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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1

    적하장에서 펼쳐진 혼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컨테이너 위.

    양복 위에 그을린 로브를 걸쳐입은 남성이 피 묻은 안경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역시 이 정도론 그녀를 온전히 불러내기엔 역부족인가 보군요.”


    니드호그의 조각과, 적하장 전체를 제물로 소모하는 대규모 희생제사.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의식으로도, 죽음을 현신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대가였다.

    과거 대륙전쟁 당시 그 막대한 피와 재물을 갈아넣었을때조차 눈꺼풀을 들어올리지 않던 그녀에겐, 이런 외딴 적하장의 대략 50명 남짓의 몇 안되는 인부들과 각종 화물의 가치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보일 테니까.

    “아무래도 웬 훼방꾼의 견제가 심해서 예정이 틀어진 것이 크네요.”

    직업박람회가 함께 진행중인 전시장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의식의 트리거가 될 니드호그가 누군가에 의해 토벌당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심지어 그 사건 이후 ‘인구 밀집장소의 테러’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는 바람에 대부분의 아카데미에서 사건이 어느정도 잠잠해질 동안 아이들의 단체 외부활동을 전부 취소시켜버리기까지 하는 중이니, 당분간 순결하고 깨끗한 어린 피 다량을 제물로하는 계획을 실행하기엔 요원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애초에 계획이 실패하는 것 쯤이야 계산범위 이내였다.

    “뭐, 그래도 얻을 건 얻었으니 상관 없으려나요.”

    남자는 피를 모두 닦아낸 깨끗한 안경을 다시 고쳐쓰고는, 수면 위에 비치는 달빛을 집어내듯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돌연 검은 불길이 일어나 그의 손을 삼켰고, 이후 다시 불길이 잦아들었을 때에는 엄지손톱 정도 크기의 작고 검은 구슬이 그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달빛이 떠있던 자리를 마치 구멍을 낸 듯 자리해 있었다.

    이 정도로 작은 결정이라니, 당초 계획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미약할 따름이지만….

    이 작은 결정으로 이룰 수 있는 가치를 생각하면 그래도 썩 나쁘진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품 속에 그 구슬을 잘 갈무리한 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중얼거렸다.

    “어딘가에 살아있으리라 예상은 했습니다만, 당신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러자, 아무것도 없으리라 보였던 어둠 속에서 한 노파가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네놈인가, 세이어.”

    ‘계획’이 진행되며 후일 조직의 타겟이 되자, 죽음을 위장해 도망쳤던 동료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게 된 그는 꽤나 반갑다는 티를 내며 웃었다.

    그의 변함없이 깔끔하고도 가식적인 미소에, 노파는 마찬가지로 웃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는 여전한가보군. 손가락이 몇개정도 잘려나갔어도 말이야.”

    “하핫, 저는 역시 그 눈은 속일 수가 없겠군요.”

    세이어는 깔끔히 인정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영혼시의 소유자 앞에서는 결국 거짓으로 모습을 감출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몇번의 죽음을 맞이했는 지 보았으리라.

    그리고, 이곳에서 무엇을 얻었고, 또 무엇을 하려 하는지도.

    “다른 사람들은 불쾌하다 하지만, 저는 좋아해요. 당신의 그 눈.”

    마치 사람을 발가벗겨 놓는 듯한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는, 그 특성때문에 더욱 자신과 타인의 불신과 기피를 불러오곤 했다.

    게다가 상대방의 영혼 깊숙히 숨겨진 치부를 들춰내는 것을 마치 안부인사처럼 삼는 그녀의 삐뚤어진 성격까지 합쳐진다면,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은 더욱 더 심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세이어는 그런 그녀의 성격과 특기가 싫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자신이 추악하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있는 상대와 대화하는 건 언제나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니까.

    그는 의식을 통해 얻은 구슬이 담긴 주머니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메를린,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온 것이라면 이미 한발 늦었군요. 이미 의식은 전부 완성되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훼방을 위해 이곳에 온 거라면, 의식이 완료된 시점에서 그녀에겐 승산이 없었다.

    쉬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가치’를 손에넣은 흑마법사에게, 인형도 없는 인형사따윈 놀잇감도 되지 못할테니까.

    설사 그녀에게 무언가 자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발한 수단이 있다 한들, ‘열쇠’를 이용하면 그녀따윈 달궈진 철판에서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고기패티의 신세가 될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별 상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네 일을 방해할 생각 없네. 그것은 어차피,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의외의 대답에 세이어는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호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제게 다가온 걸까요?”

    그러자 메를린은 검은 구슬이 담긴 그의 양복 한켠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랜만에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있거든.”

    “오, 마치 ‘그녀’를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마치 물건의 정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 같은 메를린의 모습에, 세이어는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혼시의 소유자니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죽음이 ‘그녀’라는 본질까지 눈치채고 있을 줄이야.

    그녀가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 꽤나 흥미롭기는 하나, 단지 그 뿐.

    그로써는 사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당당하신 게 아닌가요? 제가 왜 당신과의 대화를 승낙할거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래도 네가 거절할 수는 없을 거네.”

    “어째서죠?”

    “대화를 원하는 건 내가 아닌, ‘그녀’이기 때문이지.”

    ——

    서드는 다리가 아프다는 디아나를 업고서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조금 지치긴 했지만, 방해되는 인부 몇명을 제압하고 적하장을 빠져나온 것 외엔 딱히 체력이 소모된 것도 아니라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한창 전격마법을 사용한 뒤라 정전기로 머리가 부스스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다리가 많이 아팠던 모양인지 별 신경은 쓰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하! 파이, 이거봐. 나 머리가 뜬다?”

    정령화한 파이에게 디아나는 자신의 뜬 머리를 과시하며 웃었다.

    하지만 정령과 오래 지내며 친화력을 키운 디아나와는 달리 정령 친화력이 거의 없는 서드에겐 디아나가 마치 허공에다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소녀와 정령의 대화가 어느정도 잦아들 무렵, 서드는 그동안 상황에 묻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그나저나, 아깐 미처 묻지 못했는데……. 너희들은 대체 어쩌다 그런 곳에 있었던 거냐?”

    “몰라. 어떤 상자에 숨었는데, 눈 떠보니 거기였어.”

    “허.”

    참으로 어이없는 이유였다.

    숨은 상자에서 잠들었더니, 적하장이었다라.

    “길거리에 놓여진 상자에 들어가 숨을 생각을 했다니, 정말 놀랍군…….”

    모르는 상자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몸을 숨긴 아이들이 잘못한 것은 분명 사실이긴 하지만, 고작 그런 멍청한 이유만으로 이런 커다란 사건에 휘말리게 된 거라니. 

    세상은 참 기묘하고도 가혹한 일로 넘쳐나는 것이다.

    “서드오빠, 오빠는 우리 여기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평소 아이들이 숨는 장소라고 해봐야 근처 놀이터나 공원, 또는 장난감거리의 다른 가게 정도였기에 딱히 신기할 것은 없었지만, 이곳은 딱 봐도 자신들이 평소 다니던 길과는 굉장히 동떨어져있는 장소다.

    어떤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고서야 아무런 연락도 없이 바로 자신들을 찾을 수 없다는 건, 아직 상식이 부족한 어린 디아나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되는 것이다.

    어쩌면, 서드에게는 자신은 생각지도 못할 뭔가 마법적인 방법이 있는게 아닐까?

    아니면, 자신들이 남긴 흔적을 마치 탐정처럼 추적해서 알아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만화나 환상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랑의 힘’같은 거라든가!

    디아나는 그런 낭만있는 대답들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서드의 대답을 듣자 소녀의 가슴은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말았다.

    “메를린이 말해줬다.”

    “에….할머니가?”

    “그래.”

    맙소사, 메를린 할머니라니!

    그러고보니, 그 할머니는 항상 특이할 정도로 자신들을 엄청 잘 찾곤 했지.

    심지어, 파이가 정령화를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그것이 특별한 ‘눈’ 때문이라고 했는데, 분명 신기한 능력이긴 하지만 그것에 질릴정도로 익숙해진 아이들에겐 이미 짜증나는 반칙같은 것이었다.

    그 ‘은신술’인지 뭔지 하는 걸 배우고 난 뒤엔 그녀가 자신들을 찾아내는 빈도가 줄어들긴 했지만, 마치 다 알고서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 그것도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번에 숨을 땐 진짜로 모르는 것 같긴 했는데….

    아무튼, 서드가 자신들을 찾아낸 방법에 특별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디아나는 살짝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서드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뭐에 실망하는거지? 한두번 있었던 일도 아닌데.”

    한두번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서드의 한마디에, 디아나는 순간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러면, 오빠가 그동안 우릴 그렇게 잘 찾아낸 것도…?”

    충격받은듯한 디아나의 반응에, 서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것도 전부 메를린이 말해준거다.”

    디아나는 순간 서드가 자신들을 찾아왔던 그 수많은 장면들이 전부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 모든 장면들의 배후에도, 메를린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진실을 알아버린 디아나와 파이는 더욱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럴수가……! 숨바꼭질에서 할머니의 도움을 받는 게 어딨어!”

    -맞아! 그건 반칙이야!

    그동안 서드가 메를린처럼 자신들을 정말 잘 찾는다고 신기해하면서 봤는데, 알고보니 그냥 메를린의 심부름꾼이었다니!

    그것은 아이들에겐 마치 환상이 깨어진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서드는 코웃음치며 호통칠 뿐이었다.

    “멍청한 소리! 너희들 규칙따위 내 알 바 아니야. 너희가 만약 거기서 다치기라도 했으면 네 언니가 뭐라고 했을 것 같냐?”

    “그, 그건…, 그렇지만….”

    “반칙이든 뭐든, 그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된 거지.”

    그나마 화를 내지 않은 건, 그런 일을 겪고 내심 힘들었을 아이들을 향한 서드 나름의 배려였다.

    그런 배려는 느낀 건지, 디아나도 더이상 대꾸를 하지는 못했다.

    묘하게 뒤통수가 따갑지 않은 걸 보면, 파이도 별 말은 없는 것 같고.

    그 때였다.

    “아, 맞다. 오빠!”

    “응? 뭐냐.”

    디아나의 갑작스런 부름에 서드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꽤나 다급한 걸 보면,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은 건가?

    하지만 디아나의 불안은 거기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언니도 우리가 이런 거 알아…?”

    자신들이 그렇게 위험했다는 걸 언니가 알면 크게 혼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왜 얌전히 인형점에 있지 않고 그런 말썽을 피웠느냐, 대체 왜 생각도 없이 길거리에 놓여있는 상자에 들어갔느냐, 왜 안전하지도 않은 곳에서 잠을 잤느냐, 왜 평소 휴대전화는 충전해두지 않았느냐…. 

    언니에게 듣게 될 잔소리는 그렇게 뻔하고 뻔했다.

    그리고, 원래 잔소리는 뻔할수록 듣기 힘들고 싫은 법이다.

    만약 이 일은 언니가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의 준비를 해 놓는 편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서드의 대답은 디아나에겐 꽤나 희망적이었다.

    “아니, 이 일을 딱히 스승님께 말씀드리진 않았으니 아직은 모르실거다.”

    “지, 진짜?!”

    “그래. 워낙 경황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워낙 급하게 준비하고 뛰쳐나온지라, 서드에게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경황따윈 없었다.

    게다가 연구가 워낙 바쁘신지, 연락도 되질 않는 중이기도 했고.

    “그, 그럼 우리 이 얘기 언니한텐 비밀로 할까? 어때, 오빠?”

    “글쎄, 그건 어떨까….”

    디아나의 제안은 서드에게도 꽤나 혹하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위험했다는 건 아이들을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는 서드 자신에게도 썩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도 어떻게든 멀쩡히 잘 해결된 일을 굳이 말한다는 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 현재 스승이 아공간에서 벌이는 ‘실험’이라는 게, 꽤나 위험하고 까다로운 것인 모양이라 이런 일로 방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입을 닫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만한 일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되신다면?

    그때는 더욱 크게 실망하게 되실지도 모른다.

    “그, 그러면 물어보기 전까지만 얘기하지 말기! 어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건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군.”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돌아온 인형점의 문고리를 잡아당긴 순간….

    불도 제대로 켜지지 않은 어두운 인형점 안에, 낯익은 여성의 뒷모습이 있었다.

    “다들 어딜 그리 급히 다녀온게냐, 이 늦은 시간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 갑작스런 등장에 서드 일동은 그야말로 경악했다.

    “꺅! 어, 언니…?!”

    “스, 스승님? 대체 왜 여기…?!”

    현재의 그들에게 루크의 목소리는, 밴시의 노랫소리보다도 더욱 스산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맙소사, 대체 언제부터 인형점에 있었던 거지?

    헛것을 보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테이블에서서 작은 액자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은 분명 루크 이루시, 그녀였다.

    “대답하지 못하는가.”

    숨 막힐듯한 짧은 침묵 속.

    -달칵.

    루크는 보고있던 작은 액자를 내려놓으며, 늦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을 향해 물었다.

    “지금 메를린은 어디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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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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