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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

       싸악, 싸악.

         

       “응! 깨끗하다!”

         

       하나로 땋은 갈색머리칼과 고급스러운 메이드 옷이 잘 어울리는 청순한 시녀가 깔끔해진 집을 보며 상쾌한 미소를 보였다.

       뽀득뽀득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열심히 청소를 해서인지 기분마저 상쾌하다는 듯이.

       잘 넘어지고, 여러 실수를 남발하는 그녀지만, 성실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시녀가 다름 아닌 레이라 윈터였다.

         

       …말귀를 못 알아먹어 남 속을 뒤집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허나 레이라에게 모욕이나 욕설은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뇌가 꽃밭이라는 뜻은 욕을 먹었다는 것조차 모르며, 도리어 무슨 말이든 좋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니까.

       어떤 의미에선 웬만한 용병이나 기사보다 멘탈이 강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녀님.”

       “아이린 아가씨 오셨어요!”

       “그, 그냥 아이린이면 된다니까요.”

       “헤헤, 전 이게 편해요. 조금만 기다려요, 좀 있다 점심 먹어요!”

       “아, 예에.”

         

       모처럼 휴일이었으나, 아이린 윈들러는 아침 일찍부터 기사의 오두막에 방문했다.

       그러나 이제 소녀가 오두막에 방문하는 건 거의 일상과 다름없었다.

       레이라에게 커트시를 비롯한 왕실 예법을 배우는 과정 중에서 같이 밥도 먹는 사이가 된 것이었고, 아이린 윈들러도 어느 순간부터 이게 자연스러워졌다.

         

       ‘아, 편하다….’

         

       [아린아. 넌 너무 양심이 없는 거 아니야? 돈도 안 내고 매일 아침 저녁 얻어먹고. 난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누, 누가 누구를 키워! 그리고 공짜로 안 얻어먹잖아, 가끔 선물 가지고 오잖아. 그럼 된 거지, 뭐.’

         

       [그 선물 다 공작님이 보낸 것들이면서.]

         

       ‘…….’

         

       [남이 준 선물을 자기 것처럼 포장하면 안 되는 거야.]

         

       ‘…나쁜 유령 같으니.’

         

       팩트만으로 때리다니, 아주 사악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런 아이린 윈들러의 양심과 상관없이 레이라를 비롯하여 오두막의 주인도 그다지 그녀의 양심에 태클을 거는 군상이 아니었다.

       또한 가끔 그녀가 가져오는 선물들이 하나같이 왕실에서나 취급할 법한 고급품인 걸 생각하면 도리어 밥 몇 끼 대접하고 받는 게 그들에게도 이득이면 이득이었지.

         

       뭐, 둘 모두 그런 이득을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니 교관님은….”

         

       파앙!

         

       “저기 계시는구나.”

         

       보이지 않는 그를 찾으려하자마자 곧장 존재감을 느꼈다.

       뒷마당 한 편에서 들려오는 파공성.

         

       달칵.

         

       아이린은 뒷문으로 나갔고, 늘 그렇듯 열심히 훈련하는 기사의 모습을 보았다.

         

       파앙!!

         

       “…오늘은 또 신기한 걸 연습하시네.”

         

       [염동력 아니지?]

         

       “신기하다. 저게 혹시 그 백보신권이란 걸까?”

         

       [항상 생각하는 건데, 기술명이 좀 특이해.]

         

       “그러니까, 으음, 한자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빙의자 출신 소녀이긴 하지만, 무협지는커녕, 흔한 만화나 영화조차 본 적 없는 수능 외길 고3 소녀는 그렇게 마냥 그의 기술을 감탄스럽게 볼 따름이었다.

         

       ‘동향인’이 제 앞에 있다는 것도 모른 체.

         

       * * *

         

       나무 장작이 마치 도미노처럼 세워져 있었다.

       장작마다 20cm 간격이 있었으며, 총 서른 개 정도의 장작이 있었는데 이한은 이러한 장작을.

         

       “7번.”

         

       파앙!

         

       “11번.”

         

       팡!

         

       “9번.”

         

       서걱!

         

       “…됐다.”

         

       이한은 기쁘게 웃었다.

         

       오전 7시부터 12시까지 계속 시도하여 드디어 ‘한 번’을 성공했다.

       허나 이한으로선 이 한 번이 중요할 따름.

         

       격산타우(隔山打牛).

         

       거리와 공간의 제약 없이 상대를 타격하는 수법으로, 이한이 전날 보였던 백보신권의 원리가 여기서 나왔다고 보면 되었다.

       허나 그는 더 나아가 이러한 격산타우의 원리를 검으로 펼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격산타우의 수법에 권력(拳力)이 아닌 검력(劍力)을 담는 데 성공한 바.

         

       그 증거로 아홉 번째 위치에 있던 장작에 검상이 생겼다.

       다른 장작은 기껏해야 쳤다는 느낌이었을 뿐이지만, 9번만큼은 칼로 그었다는 느낌이다.

       검이 가진 예기가 전달된 느낌.

         

       그리고 이러한 감각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이한에게 무엇보다 큰 힘이 되기 마련이었다.

         

       ‘성공했다는 게 중요하지.’

         

       대체로 이한이 기술을 익힐 때는 다 이런 감각이었다.

       일단 될 때까지 해본다.

       정해진 기한 없이, 무작정 하루에도 수없이.

       물론 이렇게 한다고 성공한 경우는 아직 10%도 안 되지만, 그렇게 성공해서 얻은 기술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하여 이한은 순수하게 기뻤다.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기술을 펼쳐낼 수 있다는 기쁨이.

         

       ‘다음 목표는 운룡대팔식이다.’

         

       공중에서 여덟 번 정도 방향전환을 할 수 있게 되면, 발타르한테도 먹히지 않을까 싶은 이한이었다.

         

       그때.

         

       저벅.

         

       “또 해괴망측한 기술을 연습 중이군.”

       “왔냐?”

         

       언제부터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이한은 갑작스런 제3자의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늘 보던 얼굴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점심은 먹었나? 파이를 좀 구워 왔다만.”

       “오.”

         

       제이크 파먼이었다.

         

       이한의 유일한 기사단 동료이자 지인이라 할 수 있는.

         

       * * *

         

       바삭!

         

       고소하고도 달달한 내음을 풍기는 애플파이가 입속에서 바삭하고 씹힌다.

       맛의 밸런스가 적절히 잡힌 전체적으로 균일한 크리스피함.

       훌륭하다.

       

       거기다 아삭거리는 사과 필링(Filling)의 식감이 놀랍도록 좋다.

       필링이 마냥 잼 같지가 않고, 놀랍도록 신선한 맛이 났으며 은은하게 나는 시나몬과 생강의 향이 금상첨화이니.

         

       이건 예술품이었고, 극찬이 자동으로 나오는 훌륭함이다.

         

       이한은 레이라가 차려준 식사를 끝내고도 미트파이 다섯 개와 애플 파이 일곱 개를 먹어 치운 상태임에도 여전히 허기가 진다는 듯 계속 파이를 먹으며 극찬했다.

         

       “넌 그냥 본직 때려 치고 파이 가게 차려라, 재능이 아깝다.”

       “그게 기사한테 할 말이냐?”

       “그럼 솜씨가 없기라도 하던가. 귀족 주제에 왜 이렇게 요리를 잘해?”

       “몰락 귀족이니까.”

       “몰락한다고 다 잘하면 다 요리사겠군.”

       “…동생들한테 맛있는 걸 먹이고 싶다 보니 실력이 늘더군.”

       “……스토리텔링 미쳤네.”

         

       이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미트파이와 애플파이.

       이상적인 두 개의 파이는 기막히게도 눈앞의 기사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몰락귀족 출신인지라 시종 같은 게 없이 자란 그였고, 요리도 직접 해먹게 됐다고 하던가?

         

       그 때문인지 제이크 파먼의 요리 솜씨는 훌륭했다.

         

       웬만한 요리점에서도 찾기 힘든 맛이었고, 본의 아니게 미각이 뛰어난 그가 평가하기론 최고의 파이와 다름없다.

       참고로 그는 왕실 요리사가 만든 미트파이와 애플파이도 먹어본 적 있다.

         

       즉, 저놈은 왕실 요리사보다 파이를 잘 만든 거다.

       기사의 재능 때문에 묻힌 비운의 적성(?)이라고 해야 할까?

         

       안타까운 일이다.

         

       “넌 기사가 아니라, 식당을 했으면 이미 엄청 성공했을 거다. 어쩌면 대상단에 맞먹는 규모의 식당을 세웠을지도 모르겠네.”

       “헛소리 좀 그만해. 사업이 쉬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일개 식당이 어떻게 대상단만큼 세를 키울 수 있겠어? 말도 안 되지.”

       “글쎄, 가능할지도 모르지.”

         

       [프랜차이즈]란 개념만 돌입하면 무조건 성공할 테지만, 아직 이 세상에선 낯선 문화이려나?

         

       이한은 그나마 인간적인 친구의 성공을 위해 설명해줄까 싶다가도, 저놈이 기사 외길 인생인 것을 알기에 말을 삼키며 애플파이를 먹었다.

         

       순식간에 12개의 파이를 완식하는 그였다.

         

         

         

         

         

       “그래서, 파이까지 구워서 일부러 찾아온 이유는 뭐냐?”

       “…그걸 이제야 묻는다고?”

       “배를 채웠으니까.”

       “뻔뻔하긴.”

       “다음엔 키슈(Quiche)가 먹고 싶군.”

       “내가 말을 말지….”

         

       제이크는 제 친구지만, 하여튼 뻔뻔한 놈이라며 혀를 찼다.

       그래도 저가 한 요리를 맛있다며 싹싹 먹어주는 건 마음에 드는 건지 흐뭇한 기색은 숨겨지지 않았다.

       본인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기사 일보다 요리가 주는 만족감이 더 보람찼음이다.

         

       “크흠, 일단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두 가지 사항 때문이다. 하나는 이번에 네가 잡아들인 위법 마법사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모른 척하지 마. 시체 두 구가 이미 발견됐으니까. 그리고 거기서 발견된 흔적은 틀림없이 너의 것이었다. 단장님이 확신하더군.”

       “…….”

         

       이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스토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회귀자 녀석은 끝까지 저를 무대에서 드러내지 않고, 이한에게 공을 돌릴 셈으로 다섯 중 이미 시체가 된 벌레들을 일부러 기사단의 눈에 뜨이는 장소에 놔뒀을 게 분명하다.

         

       보상을 가져가란 식으로.

         

       다만 그로선 원하던 공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명성을 탐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를 알듯.

         

       “그래도 네 스타일을 아니까, 네가 그들을 해치웠다는 사실은 묻어두기로 했다. 넌 딱히 자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으니. …괜히 위법 마법사들의 표적이 되어서도 안 될 테고.”

       “잘 아네.”

         

       역시 유능한 직장 동료가 있으면 좋다.

       알아서 척척 골치 아픈 일이 안 생기도록 사전에 해결해주니까.

         

       “그래도 보상은 확실히 나올 거다. 원한다면 훈장도 나올 거야.”

       “훈장은 됐으니까 돈으로 달라고 해.”

       “…….”

       “왜, 뭐?”

       “아니, 시간이 지나도 참 여전하다 싶어서.”

       “사람 쉽게 안 변한다.”

       “그건, 그렇군.”

         

       제이크는 확실히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레이라가 갖다 준 차를 마시며.

         

       “확실히 넌 여전하겠지, 그 돈, 또 기부할 셈이겠지?”

       “……뭐라는 거야?”

         

       이한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허나 제이크는 안다.

         

       저 돈이 이한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으리란 것을.

         

       ‘…마법사나 노예 상단을 잡고 얻은 돈은 피해자들한테 줘버리니, 원.’

         

       이한이 수행한 비밀 임무의 정체를 아는 몇 되지 않은 소수의 인원들.

       그리고 그 소수의 인원 중 한 사람이 바로 제이크였다.

         

       이한이 기사단 정보망을 이용해 대형급 노예상인과 위법 마법사를 없애버린 내용을 말이다.

         

       그와 어울리며 정보를 가끔 전해주다 보니 알게 된 것이기도 했음이다.

         

       더 나아가 그가 탈취한 재산들이 어디에다 쓰인지도 알고 있기도 했고.

         

       ‘솔직하지 못한 녀석,’

         

       그는 노예상인과 위법 마법사에게서 뺏은 재산을 모두 납치당하거나 실험체로 끌려온 이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그다지 갖고 싶지 않은 돈이란 이유로.

         

       ‘그거 때문에 공도 못 쌓는 거면서.’

         

       애초에 위법 마법사나 노예 상단에게서 탈취한 재산은 모두 국가에게 환수되어야 하는 게 법이다.

       허나 이한은 이를 어겼다.

       모든 재산을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뿌려버린 것이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그들에게서 뜯은 돈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아니면 이를 기사단에 보고했다면 이미 엄청난 고속승진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돈이든 공이든 그 무엇도 가지지 않는다.

       찜찜하단 이유로, 공이 필요 없다는 이유 등으로 말이다.

         

       대신 피해자들에게 도움이나 되라는 식으로 뿌려버리지.

         

       그리고 제이크가 봤을 때 저 녀석은 정말 찜찜하단 이유로 재산이나 공을 거부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저 제 양심에 따라 움직일 뿐이며, 먹고 살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듯 사는 것일 터.

       그 증거로 녀석은 검소한 오두막에 살고 있다.

       어떠한 불만도 없이.

         

       참으로.

         

       ‘기사도에는 관심도 없을 사람이….’

         

       ‘진정’으로 기사도(騎士道)를 실천하고 있으니, 원.

         

       제이크는 아이러니한 일이라며 피식 웃고는 생각했다.

         

       “넌 단장님이 끝까지 안 놔줄 것 같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글쎄….”

         

       저 같아도 저토록 모범적인 기사를 놓치려 하지 않을 테니까.

         

       * * *

         

       잠시 따뜻 미지근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사내 둘이서 따스해서 어디다 써먹을까.

       금방 평소와 같은 상태로 돌아온 그들은 계속 대화를 이었다.

         

       “다음으로 전할 말은 이거야. 라이오넬 대공이 왕도에 들어온 상태란 거.”

       “그 얘기 듣긴 했는데, 여전히 왕도에 있다고?”

         

       워 게임 이후 기척이 안 느껴져서 북부로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던 건가?

         

       “아마 목적이 남은 거겠지. 뭐,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갈 거야. 대공은 북부를 오래 비울 사람이 아니니까.”

       “근데 나한테 그 얘기를 하는 이유는?”

       “너의 제자가 대공가의 유력한 후계자니까. 어쩌면 너한테 접근할지도 모르겠지.”

       “썩을.”

         

       높으신 분들 관심은 정말 사양하고 싶거늘.

         

       세상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접근한다면 이번 달 안에 접근할 테지. 지금 시기만큼 대공도 움직이기 좋을 시기가 없을 테니까.”

       “…좋은 시기?”

         

       저게 무슨 뜻일까.

         

       이한은 눈을 끔뻑거리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하겠단 표정을 지었고, 제이크는 반대로 어이가 없었다.

         

       마치 ‘네가 모르면 안 되지 않나?’ 싶은 표정.

       

       “…학기 평가 있잖아.”

       “……아.”

       “내가 말을 말자….”

         

       제이크는 무늬만 교관을 질타했고, 이한은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확실히 까먹고 있었다.

       교관 일은 조교에게 다 짬 때리고 있는지라.

         

       ‘학기평가라, 벌써 그 시기였나?’

         

       왕립 학술원에서 유명한 평가.

         

       왜 유명하냐고?

         

       ‘…이번엔 얼마나 남으려나.’

         

       1학년 생도의 60%가 다 퇴학된다는 시기였으니까.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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