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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

       카바레의 스텝 석은 무대의 뒤편을 반원으로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지난 3주 동안 몇 번이나 극장을 들락날락했던 엘라라 그 구조는 잘 알고 있었다.

       무대에 바로 붙어 있는 데다 위치도 2층이라 전체적으로 내려다보기 좋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공연을 정면에서 보지 못하고 후면 혹은 측면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곳은 공연을 관람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곳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이 스텝 석은 극장의 정중앙에 있었다.

       스텝 석을 중심으로 한쪽 절반이 1번 홀, 나머지 절반이 각각 반을 갈라 2번 홀과 3번 홀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이곳에 있으면 3개의 홀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이곳을 통해 3개의 홀을 오갈 수 있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도, 창고에서 내오는 술도 모두 이곳을 거쳐 객석으로 나갔다.

         

       정돈된 테이블과 정장을 쫙 빼입은 손님들의 모습이 창 너머로 보였다.

       그에 반해 스텝 석 안쪽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손님들이 요청한 간식이나 마실 것을 나르는 웨이터, 모자란 무용수들의 의상을 구하러 급히 창고로 달려가는 재단사, 주방에서 요청한 재료를 안고 달려가는 수습 조리사 등.

         

       모든 무대 뒤가 그렇듯 이곳도 큰 공연을 앞두고 대혼란 상태였다.

       이렇게 직원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장면은 다행히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스텝 석을 감싸고 있는 유리창은 모두 특수한 처리가 된 것이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까만 벽만 보일 뿐이었다.

       

       파리스가 안내한 곳은 스텝 석의 맨 끝쪽이었다.

       시야각이 가장 넓어서 1번 홀의 정면도 조금 보이는 자리였다.

         

       당연히 이런 자리는 아무나 올 수 없다.

       극을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사람을 위한 곳이었다.

         

       루즈의 밤을 이끄는 선장이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라 양 왔는가.”

         

       총감독 유그 마로이네.

       깡마르고 왜소한 체격에 동그란 알의 선글라스.

       늙은 매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의 노인이었다.

         

       “며칠 동안은 뵙기 힘들었네요.”

       “개막식을 앞두고 할 일이 많아서 말이네.”

         

       그는 미소로 그녀를 반겼고, 엘라 역시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엘라 양이 와서 그런지 우리 영감님도 오랜만에 웃네요.”

         

       그의 옆에는 40대 중반의 여성이 있었다.

       극장의 무용수들을 지도하고 관리하는 안무가 마레였다.

         

       그녀는 서로 마주 보고 웃는 마로이네와 엘라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평소엔 항상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인 모습만 보이는 총감독 유그 마로이네.

       그런 그가 엘라만 오면 옆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껄껄 웃어댔다.

         

       그는 재능있는 젊은이를 좋아했다. 경력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막내 배우인 파리스를 이번에 준비 중인 공연의 주역으로 내세운 것만 봐도 그랬다.

         

       그는 공연을 좋아했다.

       젊은 시절에 아내도 딸도 버리고 세상을 떠돌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고아에다 재능까지 있는 엘라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그는……젊은 시절 내버렸던 딸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찾는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앉자마자 오늘 있을 캉캉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하여간 둘 다 공연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들이었다.

         

       마야는 자신의 이름만 간단히 밝히고는 구석에 앉아 객석을 살폈다.

         

       “누굴 찾고 있나요?”

       “우리 단장님이요.”

       “원더스타인 서커스단이라면……잠깐만요. 프로그램 표가 여기 있는데……아! 참가자는 두 사람이군요. 원더스타인 단장님과 베르그송 자작, 크흠!”

         

       마레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알고 있었기에 헛기침을 하며 마야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무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저기예요. 저쪽 4층의 발코니…….”

         

       마레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딱 다물었다.

       발코니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카바레에서 오래 근무한 그녀는 발코니 석의 커튼이 쳐지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발코니 안쪽에는 침실이 있다.

       고객들과 합의한 여인들이 추가적인 잠자리를 갖는 곳이었다.

       침대, 조명, 도구.

       거기 있는 물건들을 떠올린 마레는 얼굴이 조금 벌게졌다.

         

       설마.

       개막식 날에 저 안에서 그걸?

       아니겠지.

         

       “저기만 커튼이 쳐져 있네요.”

       “어……그, 그러게요.”

         

       마야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발코니 석을 노려봤다.

         

       엘라라면 그녀의 얼굴에서 그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로이네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미처 친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브왈레 그 녀석에게 맡기면 어느새 자꾸 협찬 상품이 무대 위에 놓여 있단 말이야. 캉캉 도중에 사람만 한 곰 인형이 나와서 춤을 추는 파트를 넣으려 하질 않나, 가사에 어느새 해운회사의 이름이 들어가 있질 않나.”

         

       노인의 투덜거림에 엘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요즘 경향이 그래요. 베가스에서는 아예 기획 단계에서부터 상품을 팔려고 하는 공연도 있어요.”

       “흥. 전부 돈, 돈, 돈. 그렇게 후원자들에게 휘둘려서는 제대로 된 공연이 나올 수 있겠나?”

       “시대가 변했어요, 감독님.”

         

       가난한 학교 사정 때문에 매일 길바닥에서 재주를 보여야 했던 엘라다.

       모든 공연을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쳐놓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회 중에 어느 쪽을 밀어주는 건 조심해야 해요. 너무 노골적이면 편파 시비가 붙을 수도 있어요.”

       “어느 서커스단의 부단장에게 편의를 봐주는 건처럼 말인가?”

         

       마로이네의 짓궂은 말투에 엘라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어, 이러기에요? 설마 주최 측에 신고할 건 아니죠?”

       “이번에 새로 준비하는 공연에 초연 배우를 맡아준다면 고려해보겠네.”

       “그럼 저는 대회 중 부정 스카우트로 신고하겠습니다!”

       “크흐흐, 우리 둘 다 해고당하겠군그래.”

         

       둘이 또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무가 마레는 잠시 타이밍을 재는 듯하다가 기습적으로 끼어들었다.

         

       ”엘라 양, 후원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베르그송 자작님은 어떤 분이세요? 수익을 중요시하시나요, 아니면 작품의 완성도를 중요시하시나요?“

         

       갑작스럽다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질문.

       엘라와 마야는 그 의도를 몰랐지만, 마로이네와 파리스는 당황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허, 설마 여기서 그걸 물을 줄이야.

       -저도 묻고 싶었지만 자제하고 있었는데.

         

       엘라는 주변을 둘러싼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자작님이요? 그분은 그냥 언제나 저희에게 묵묵히 지원을 해주세요. 요청하신 것은 바로 들어주시고요.“

       ”와, 정말 좋은 후원자분이시네요. 저희 소유주인 무스탕 후작님은 사건 사고 안 터지는 걸 중요시하시거든요. 자신의 명예에 해가 되는 일을 제일 싫어하시죠. 경영자인 브왈레 씨는 수익 제일주의고요. 원더스타인 단장님이 영업을 잘하셔서 그런가?“

         

       엘라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자신에게 집중되는 세 사람의 시선에서 뭔가를 느꼈다.

         

       대충 둘러대고 회피할까, 아니면 정면으로 맞부딪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리스크 회피는 지킬 게 많이 있는 강자의 선택이었다.

       자신들 같은 무명 서커스단은 독이든 약이든 일단 들이키고 봐야 했다.

         

       ”단장님 덕분이죠. 베르그송 자작님이 단장님께 푹 빠져있으니까요.“

       ”역시!“

       ”그런 거였나…….“

         

       고개를 주억거리는 극장 사람들.

       엘라는 일부러 삐친 척을 하며 되물었다.

         

       ”뭐예요. 뭐가 그런 거였나니. 다들 뭔가 알고 계신 건가요?“

         

       마레는 속삭이듯 그녀에게 말했다.

         

       “엘라 양은 잡지 안 봐요?”

       “많이 보는데요.”

       “주로 뭘 보죠?”

       “음, <크리스티앙 가이드>랑 <빵과 서커스>, <멜로디네즈>…….”

       “전부 공연 관련 잡지군요. 우리 영감님이랑 똑같네요. 제가 말하는 건 엘라 양 또래 여자아이들이 보는 잡지를 말하는 건데…….”

       “서커스 소식은 저기서 다 얻을 수 있어요.”

       “서커스 소식인데 서커스 소식이 아니에요.”

         

       마레는 루즈에 떠도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베르그송 자작과 떠돌이 서커스단 단장의 열애설을.

         

       이야기를 듣던 엘라는 ‘으엥?’하는 어처구니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소리래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안 그러면 베르그송 자작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무명 서커스단에 후원을 왜 했겠냐며, 계속 따라다니는 것도 남자에게 반해서 그렇다는 둥. 다행히 얼마 전에 상회에서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했어요. 조만간 후원의 이유를 정식으로 발표한다나? 당연히 사람들은 열애설을 부인하겠거니 하고 있죠. 제정신이라면 그걸 인정할 리 없잖아요.”

         

       그 말을 들은 엘라는 유라크네가 읽는 잡지들을 떠올렸다.

       주로 세간의 가십거리들을 실은 여성지.

       그녀는 아마 기사를 다 읽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 열애니 뭐니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정작 단장은 상대편에 전혀 그런 마음이 없는데.

       당연히 열애설을 부정하겠지.

         

       엘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유라 언니, 개막식에 참가 안 하는 게 이런 의미였어?

         

       “그런데 엘라 양의 말을 들어보니 일부는 사실이었네요. 자작님이 단장님을 쫓아다녔다는 건.”

       “어, 저기…….”

         

       엘라는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리스크 회피가 필요한, 잃을 것이 많은 강자가 이쪽에 있긴 있었다.

       베르그송 자작.

       자신의 입방정 때문에 소문의 일부가 기정사실화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건 최악의 방향이었다.

         

       사람들이 믿든 말든 차라리 열애설이 도는 게 낫지, ‘짝사랑인데 차였습니다.’라는 말은 베르그송 자작의 명성을 크게 떨어트릴 염려가 있었다.

         

       “저기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물론 비밀로 할게요.”

         

       마레가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거짓말을 했다.

       엘라는 조만간 카바레 사람 전체가 ‘해당 서커스단의 부단장이 인증한’ 소문을 주고받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나비 효과를 일으키는 건 아니겠지?

         

       “커튼.”

         

       그때, 그동안 가만히 객석을 살피고 있던 마야가 입을 열었다.

       그녀 역시 소문의 내용을 들었다.

       그러자 커튼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커튼이 계속 쳐있어.”

         

       안에서 무슨 일어나는 걸까.

         

       비밀스레 오가는 손장난.

       장난스러운 사랑의 속사임.

       그리고 뜨거운 입술과 혀의…….

         

       마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단장님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런 짓을…….

         

       간신히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마야였지만, 이어지는 엘라의 말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 저기 뒤에는 침실이 있지 않았나?”

         

       침실?

       침실…….

       침실!

         

       무언가를 떠올린 것은 마야뿐만이 아니었다.

       늙은 마로이네도, 파리스도, 마레도, 엘라도……그걸 떠올렸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크흠, 이래서 미성년자는 출입금지인 건데.”

         

       그때, 말이 나오기 무섭게 4층 발코니석의 커튼이 열렸다.

       원더스타인과 베르그송 자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도 알 수없다.

       그건 밀실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마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화장을 새로 했어.”

       “어, 뭐라고?”

         

       마야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녀는 대상을 형태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도 조금 젖어 있어. 씻은 거야.”

       “어…….”

       “씻어도 눈물 흘린 자국은 조금 남아 있네.”

         

       엘라는 마야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극장 사람들은 마야의 말을 듣더니 서로를 바라보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두 소녀가 듣기에는 낯뜨거운 내용이라 그랬겠지만, 엘라는 그런 배려에 감사하지 않았다.

       서커스단의 명성이 떨어지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까마귀맛쿠키 님, 3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그동안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방향을 잘 잡고 달리겠습니다!

    -글레이즈드 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고친 보람이 드네요! 찬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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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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