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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

       

       

       

       

       《그 누구보다 총명하셨던 분께서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인간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총명하다 해서 평생을 총명하게 살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런 수모를 겪으시면서도 대체 왜 돌아오시지도, 도움을 요청하시지도 않으신 겁니까.》

       

       너도 알잖아.

       내 고집이 피워낸, 타고난 배움의 갈증이 이끌어낸 걸음이었던 거.

       그리 어렵게 해낸 걸음인데, 어찌 도망쳐 오겠어.

       어찌 도움을 청하겠어.

       만류와 우려, 그리고 귀족 사회의 뒷면에 대한 경고를 뿌리치고 도착한 곳이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셨다면, 난 수석 졸업생이 되지 못 했을 거야.

       당장 돌아오라 하셨겠지.

       

       나도 처음에는 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넷 중 누구라도 진심어린 후회와 반성을 한다면 용서해줄 생각이었다고.

       가문의 전통을 이용했지만, 그것을 해칠 생각도 없었어.

       어쨌든, 우승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잖아.

       그게 혼약대전의 궁극적인 취지잖아.

       

       《데론 공자와 블런드 공자 중, 혼약 상대를 고르실 생각은 있으신 겁니까?》

       

       푸훗.

       데론과 블런드 중에 골라야 한다고?

       그거 정말 멋진 일이구나?

       근데 어떡해.

       이제는 모르겠네.

       처음엔 가능성을 열어뒀는데, 이젠 닫혀버린 느낌이랄까.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네.

       아니.

       이제는, 아무것도 알기 싫어.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제가 모셨던 대공녀님은 대체 어디로 가신 겝니까!》

       

       미안한데, 그것도 모르겠네.

       네가 찾아줄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러다 대공녀님께 큰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부디, 예전의 대공녀님으로 돌아와주십시오. 이리 빌겠습니다.》

       

       푸하핫.

       이제 와 큰일이 생길 게 뭐가 있겠어?

       이미 큰일이 생긴 거 같은데.

       어쩌면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버텨야 했던 게 아니라, 그때 그냥 죽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어.

       괴인족장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저주였던 게 아닐까?

       나 같은 거 하나 때문에 모두가 고생이잖아.

       

       

       

       짜아악-!!

       

       

       

       ……게, 겔우드?

       지금 내 뺨을 때린 거야……?

       

       《제발, 그릇된 복수심에서 깨어나십시오! 대공녀님은 데론 일행과 다르신 분이지 않습니까!!》

       

       …달라?

       ……다를까?

       ………다르지 않을걸?

       이거 봐.

       난 맞아도 싼 인간인걸.

       데론 일행이 맞아도 싸듯, 나 역시 맞아도 싼데 뭐가 다르겠어.

       

       《이것으로써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대공녀님을 위한 제 마음은 부디 외면치 말아주십시오. 대공녀님은 사랑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하.

       

       겔우드, 그거 알아?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그림자는 전부 검은색인걸.

       아마도 아카데미에서 학문만 배워온 게 아닌가봐.

       배우는 것이 좋아 향했던 그곳에서, 배워선 안 될 것도 배워버렸나봐.

       

       하긴.

       

       인간이란 평생에 걸쳐 학습하는 동물이고, 변화에 따르며,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다고 하잖아.

       그렇게 진화를 거쳐 지금의 인류가 되었고, 만물의 지배자가 된 거라고 하잖아.

       3년간 이어진 폭력과 학대가 내게 각인되는 건 자연의 순리와 같지 않을까?

       지울 수 없는, 깎아낼 수 없는, 파낼 수 없는 각인이 되는건 당연한 거잖아?

       

       어쩌면 나, 걔들을 그저 짓밟고 싶어 혼약대전으로 끌어들였는지 몰라.

       계도와 선도로써 임하겠다는 건, 약자의 비겁한 합리화였던 거겠지.

       깨끗한 척 고결한 척, 걔들과 다르다는 생각은 한낱 꼴불견에 불과했던 거겠지.

       공식적으로 죗값을 묻는 것보다 사적으로 물어뜯고 싶어 걔들을 이 지옥으로 불려들였나봐.

       지옥에 몸을 담근 채, 이곳으로 들어오라고 말이야.

       

       그래.

       

       난 진실을 숨기고 억지를 일삼는 위선자였어.

       

       맞아.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 한 멍청이야.

       

       이제야 알겠어.

       

       쓰레기들과 뒤섞이다, 나도 쓰레기가 됐다는걸.

       

       그러니까 걱정마, 겔우드.

       

       모두가 바라는대로, 이 복수 멈춰줄게.

       

       더 이상 내 손을 더럽히지 않을게.

       

       남은 후보들 중, 한 명을 골라 약혼할게.

       

       다만.

       

       아버지께서 제 막내딸의 추악함을 알게 되시듯, 후보들의 아버지께서도 제 자식의 추악함은 알아야 되지 않겠어?

       

       제 자식이 저지른 짓을 알고도, 윈터펠 대공가와 사돈을 맺고 싶은 가문이 있다면 응당 용서해줄게.

       

       그렇게 끝낼게.

       

       모두가 바라는대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자.

       

       그렇게.

       

       

       

       

       

       

       **

       

       

       

       

       

       “하…….”

       

       하루에도 수천번 뒤바뀌는 감정에,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는 르미앙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이 터졌다가 눈물이 흘렀다가 울분이 차올랐다가 이내, 한숨을 토해냈다가.

       켈리드 공작가와 로스펠 후작가에 서신을 직접 부친 순간에도, 이유 모를 한숨이 나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게 후회스러운 걸까.

       진작 이러지 않은 것에 회한이 드는 걸까.

       오물을 직접 짓밟다 그 오물을 뒤집어쓴 것을 몰랐던 지난 날의 어리석음이 개탄스러운 걸까.

       모를 일이었다.

       

       제 3 외성으로 향하는 걸음이 도살장으로 향하는 가축과 같은 것은 그 한숨이 발목을 부여잡는 것일 터.

       걸음을 멈춘 르미앙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새까만 어둠 속 외로이 빛을 밝히고 있는 달이 자신과 같아, 그리고 그 달을 가로질러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이 엘든 같아, 쓰디쓴 미소가 지어졌다.

       

       르미앙이 붕대가 감긴 왼손을 들었다.

       멀어져가는, 점점 멀어져가는 구름을 잡아보지만, 구름은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어째서 저 구름을 잡고 싶은 걸까.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저 달과 구름처럼 각자의 길을 걸어가면 그만일 텐데.

       미련한 미련이 들러붙는 건 왜일까.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괴물을 잡으려는 자,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구절을.

       강력한 몬스터를 잡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강력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저자가 설명했지만, 겉에 가려진 속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악인을 잡으려다 악인이 되어버린 자신이.

       그릇된 심연을 들여보다 그것에 물들어버린 자신이 그 뜻을 증언하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시야의 끝에서 끝까지 멀어진 달과 구름.

       저 구름이 세상을 한바퀴 돌아 다시 가까워지길 바라며 들었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뭐하십니까?”

       

       거짓말처럼 엘든과 마주쳤다.

       모퉁이를 돌아나온 그와 외길에서 마주친 것이다.

       또 야속한 꿈을 꾸는 걸까.

       아니면 헛된 망상일까.

       가여운 현실일까.

       구분할 수 없는 르미앙이 홀린 듯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다.

       

       “구름… 보고 있었어.”

       

       희미하게 뜨인 시야에, 어여쁜 실루엣이 보였다.

       보랏빛 단발머리가 붉은빛 드레스와 썩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그새 애인… 만든 거야…? 예쁘네…….”

       “오해십니다. 그저 중요한 자리가 있어 동행할 뿐입니다.”

       “그래…, 뭐….”

       “손은 어쩌다 그리 되신 겁니까?”

       

       르미앙이 붕대를 감고 있는 왼손을 보았다.

       엘든의 뺨을 때렸던 왼손을.

       그것이 역해, 날카로운 손톱으로 짓눌러버린 손바닥을.

       

       “손톱으로 짓눌렀어….”

       “…자, 자해를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대답 대신 쓰게 웃은 르미앙이 엘든의 뺨을 보았다.

       마주하는 것이 왜인지 두려웠지만, 자연스레 시선이 향했고 핏물이 맺혔던 그 뺨을 보았다.

       그리고 깨끗이 아문 뺨을 볼 수 있었다.

       

       “…상처…… 아물었네…?”

       

       어째서일까.

       깨끗해진 그의 뺨을 본 순간 안도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은 것은.

       무엇일까.

       폭력을 당해놓고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기 힘든 것은.

       

       그리고.

       

       “예.”

       

       그의 대답에,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다행…이네….”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졌으면 그와 마주할 수조차 없었을 터였다.

       자신의 몸에 남은 흉터와 같은 것이 생겼다면, 아마 혼절을 했을 터였다.

       그래서 천만다행이었다.

       깨끗이 아물어 없던 것이 되어버린 상처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폭력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가…볼게…….”

       

       그리 말한 르미앙이 엘든을 지나쳤다.

       두 다리가 아까보다 곱절은 무거워진 것 같지만, 꾸역꾸역 걸음을 해냈다.

       한데,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녀님.”

       

       걸음이 멈췄다.

       기꺼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받으십시오. 상처를 흉지지 않게 해줄 겁니다.”

       

       다가온 엘든이 무언갈 건네왔다.

       얇고 둥근 원통이었다.

       

       “비록 이미 흉터가 진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아물고 있는 상처에는 특효인 연고입니다.”

       “……왜…?”

       

       나를 줘…?

       내가 밉지도 않아…?

       르미앙이 그것을 받지 못 하자, 엘든이 직접 오른손에 쥐어주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리고선 걸음을 돌렸다.

       불현듯 다가온 구름이, 다시금 멀어지기 시작한다.

       르미앙이 제 손에 쥐어진 연고를 보았다.

       

       핏물이 맺힐 정도로 큰 상처를 안긴 자신에게 외려 연고를 건네고서 떠나는 엘든.

       제 뺨을 할퀴고 간 손을 외려 걱정해주고서 떠나는 엘든.

       그 마음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죽거리는 방관자가 죽도록 밉고 얄미워 아무것도 주기 싫었는데, 그는 폭력을 가한 이에게 어째서 연고를 준 걸까.

       어떻게 제 뺨에 가해진 폭력을 그리 쉬이 지워낼 수 있을까.

       제 뺨을 할퀸 손을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다가와 태연한 얼굴로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그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고, 지난 날의 자신이 참으로 옹졸하고 치졸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허탈히 느껴졌다.

       

       그래서일 거다.

       

       울컥.

       

       눈물이 차올라버린 것은.

       

       울컥.

       

       설움이 터져버린 것은.

       

       멀어져가는 구름의 뒷모습이 너울을 만난 듯 일렁이기 시작했고, 이제껏 억누르고 참아냈던 울음이 기어코 터져버리고 말았다.

       울음이 토해내기 싫어 억지로 웃음을 토해냈던 그 입이, 기어코 울음을 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거워진 마음을 감당하지 못 한 르미앙이 자리에 주저앉아버렸고, 그렇게 한참을 울어야 했다.

       

       “흐윽… 흐으윽….”

       

       아카데미에서 그랬듯.

       

       지난 날에서 그랬듯.

       

       멀어지는 엘든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이제야 건네준 도움을 손에 꼭 쥔 채로.

       

       잠시 후.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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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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