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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

       

       53.

       

       “질서와… 혼돈이요?”

       “그래, 질서와 혼돈. 응? 왜 그래? 처음 들어보는 거처럼. 너 설마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몰라?”

        

       세르나는 방금 전에 어둡던 표정은 착각이라고 말하듯, 순식간에 얼굴에 빙글거리는 표정을 띄웠다. 그 모습을 본 성녀는 뭔가 놀림에 빠진 것 같아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성녀는 곧바로 그런 기분에서 벗어났다.

        

       자신을 보며 웃는 세르나의 눈에서 은은한 울적함을 엿볼 수 있었다. 에실리아는 입가를 올린 표정과 반대되는 감정의 눈빛에 순간, 이질감을 느꼈다. 그저 단순한 이질감이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진실된 감정이 아닐 거라는 그런 이질감. 하지만, 단순한 만큼 그 깊이는 심원했다.

        

       성녀가 세르나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 전, 세르나는 머리를 한번 털었다. 머리를 턴 후 다시 보인 얼굴에는 울적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세르나는 계속해서 웃음을 빙글거리며 에실리아에게 말했다.

        

       “왜? 아니면 정말 꼬마 아가씨라 질서와 혼돈에 대해서도 모른다거나?”

        

       에실리아는 눈을 한번 슴벅였다. 성녀는 세르나가 의도적으로 이런 표현을 해 자신의 울적함을 감추고 또 달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녀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달래주기 보다 천천히 아픔을 쓸어내려 주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는 법이다. 성녀는 그녀의 방식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성녀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럴리가요. 태초에 질서와 혼돈이라는 거대한 두 힘이 맞부딪혀 태양과 달, 별, 하늘, 땅, 바다가 탄생했죠.”

       “그래. 잘 아네.”

        

       성녀의 말을 들은 세르나는 머리를 자신의 남편에게 기대며 킥 웃었다. 세르나는 턱짓으로 집의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방금 전 데스나이트가 감상하고 있던 벽화가 있었다. 거대한 두 힘이 맞부딪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벽화였다.

        

       에실리아는 어렸을 때 벨루크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질서에서 성신들이 태어나고, 혼돈에서 마신들이 태어났다. 질서의 가장 밝은 곳은 천국이라고 불렸으며, 혼돈의 가장 어두운 곳은 지옥이라고 불렸다. 물론 너무나도 옛날이라 그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떠올리던 성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어렴풋하게 더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성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세르나가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초월의 시대를 나타낸거야.”

       “초월의 시대?”

        

       묘하게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의 단어였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제대로 고민하기 전에 세르나의 설명이 어어졌다.

        

       “그래, 초월의 시대. 세계가 탄생하고 난 바로 직후의 시대. 질서와 혼돈이 모든 걸 뒤덮었던,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찬란했던 시대. 우리를 완전히 초월한 시대. 우리가 꿈꾸는 시대야. 모든 마법사는 그걸 꿈꿔. 질서와 혼돈이 세계를 물들이던, 진리에 가까운 그때를. 마법은 그 근원에 다가가려고 연구하면서 만들어진거고.”

        

       세르나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에실리아는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자신이라도 세르나가 얼마나 마법에 대해 열정적인 진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성녀는 그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아까보다 더욱 올라간 것을 알았다. 성녀의 웃음을 본 세르나가 에실리아를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때문에 마탑의 늙은이들은 발견한 거에 대해서 아주 환장을 한다는거지. 구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법의 존재? 이거 못 참거든?”

       “그래서 마탑의 마법사들은 어서 빨리 그것의 연구를 완전히 끝내고 싶어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살아있는 실험 재료나 돈을 얻을 수단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상태죠. 그런데도 마탑으로 들어가려고 하신다고요?”

        

       남편의 말에 세르나는 순간 들고 있던 스튜 접시를 떨어트려 깨트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뭐? 이런 미친…. 내가 너희들을 왜 데려왔는데? 마탑으로 끌려가지 않기 하기 위해서잖아! 근데 제 발로 거기를 걸어 들어가겠다고?”

       “가야 하오.”

        

       그녀의 말에 대한 답은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제르피에드에게서 들려왔다. 세르나는 제르피에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제르피에드의 핏빛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확고함을. 세르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절대로 뭐라고 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마치 다른 마법사가 마법을 탐구하던 때 보던 눈빛과 비슷한, 그런 종류의 확고함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싶은 이상한 느낌을 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소를 짓는 건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좋아, 그럼 어디 들어보기나 하자. 대체 마탑에 왜 가려고 하는데?”

       “그곳에 찾는 것이 있소.”

       “…그게 뭔데?”

       “마법이 걸린 물품이오.”

       “…좋아, 말해주기 싫다 이거네? 혹시 그거 위험한거야?”

        

       데스나이트는 유장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생각하던 세르나는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너희들이 날 속이려고 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애초에 기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속일리도 없고. 그리고 해코지 할거였으면 이미 하수도에서 날 죽였을거야.”

        

       세르나는 그 새빨간 입술의 끝을 씨익 올렸다.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마, 나에게 이런 걸 술술 부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치? 내가 기사도를 줄줄이 꿰고 다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정신 제대로 박힌 기사라면 그 진절머리 날 정도의 규율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건 알아. 거짓말 삼가는 것도 그중 하나고. 그리고 그들이 기사도라는 명목 하에 정보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나에게 뭘 원해?”

        

       “그대는 영민하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되오만.”

        

       “내가 좀 똑똑하기는 하지. 마탑에 들어가게 도와달라는거지?”

       “뭐라고요-?!”

        

       세르나의 말을 듣자 마자, 볼트리는 펄쩍 뛰어오를 것 같이 몸을 움직였다. 물론 그는 아내의 긴 팔에 붙잡혀 잔뜩 밤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져야 했다. 하지만 부릅 뜬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요.”

       “있잖아, 남편. 사람 말은 끝까지 우선 다 들어보는게 예의이지 않아?”

       “당신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잊었어요? 거길 또 들어간다고요? 난 절대 허락 못해.”

        

       세르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사랑이 그렇다고 하네. 뭐, 내 사랑의 의견은 잠시 옆으로 두고 보더라도 기사님 당신은 마법사랑 대화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우선 마법사는 절대로-”

       “-이익 없는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세르나와 볼트리는 부부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눈을 크게 뜬 채 몇 번 깜빡였다.

        

       “…요즘 기사는 마법사들의 격언도 배우나?”

       “어깨 너머로 들었을 뿐이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내가 너희들이 마탑으로 들어가게 도와줄 준다고 치자. 나에게 뭘 줄 건데?”

       “마탑 최고위 실력자들의 지식이 궁금하지 않소?

        

       세르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꼭 끌어안고 있는 남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남편을 보던 세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혹하기는 하네.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거기 나오지도 않았지. 그것만 가지고 내 남편 광부로 만들 모험하기는 싫어.”

        

       제르피에드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부부의 집을 한번 훑어볼 뿐이었다. 아담한 집이었다. 이미 보았던 것처럼, 부부의 집은 집이라기 보다는 공방이 섞인 공간에 좀더 가까웠다.

        

       물론 마법사의 집이 시간이 지나면 실험 도구들이나 마법 수식으로 가득한 양피지가 가득 굴러다니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집 한 켠에 조그마한 실험실 하나 없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마법사라는 것은 집이라고 해서 마법 탐구에 대한 목마름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하긴 아이에게 이런 실험 도구들이 널려 있는 집안을 뛰어다니게 할 수는 없겠지. 늘 아이에게 감자 스튜만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촛불로 밤을 물리고, 감자 스튜를 먹으며 오순도순 부부간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 않겠소?”

        

       갑작스러운 제르피에드의 말에 에실리아는 당혹을 느꼈다. 세르나 역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야 너, 그거 무슨 소리야. 말 조심해. 몇 번 이야기해주니까 무슨 십년지기 친구라도 된 것 같아? 우리 아이 낳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해. 그리고 너가 뭔데 우리 부부 생활에 이러쿵 저러쿵이야?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물론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며, 2세의 계획도 전적으로 부부에게 달린 것이오. 하지만 가끔씩은 근사한 발광구 아래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제르피에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세를 한번 바꿨다. 자세를 바꾸면서 그의 품속에서 짤랑거리는 금속 소리가 크게 아담한 집을 울렸다. 세르나는 몸을 한번 흠칫했으며, 볼트리는 목울대를 꿀꺽였다.

        

       볼트리는 순간 깜짝 놀라더니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내를 힐긋 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세르나는 아까보다 더욱 빠르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며 생각했다.

        

       나는 지식을 탐구하는 마법사다. 그런 나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 건가! 나를 모욕할 셈인가!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나도 청명하고도 맑은 돈 소리였다. 그 돈의 값어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눈을 깜빡이는 척하면서 자신의 집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아담한 집이었다.

        

       저 기사가 지적한 것처럼, 그녀와 그녀의 남편의 주식은 감자거나, 감자 스튜였다. 정 먹을 것이 없는 날에는 밖으로 나가 야생 밀과 보리를 가져왔다. 이제 슬슬 육류의 맛이 흐릿했다.

        

       확실히, 저 정도의 돈이라면 번듯한 실험실 하나를 집 안에 장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떨어지기 싫은 날에 공방으로 가 실험을 하지 않아도 집에서 남편과 실험을 동시에 쟁취하는 일거양득을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기사가 말한 것처럼 멋진 조명 아래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고급진 와인을 볼트리와 마실 수도 있다. 촛불은 어둠을 물리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오로지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용도다. 그렇게 맛 좋은 와인을 서로 한 잔씩 주고받으며 말을 속삭인다. 점점 와인의 붉은 빛깔처럼 서로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간다.

        

       이제는 말이 아닌, 눈빛으로, 눈빛이 아닌 숨결로 속삭인다. 근사한 저녁 식사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간다. 입에서 살살 녹는 스테이크는 다 먹은 지 오래고 이제는 후식을 즐길 차례다. 볼트리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식을 먹을 공간으로 이동한다.

        

       잘 때 몸을 뒤척이면 삐걱거리는 소음이 아닌, 푹신함이 몸을 감싸는 커다란 침대가 그들을 맞이한다. 침대에서 서서히 자신을 포장한 잠옷을 벗으며, 오늘의 후식은 나라고 남편에게 달콤하게 속삭이며 자신을 볼트리에게 진상……!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건데 우리를 도와주는 것으로 인해 얻는 이익이 한 가지 더 있소,”

       “어? 음, 으흠! 크흐음…! 어, 어… 그게 뭔데?”

        

       세르나는 간신히 마법사의 격조를 잃지 않는데 성공했다. 제르피에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의미 심장하게 말했다.

        

       “바로 마탑 놈들에게 엿을 먹여줄 수 있다는 점이지.”

        

       그녀의 새빨간 입술 사이에서 킥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르나는 눈 앞에 기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후치라고 하는 저 기사는 자신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녀의 자존심 또한 지켜줄 수 있도록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건 마음에 드네.”

        

       젊은 마녀는 자신의 남편에게 시선을 한번 던지고는 빙긋 웃었다.

        

       “좋아, 협력하겠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러분 돈으로 안되는 것은 사랑 말고는 없습니다. 다들 아시죠??
    아 물론 저는 독자 여러분들을 그거에 상관없이 다들 사랑한답니다♥
    이제 슬슬 이번 에피소드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시험은 끝났는데 왜 이리 제출해야할 리포트가 많은건지…진짜 레포트 20매 이상 써오는 것 같은 건 법적으로 금지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빨리 레포트 제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봐주신 Ilham Senjaya님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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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데스나이트는 성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Score 3.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trayed by her own Order*, the Saint begged the death knight to become her guard—the death knight who could destroy the world. *tl note: she was betrayed by the church, not her own doing. Author Notes: Contains Authentic fantasy, and wholesome love. I hope this brings you the reader a little bit of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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