퓨스와의 사건 이후, 나는 최대한 이질적인 능력을 숨기는데 노력했다. 그렇다고 헬레나한테도 숨긴 건 아니니까… 작은 힌트만 주더라도 그녀는 잘 대처할 것이다.

         

         삐리리릭…!

         

         더 늦기 전에. 당장 육성으로 떠들 수는 없어도 연락처를 열어 헬레나에게 전화를 건다.

         

         “……하핫.”

         

         아마 그 어떤 소리보다도 또렷한 신호와 엉뚱한 발신자의 이름을 본 게 명백한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막상 나를 죽여버리라는 말을 두 사람 입에서 각각 듣게 되니 기분이 찝찝하긴 하다.

         

         그러면… 어디 분풀이를 할 권리 정도는 나에게도 있으리라 믿는다.

         

         “…매정한 레나도 아름답네.”

         

         애꿎은 주민들을 해방하라는 명령이 방송을 타고 전파된 직후, 어긋난 황홀경에 잠긴 앤의 혼잣말을 듣자마자 나는 움직였다.

         

         “개소리는 그쯤 해두죠? 앤 그리샤?”

         

         철컹!!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거지 같은 구속구가 모조리 자취를 감춘다.

         경악한 이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보란듯이 수술 기계를 조종한다.

         

         전력을 모조리…는 사고가 일어날 테니 무리이고, 기준치 이상을 강제로 끌어다가 처넣어서 수술용 레이저의 출력을 높인다.

         

         그리고 한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보란듯이 저질렀다. 압도적인 무력시위를.

         

         지이이잉—!!

         

         단순히 사람 피부를 절개하는데 그칠 수준이 아니라, 닿은 합금을 녹이고 분자결합을 붕괴시키는 죽음의 광선화한 파장이 수술실을 가로질러 앤이 앉아있던 방까지 덮쳤다.

         

         일직선으로 위협적인 검은 경계선이 그어졌고, 경로에 있던 유리는 삽시간에 녹아내려 새로운 의사소통용 창구를 만들었다. 매캐한 탄내가 코를 찌르고, 짜증나게 차갑던 수술실 온도가 확 올랐다.

         

         그걸 코앞에서 목도한 직원은 구석에 찌그러져 필사적으로 대적할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고.

         완전히 통제에서 벗어나 진짜 중화기가 되어버린 의료 장비를 곁눈질하던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대체 어떻게? 아샤는 해킹용 임플란트도 없을 테고… 단말기는 분명 여기에….”

         

         “공교롭게도 난 임플란트가 없어도 딱히 정상은 아니래서. …아, 그거 거기 있었어?”

         

         싸구려 단말기는 몰라도 권총은 추억이 많은 물건이라 좀 신경 쓰였는데… 보관된 위치를 알아서 한시름 덜었다.

         

         “…….”

         

         어지럽게 요동치던 앤의 눈동자가 이윽고 평정을, 나아가서 약간의 표독스러움을 품었다.

         

         “…레나가 널 포기한 게 아니었구나. 그냥 은총을 받는 사도처럼, 바라던 결과를 거머쥔 거였어.”

         

         속고 속이는 수싸움에서 패배한 것 치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분노였다.

         

         앤은 기막힌 운명의 인도로 모든 게 어그러졌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굉장히 아슬아슬했던 데다가 이미….

         

         “38번 수술실에서 소요 사…!”

         

         콰지직!!

         

         문자 그대로, 빛의 속도로 발사된 레이저가 통신을 시도하던 앤의 단말기를 꿰뚫고 사무실 벽까지 지져버렸다.

         

         과도한 출력으로 인해 공진기를 비롯한 기계 주요부품들이 급속도로 망가져 가는 게 감지되었으나, 나만 조심하면 굳어버린 남자나 앤이 그걸 알아챌 방법은 없었다.

         

         다행히 내가 수행할 역할은 간단하다.

         일그러진 각본으로 인해 화난 주최자가 명령을 번복하는 걸 막는 것. …혹은 손수 결착을 짓는 것.

         

         “그만 포기해!! 더는 남은 방법도 없잖아?!”

         

         “…아직. 아직이야… 아샤가 여기 있으니까! 다시…!”

         

         깡!!

         

         “씹?!”

         

         거슬리게도 내 권총을 뽑아 든 앤이 이쪽을 향해 발포했다.

         의식의 반은 근처 기기에 모조리 연결된 상태라 겨눠진 총구를 보자마자 수술대를 직각으로 세워서 탄환을 튕겨낼 수 있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계획은 애매해도 각오는 흘러 넘쳤다.

         

         언제든 자기 머리를 꿰뚫을 수 있게 조준된 레이저는 그녀의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연신 방아쇠가 당겨진다. 대체 저런 배포의 근원은 무엇일까…? 고민은 짧았다.

         

         실질적인 위협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앤은 처음부터 본인의 생존을 필수적으로 계산하지 않았다.

         

         “너……!!”

         

         망집에 휩싸인 인간은 어찌도 이리 추할까…?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나도 더는 망설이지 않겠다. 불쌍한 헬레나를 괴롭히며 앤이 눈을 희번덕거릴 때 이 순간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기회를 놓쳐 이 터무니없는 또라이를 자유롭게 풀어놓은 건 단 한번으로 족하다.

         

         어차피 헬레나도 앤의 본모습을 봤겠다… 수술용 기계를 전력으로 공격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와장창—!!

         

         “!!”

         

         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발사된 집게가 책상을 뒤엎으며 앤을 덮쳤다.

         

         이 악연에 마침표를 찍기로 한 내 결심을 눈치챈 그녀가 다급히 몸을 날려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 차단문은 내 통제 하에 놓인 지 오래다.

         

         피격 면적이 압도적으로 작은 나는 수술대 뒤에 완벽하게 엄폐한 상태.

         반면 자신은 메스나 주사용 바늘 등의 온갖 도구를 피하며, 일격에 승부가 결정될 레이저도 계속 주시해야 하는 처지라는 걸 자각한 앤이 제삼자를 이용하고자 명령을 내렸다.

         

         “…명령입니다! 가서 지원 병력을…!!”

         “뒤지기 싫으면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흡?!”

         

         기계 팔에 달려있던 톱날 하나를 사출해 다리 사이에 꽂아버리자 숨 넘어가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상반된 지시와 위협을 받은 직원은 제발 이 대치상황에 자기를 끼워 넣지 말라는 듯 거세게 몸부림쳤다.

         …맞으면 죽는 건 비슷할 텐데 권총보다는 살인광선을 존중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

         

         한 쪽은 일찍이 목숨을 내놨고, 다른 쪽은 이제 그걸 거두고자 찾아왔다.

         

         회피조차 불가능하게 사선으로 방을 갈라버릴까?

         전력은 넘치지만 안전장치나 권장출력 따위를 깡그리 무시한 탓에 과연 거기까지 부품이 버텨줄 지 확신이 부족했다.

         

         이상적인 건 급소에 꽂아 넣는… 점으로 된 사형선고.

         

         쿠당탕!

         

         “아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헬레나한테 이 짐을 지우느니 차라리…!”

         

         수술실에 있던 물건들, 부피가 큰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져 도망칠 곳을 메꾼다.

         

         진짜로 적중하면 죽는 거에 비하면 소극적인 위협에, 이쪽이 레이저를 함부로 남발할 수 없다는 걸 뒤늦게나마 파악한 앤이 몸부림치려 했지만… 그래봐야 외딴 섬에 고립된 조난자와 다름없었다.

         

         앞으로 조금… 아주 조금만 더 이동반경을 제한하고 레이저를 잠시라도 막아줄 엄폐물을 치워버리면 끝난다.

         

         “칫…!”

         

         까드득…!!

         

         이대로는 비참하게 말라죽을 뿐이라고 여긴 앤이, 역으로 나를 노리고자 창틀에 발을 걸친다.

         그리고 그건 여태 기다려오던 깔끔한 사격 찬스를 이쪽에 제공했으니….

         

         “미안하지만… 그립진 않을거야. 앤 그리샤.”

         

         “…!!”

         

         시선이 교차한다.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거나 절망하기는커녕 목표만을 뒤쫓는 그 광기에는 본받을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앤의 손가락, 내 굳은 의지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자 힘을 주었으나… 이 치열하고도 우스운 대립은 양측 모두가 기다리던 내방자에 의해 허망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닫아 둔 차단문이 외부 충격에 의해 일그러진다.

         

         …첫 충돌에 발생한 틈으로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저지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늦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두 방문을 개방해 그녀를 맞이했다.

         

         “……레나.”

         

         “…….”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단념하지 않을 것 같던 앤의 팔이 서서히 내려간다.

         

         하지만 헬레나는 그런 앤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웬 재수없는 수염을 기른 남자를 질질 끌면서 들어오더니….

         

         빠각!

         

         “켁?!”

         

         다짜고짜 구석에 얌전히 있던 직원의 턱주가리부터 돌려놨다.

         누군가의 앙큼한 기절 연기에 화가 단단히 난 건 줄 알았으나 그건 아니었다.

         

         “…너도 나한테 잡혔던 인질 중 하나야. 위로 올라가면 그렇게만 말해.”

         

         “아니…… 응.”

         

         그런 얕은 변명으로는 결코 못 넘어갈 난장판이라고 설명해주고 싶었으나 어떻게 보더라도 그녀는 길게 떠들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나 진압복에 튄 피가 아니더라도 충혈된 두 눈과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그 마음에 드리운 어둠을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레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내 이름을 부르지 마.”

         

         “헬레나.”

         

         채앵…!

         

         세번째 부름에 더는 참지 못하고 발검, 카타나의 첨단이 앤의 목에 맞닿았다. …이런 광경을 보고자 노력해온 게 아닐진대 너무나 분했다.

         

         오늘만 몇 번이고 피를 머금은 듯, 새빨간 자국이 남은 칼날이 우뚝 솟았다. 이내… 주저를 떨쳐낸 카타나가 휘둘러졌다. 앤은 그걸 만면에 미소로 긍정하며 받아들였고.

         

         사라락….

         

         “……어째서?”

         

         피는 튀었다. 고속으로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카타나에 맺혀 있던 피가.

         단지 끊어진 게 앤의 생명이 아니라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었을 뿐.

         

         바닥에 흩뿌려진 머리칼 틈새에서 내 권총을 회수해준 그녀가 조용히 선언했다.

         

         “…다시는 볼 일 없을 테니까, 너도 이제 그만 네 삶을 살아. 나랑… 우리와 엮이지 말고.”

         

         “….”

         

         솔직히 헬레나 답지 않은 미지근한 심판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친구에게 하는 작별인사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잔인했다.

         

         끼긱끼긱, 흔들리는 군화가 지면에 비벼지며 막막한 소음을 자아낸다.

         

         넋이 나간 앤이 휘청거리면서도 벽을 짚고 걸어 나간다. 무엇 하나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로부터 도망친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맥없는 퇴장이었다.

         

         “…헬레나, 그녀는 아마…….”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 그치만… 이번은 내 결정을 믿어줘.”

         

         절대…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다.

         가면 쓴 앤은 몰라도, 욕망에 충실한 앤 그리샤와는 내가 더 오래 접촉했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헬레나는 그녀가 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회의적인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끝까지 그녀를 겨눈 레이저를 쏘지 못했다.

         

         이성은 분명 후회할 거라고 경고해 왔지만 어쩌겠는가?

         당사자인 헬레나가, 누구보다 힘든 결정을 내린 그녀가 조준을 풀지 않은 내 무기를 보며 고개를 저었는데.

         

         이건…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느라 예견된 재난을 도외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힘든 길을 뚫고 가려는 히로인을 보면 응원하고픈 마음이 샘솟는 게 정상이겠지만 그걸 직접 옆에서 보조해야 한다면… 얘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3번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자. 거기는 어쩌면 경비가 없을 거야. …바이저도 다시 쓰고.”

         

         “하아…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제발 얼굴 좀 숨겨.”

         

         …새 신분이 필요해질 건 알면서, 위쪽에 득실거릴 병력을 뚫을 작전은 전혀 없으셨던 여주인공님을 어찌 해야 무사히 도주시킬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이.

         아직까지도 기절한 상태인 수염남을 포함한 우리는 승강기 앞에 도착했다.

         

         일단 버튼을 눌러 탈출 수단을 불러 놓고 무책임하게 바닥을 뒹구는 헬레나의 바이저를 찾아 억지로라도 뒤집어 씌운다.

         

         격렬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을 지상으로 돌아가기 전, 혹시나 쓸 만한 정보가 있을까 싶어 나는 통신 채널에 접속했고.

         

         – 침입자 일소작전 개시, 경찰병력은 징수 부대의 공작이 종료될 때까지 포위망을 형성하고 대기하도록. –

         

         “…망할.”

         

         끝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먼 훗날은 되어야 점화되어 돌아올 거라고 여긴 앤의 집념이 예상보다 몇 배는 강했다는 것을.

         

         “?! 아샤, 머리 숙여…!!”

         

         콰아아아앙——!!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정말 어떤 조짐도 없이 폭발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커튼 콜의 시작.

    메르멜 님의 관대한 30코인 후원과 응원!
    익명을 희망하시는 독자님의 20코인 후원! 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연참 대신… 연참 수준의 분량을 써봤습니다…. 매번 지각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2023-02-11 개고 되었습니다. 약 1200자 가량의 묘사와 씬이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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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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