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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

     

    소감.

     

    귀족의 사교계 파티는 피곤하다.

     

    나는 아셀라의 브로치나 다름이 없다. 장식품답게 그녀의 옆에 조용히 붙어있었다.

     

    아셀라는 처음 파티에 나온 만큼 수많은 귀족의 인사를 받았다. 하나하나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는 게 대단하다.

     

    그녀가 시킨 대로 아무 말 않고 방긋 웃는 오브제처럼 서 있는 건 할만했다.

     

     

    ―공자님이 고트베르크 후작가의 장남이시군요. 악수를 받아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비무대회 영상을 보았습니다. 소드익스퍼트인 타냐 공! 그분이 충성하실 귀인이심이 확실하군요!

     

    ―선생님 혼자서 궁에 퍼진 전염병을 모두 치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비결이 궁금하군요.

     

     

    중년 귀족들 상대는 지친다.

     

    하긴 네리아가 대표로 왔어도 고트베르크 가문과 연을 만들려면 나를 통하는 게 상식적이다.

     

    나중에 사업이 확장되면 써먹을 관계도 분명 있을 터.

     

    아버지도 사교계에 자주 출현하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내가 첫인상을 착실하게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오라버니, 여기 케이크 좀 보세요! 산더미 같이 쌓여있어요!”

     

    네리아는 본분을 망각하고는 신나서 다과코너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어머, 공녀님. 이 몽블랑도 드셔보세요.”

    “여기 크렘브륄레도 달콤하답니다.”

     

    그래도 착실하게 가문의 호감도를 올렸다.

    여러 귀족 영부인에게 귀여움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보리스와 브루노가 호위 중이라 다른 문제가 생길 위험도 없고.

     

    뭐, 아재들은 둘째 치더라도.

     

     

    ―세상에, 진짜 그 고트베르크의 공자님이요? 듣던 거랑 완전 다른데?!

     

    ―얘, 내의원 주치의래 주치의! 심지어 1황녀님이랑 2황녀님이 다 러브콜 보낼 정도로 유능하시대!

     

    ―망나니는 무슨 망나니, 완전 젠틀하시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혼담 들어왔을 때 만나나 볼걸.

     

    ―아셀라 황녀님은 어떻게 알고 먼저 채가셨대? 부러워라. 황가의 정보력은 다르구나.

     

    ―공자님, 혹시 형제는 없으세요?

     

    ―아니면 친척이라도!

     

    ―저는 첩실도 괜찮은데. 내의원으로 편지 보내면 공자님께 가나요?

     

     

    제국에 귀족가가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영애도 그만큼 바글바글했다.

     

    한 명씩 아셀라에게 인사하고는 내게 와서 한 마디씩 던지고 간다.

    나는 아셀라의 명령 때문에 입도 뻥긋할 수 없어서 고역이었다.

     

    이러다 벙어리라고 소문나는 게 아닐지 모르겠다.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아셀라의 눈치를 보니 어째 약간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의외로 사교계가 체질인가?

     

    ‘하긴 아셀라가 황제가 될 땐 제국 귀족의 8할은 그녀를 지지했었지.’

     

     

    ―짐의 약점이 무엇이냐고? 아하하! 올해 들은 질문 중 가장 어리석은 문장이었다, 치유사여. 짐에게 약점 따위 있을 리가 없잖느냐?

     

    ―짐은 어릴 적부터 모든 학문과 마법, 정치를 통달했다. 사교계의 귀족들도 짐의 화술에 정신을 못 차렸지. 이제는 모두가 속았다고 깨달았겠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니? 메모해서 다음번엔 반드시 죽이겠다고? 차라리 저 하늘의 달을 쏘아 떨어트리는 게 빠를 거란다.

     

     

    그 어떤 자만심도 아셀라에게는 자신감이 될 정도로 그녀는 실제로 천재니까.

     

    지금도 젊은 귀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밑밥을 뿌리고 있겠지.

     

    그들의 프로필도 하나하나 공부하듯 외웠어야 했을 텐데, 언제 그럴 시간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음 인사는 한 시간 후에 받겠습니다.”

     

    아셀라의 호위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황족은 파티에서 인사 러시가 끊이질 않으니 휴식 시간도 정해져 있다.

     

    인파에서 떨어진 아셀라는 외진 테이블에 앉았다. 시종이 칵테일을 가져다주길래 내가 그에게 말했다.

     

    “알코올 말고 허브티로 가져다줘.”

     

    “허브티로, 알겠습니다.”

     

    내 말에 시종이 잔을 치우자 아셀라가 불평했다.

     

    “난 커피 마시고 싶어.”

     

    “안 됩니다. 성인 되고 드세요.”

     

    “전에도 먹어봤잖아. 괜찮았어.”

     

    “그때 제가 주치의가 되면 말 듣겠다고 하셨잖아요. 어이쿠, 여기 내의원 출입증이 떨어져 있네요. 누구 거지?”

     

    “짜증 나.”

     

    아셀라는 투덜대면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턱 끝으로 사람을 가리켰다.

     

    “저기가 슈바르츠슈바이크 공녀. 오늘의 주인공이야. 공을 세운 건 그녀의 부친이지만 공작가가 잘나갈 건 확정이니까.”

     

    “확실히 주변에 우르르 몰려들어 있네요. 층계 위에 있는 분이 서부 공작이군요.”

     

    “맞아. 먼저 가면 모양이 안 사니까 기다릴 거야. 계급상 우위는 나니까.”

     

    첫 사교계 참가임에도 계산을 마쳐놓은 아셀라였다. 이 자리에서 공작가 정도는 휘어잡을 생각인가보다.

     

    “황제 폐하는 안 오셨나요?”

     

    “공작이 따로 알현하고 왔을 거야. 이런 자리까진 힘들어하셔. 그리고 비교적 젊은 분위기잖아.”

     

    “확실히 그렇네요.”

     

    “…재미없니?”

     

    아셀라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물어봤다.

     

    “이 자리 말인가요? 재미가 문젠가요. 황녀님에게 중요한 자리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왜요?”

     

    아셀라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결국 말을 삼켰다.

     

    “아냐.”

     

    “휴식 시간에는 다른 행동 말고 그냥 쉬시는 게 좋습니다. 소위 멍때리기라고 하죠.”

     

    “나도 알거든. 여기서까지 깐깐하게 굴지 좀 마.”

     

    아셀라가 짜증 내길래 조용히 하기로 했다.

     

    그러고 있으니 곧 연주가 흘러나오고 조명이 바뀌었다.

     

    무대에 조명이 집중되고 몇몇 귀족들이 짝을 맞춰 춤을 춘다.

     

    “춤은 출 줄 알아?”

     

    “하하, 전혀요.”

     

    “…진짜? 안 배우고 뭐 했어?”

     

    “치유술 공부요?”

     

    “거짓말.”

     

    “진짠데.”

     

    마물 잡고, 마족 잡고, 전장만 굴러다닌 내가 춤을 출 기회가 어디 있었겠어.

     

    무대만 밝은 조명이 비추고 나는 어둠에 가려진 것이, 꼭 별세계를 보는 기분이다.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니 라우가가 어디서 귀족 영애를 한 명 잡아다가 신나게 스텝을 밟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갑자기 아셀라가 내 손목을 잡았다.

     

    “따라와.”

     

    파티장을 나가 복도를 지나간다.

    아셀라가 나를 데려간 곳은 한적한 발코니 너머였다.

     

    “여기면 음악은 들리네.”

     

    “그러네요. 경치도 괜찮군요.”

     

    나는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잘 정돈된 정원에 1대1 사이즈 여신상이 하나 서 있었다.

     

    원작에서는 체크포인트 역할을 했었지. 황궁에서도 가끔 보인다.

     

    “황녀님, 그거 아시나요? 여신상은 근처에 있으면 미세하지만 이로운 효과를 받습니다. 이를테면 낮은 등급의 흑마술을 무력화한다든지….”

     

    “지금 그런 얘기는 됐어. 나나 쳐다봐.”

     

    명령은 따라야지.

    나는 지식 자랑은 그만두고 아셀라와 마주섰다.

     

    “손잡고 팔 들어.”

     

    아셀라의 말대로 움직이니 그녀가 가까이 몸을 붙여왔다.

     

    코 아래에 아셀라의 머리칼이 닿을 듯 말 듯 살랑거린다.

     

    “다음 쿵에 오른발부터 움직여.”

     

    “예?”

     

    “쿵.”

     

    예고도 없이 아셀라가 몸에 힘을 준다. 나는 떠밀리듯 스텝을 밟았다.

     

    시선을 아래로 하고 아셀라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벌써 음악은 놓쳤다. 아셀라의 발을 밟지 않게 주의하느라 박자가 꼬였다.

     

    결국 말발굽 다그닥거리듯 꼴사나운 연타만 이어졌다. 장르가 탭댄스였다면 높은 점수를 받았겠지만 아쉽게도 블루스였다.

     

    “흐응, 못하네.”

     

    “아이, 안 해봤다니까요.”

     

    아셀라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날 괴롭혀서 즐거우셨던 모양이다.

     

    “이제 좀 재밌니?”

     

    아셀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테라스 안의 불빛을 반사해 큐빅처럼 도드라졌다.

     

    눈동자는 마나가 가장 흘러나오기 좋은 부위라고 했던가.

     

    저녁놀 아래 호수에서 헤엄치는 기분이다.

     

    “나름요.”

     

    뭐, 신선한 경험이긴 하니까.

     

    아셀라는 내 대답에 콧방귀를 뀌고는 발 쪽으로 시선을 내려 천천히 스텝을 이어갔다.

     

     

    살랑, 살랑.

     

    아셀라의 흩날리는 머리칼을 감상하며 발을 움직이고 있으니 그녀가 천천히 말을 꺼내왔다.

     

    “있잖아, 공자.”

     

    “예, 황녀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시죠.”

     

    “…혹시 꿈을 자주 꾸니?”

     

    “꿈이요?”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까.

    짐작 가는 곳이 없다.

     

    “황녀님은 어떠세요? 수면의 질은 중요합니다. 비염 등으로 호흡이 원활하지 않을 때 주로 악몽을 꾸게 됩니다만.”

     

    “나는… 목소리가 말을 걸어.”

     

    “목소리요.”

     

    “응. 내가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말을 해.”

     

    지금도 아셀라의 배에 들어있는 흑마술의 흔적이 아닐까 한다.

     

    대마녀의 영혼과 재능을 집어넣었다고 게오르크가 말했었다.

     

    카밀라에게서 들었다면 아주 틀린 정보도 아니겠지.

     

    나는 흑마술엔 조예가 없기에 아셀라가 무엇과 싸우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병세로 느낄 통증이 어떤지는 안다.

     

    영혼이든 저주든 뭐가 되었든.

     

    내게는 환자에게 고통을 유발하는 병원체다.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언젠가 그녀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본다.

     

    “많이 아프신가요.”

     

    내 질문에 아셀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지금은.”

     

    “황녀님, 뱃속에서 황녀님을 괴롭히는 병마 말입니다만.”

     

    “응.”

     

    “제가 반드시 고쳐드리겠습니다.”

     

    내 선언을 아셀라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는 작게 대답했다.

     

    “약속했어.”

     

    맞잡은 아셀라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녀의 손가락은 나이를 고려해도 지나치게 얇았고, 그다지 튼실하지 못한 내 근력에 비해서도 허약했다.

     

    밑동만 잡아도 톡하고 부러질 장미꽃 마냥.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완연한 여름 한복판의 밤바람은 따뜻해서 외투를 입을 필요도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찬찬히 아셀라와 스텝을 밟으며 시간이 흘러간다.

     

    “공자도 대답해줘.”

     

    “꿈 이야기 말이군요.”

     

    “응. 혹시… 악몽도 꾸니?”

     

    악몽이라.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는 않은 주제였다.

     

    “표정이 왜 그래?”

     

    나도 모르게 얼굴에 힘이 들어갔나.

     

    “아뇨, 아무것도.”

     

    첫 죽음을 경험했을 때부터 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 장면을 계속 플래시백해 봐왔다.

     

    당연하게도 경험한 죽음이 많을수록 보이는 장면도 점점 많아졌다.

     

    정확히는 101개겠지.

     

    공략에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 꼭 나쁜 현상은 아니었다.

     

    잘 때도 예외는 아니라서, 아침에는 높은 확률로 꿈속에서 죽으면서 깬다.

     

    차라리 기절하면 안 보여서 괜찮은데.

     

    일어나서는 즉시 잊어버리는 편이다. 뇌의 무의식 활동 때문에 현실의 하루를 망칠 순 없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낮에 활동할 때도 보이곤 한다.

     

    “공자? 왜 조용해졌어?”

     

    지금처럼, 아셀라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때라든가.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사람인데 악몽 정도는 꾸지요. 반대로 좋은 꿈도 있습니다. 아, 오늘 아침엔 유니콘을 타고 하늘을 날았네요.”

     

    “하늘을 날았으면 페가수스잖아. 유니콘은 공자 같은 바람둥이는 안 태운대.”

     

    “하하, 꿈은 꿈이잖아요.”

     

    나를 매도했음에도 아셀라는 평소처럼 즐거워하지 않고 어딘가 찜찜한 듯했다.

     

     

    잠시 고민하는 태도를 보이는 아셀라.

     

    그녀의 얇은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고는.

     

    마침내 내게 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수첩에 적어놓은 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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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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