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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

       홉 고블린 타르타라의 하루는 바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전사는 될 수 없었지만, 그 대신이라는 듯 고블린치고 성실한 성격을 타고났으니.

       

       잡일부터 시작해 온갖 역경을 거친 끝에 마침내 부족 전체의 식사를 책임지는 위치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다.

       

       오늘은 그 기념비적인 첫 근무 날. 그녀가 주름진 녹색 피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고브브브븟!”

       

       그렇게 혼자 좋아라 박수를 치며 도착한 주방. 오늘은 족장이 드디어 아끼던 마지막 고기를 도축하는 날이다.

       

       잡내를 없애주는 빨간 열매를 먼저 고기에 발라놓으라고 시키긴 했는데 아랫것들이 잘해두었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문을 여는 타르타라.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긴 시간 함께 해온 동료들이 도축된 모습이었다.

       

       “고, 브…?”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든 주방.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고블린들은 가죽이 벗겨진 채, 부위별로 해체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다들 손목이 잘려 나갔다는 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잔인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도 아니고 고블린을 한낱 고깃덩어리처럼 다루다니. 숲 외곽을 방랑하는 열등한 것들조차 이런 짓은 안 한다!

       

       겁에 질린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쳐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전사들에게 지금의 참상을 알려야 한다. 끔찍한 살인마가 부락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그러한 사명감을 불태우는 순간. 타르타라의 목에 두꺼운 밧줄이 걸렸다.

       

       “고흑?!”

       

       목을 휘감아 조르는 밧줄.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의 동료를 도살한 그 미친 살인마가 분명하다!

       

       밧줄에서 가해지는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데다가 목을 제압당한 그녀가 이를 알아채고 자력으로 탈출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발버둥 치다 질식하며 힘이 빠진 타르타라. 밧줄의 주인이 축 늘어진 그녀를 다시 주방으로 끌고 갔다.

       

       쿵!

       

       문이 닫히며 외부와 격리된 순간. 타르타라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죽는지 정도는 확인하고 싶었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뜬 타르타라. 그 필사적인 노력은 헛되지 않았는지, 살인마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족과 비교해도 비슷하거나 좀 더 작은 체구. 분홍 머리의 인간이 순백의 단검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는 잘 버티네.”

       

       그 한마디와 함께 무심하게 휘두른 단검에 타르타라의 시야가 회전하며 바닥을 나뒹군다.

       

       목이 잘린 타르타라의 뇌가 완전히 정지하기까지 주어진 찰나의 여유. 그 순간에 떠올린 것은 복수심이나 분노,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은 평생 본 적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그리고 콧속을 파고드는 향기로운 냄새.

       

       그것이 타르타라의 죽음이었다.

       

       ***

       

       전부 처리한 줄 알았더니, 뒤늦게 한 마리가 더 들어오는 바람에 기겁했다.

       

       “하아…놓치는 줄 알았네요. 또 늦게 오는 놈이 있지는 않겠죠?”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리 말하자 주방 창고의 문이 열리며 리디아가 나왔다. 이번에 내게서 익힌 은신법을 사용하여 기척을 한껏 죽은 상태로.

       

       “모르지.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 한둘 몰래 암살하는 거면 몰라도 이렇게 많이 죽이는 건 힘들어.”

       

       “뭐, 그래도 벌써 절반 가까이 처리하지 않았나요?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죠. 빨리 절 칭찬하세요!”

       

       “그래그래. 요나 대단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리디아. 그런 그녀의 손길을 받으며 조금 전에 잡은 고블린을 빠르게 손질하기 시작했다.

       

       홉 고블린은 외곽의 방랑 고블린과 달리 쓸만한 부분이 참 많다.

       

       우선 가죽은 스크롤의 재료가 되니 마탑에서 상시 구매하고, 손뼈는 언제나 그렇듯 연금술 재료, 암컷은 해당 사항이 없지만 수컷의 고환은 정력제로도 쓰이는 데다가, 마석도 훨씬 알이 굵다.

       

       다만 전부 챙겨가기엔 너무 시간이 부족하다. 방금 전에도 한참 갈무리 중에 기척이 느껴져 호다닥 숨은 것 아닌가.

       

       우선 손목을 잘라내고, 다른 부위도 힘겹게 발라내는 대신 깔끔하게 쳐냈다.

       

       가죽은 널찍한 등과 배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으로 뜯어내고, 마지막으로 마석을 뽑아낸다.

       

       사아앗-

       

       그러자 따로 챙기지 않은 시체가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이래서 전원 암살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마석만 뽑으면 시체 처리가 간단하지 않은가.

       

       주방에 널브러진 다른 홉 고블린 시체의 마석까지 마저 뽑아내자 좀 어질러지긴 했어도, 이전처럼 피투성이가 아닌 평범한 주방의 모습이 드러난다.

       

       뭐, 주방이라고는 해도 정말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도축 및, 재료 손질용의 평평한 돌. 그리고 큼직한 모닥불과 넓게 뚫린 지붕이 전부니까.

       

       “자, 그럼 이제 슬슬 전사 계급이 사는 곳에 갈 생각인데…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죠?”

       

       “응.”

       

       고개를 끄덕이는 리디아. 그녀가 숨어있던 창고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체불명의 열매들과 훈제된 각종 고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바닥에는 도축 당하기 직전에 구출한 알몸의 여성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 벌벌 떠는 여인. 그녀의 피부는 물에 갠 빨간 가루로 범벅이 되어있어 본래의 살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미리 양념부터 칠한 거겠지. 어휴 잔인한 고블린 새끼들.

       

       쯧쯧 혀를 차며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저기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사, 살려주세요….”

       

       “전 요나라고 해요. 홉 고블린 부락을 토벌하러 온 모험가구요. 누나도 같은 모험가 맞죠?”

       

       “전 맛없어요. 잡아먹지 말아주세요 천사님….”

       

       “…리디아 님. 이 누나 완전 고장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

       

       “일단 말해두는데 패닉에 빠진 건 요나 너 때문이다?”

       

       “에이. 제가 뭘 했다고요. 저기 돌로 된 도마에 누워서 양념 범벅이 되어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길래 살려드렸을 뿐인데.”

       

       “갑자기 나타나 지금껏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고블린을 전부 죽이고,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입술을 할짝이면 누구나 기겁할걸.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있다면 더더욱.”

       

       “그거야 당연히 농담이죠! 이제 괜찮다고 긴장 좀 풀어주려고 던진 요나식 조크라구요! 제가 식인종도 아니고 사람을 왜 먹어요? …야한 의미면 모를까!”

       

       “…요나는 사람의 마음을 몰라.”

       

       이 녀석을 어찌해야 하는가. 그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리디아.

       

       은근히 실례인 리디아는 둘째치고, 이렇게 붙잡힌 사람을 발견했으니 그냥 휙 가버릴 수도 없다.

       

       어디 숨겨뒀다가 나중에 데리고 가거나, 암살은 잠시 멈추고 이 사람이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아직도 넋이 나가 있는 여자 모험가의 뺨을 붙잡고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아, 우으….”

       

       그러자 이제는 아예 인간의 말을 잃고 파르르 떠는 모험가를 향해 살짝 내리깐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고 싶나요?”

       

       “네, 네에….”

       

       “하지만 전 배가 고픈걸요.”

       

       “히이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모험가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제가 대신 잡아먹을 사람을 알려주세요.”

       

       “…에?”

       

       “홉 고블린 따위에게 붙잡힐 정도면 대단한 실력의 모험가는 아닐 텐데. 혼자 온 게 아니라 파티를 짜서 동료들과 함께 왔죠? 그 동료의 위치를 알려주세요. 그럼 당신은 살려드릴게요.”

       

       “그, 그건….”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미, 밀라는 싸우다 죽었어요. 첫날에 잡아 먹혔고요.”

       

       “흠흠. 일단 하나는 없는 걸로.”

       

       “돌로레스는 어제 잡아먹혔어요. 제 눈앞에서 구워져서…흐윽!”

       

       “이런.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래도 울지 말고 마저 말해보세요. 여기까지 말한다는 건 누군가 더 있다는 소리죠?”

       

       “하, 한스.”

       

       “오. 남자 이름이네요?”

       

       “네…한스는 남자라서 족장에게 바쳐졌어요. 놈들의 노리개가 됐겠지만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긴. 고블린들이 남자에 환장하긴 하더라구요. 자살한 게 아니면 쉽게 죽진 않았겠죠.”

       

       “…자살은 못 했을 거예요. 한스는 겁쟁이니까. 그래서 제가 지켜준다고 약속했는데…미, 미안…미안해 한스….”

       

       그리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험가. 아무래도 둘은 각별한 사이였나 보다.

       

       아무튼 대충 사정은 알겠다. 4인 파티가 들어왔다가 하나는 전사하고, 하나는 잡아먹혔으니 남은 건 이제 둘인가.

       

       아니. 어쩌면 남자는 더 잡혀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적당히 잡아먹어서 남아있지 않을 뿐, 남자는 두고두고 돌려먹고 있을 테니까.

       

       족장이나 다른 높은 계급의 고블린을 잡을 때는 집을 자세히 뒤져봐야겠네.

       

       “아,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있어요. 이것만 답해주시면 살 수 있을 거예요.”

       

       “뭐, 뭔가요? 뭐든 대답하겠습니다!”

       

       “이름. 누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

       

       한참을 고민하던 모험가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파는 것처럼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셀리. 셀리에요.”

       

       “좋아요 셀리. 제가 한스 씨를 데려올 테니 그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야 해요? 그런 팔다리로 바깥은 위험하니까. 알겠죠?”

       

       “……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셀리를 놔주고 리디아를 바라보았다.

       

       “리디아 님.”

       

       “응.”

       

       “바로 족장부터 잡으러 갈까요?”

       

       “잘 생각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큼직한 대검을 꺼내는 리디아.

       

       절반은 몰래 암살했으니, 나머지 절반은 대놓고 암살하기로 했다.

       

       아무튼 목격자만 없으면 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조금 화나기도 했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착한 고블린은 죽은 고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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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Score 8.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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