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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5

    그동안 아이들을 돌봐줘서 고맙다는 예르나 인사와 함께 모두를 배웅하고 난 이후.

    인형점에 혼자 남은 메를린은, 서랍장 속에서 붉은 액체가 담긴 팩을 꺼내 붕대를 풀고 링거를 꽂았다.

    급히 마무리했던 팔에 부족했던 붉은 액체를 주입하는 것이다.

    발색을 실제 피부처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서서히 채워나가야 했으니까.

    다만 그것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야한는 지루한 작업이었기에, 그녀의 눈은 자연스레 다른 곳을 향하게 되었다.

    “…….”

    그러다 한 액자가 눈에 띄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끝부분이 불에 탄 단체사진이 들어간 작은 액자.

    그녀는 그 작은 액자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그것은 오래 전.

    자신이 인형사보다는 암살자에 더 가까웠던 시절, 인형점에서 첫 임무에 나서게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원 모두가 다 함께 모여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좋은 추억이 될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루핀이 억지로 아이들을 모아세웠던 순간.

    어차피 떳떳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주제에 하루를 뭐하러 굳이 기념하며 사진으로 남기냐며 불평을 늘어놓던 로코도, 그래도 기록을 남겨두면 다 추억이 된다며 로코를 설득하던 카이도, 사진을 찍은 뒤에 다들 마지막이니 즐겁게 하자던 기르도, 모두 하나의 영상이 되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쉽게도 결국, 그 아이들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지만.

    이미 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목숨을 잃을 거라는 사실 쯤은.

    ‘마지막 임무’는, 처음부터 그런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본 운명이 틀렸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되도록 그 결말을 피하려 노력해봤지만, 결국 찾아온 상실감은 그녀 역시 버티기 힘들었다.

    그 후로 그녀는 운명을 바꾸려는 시도를 그만뒀다.

    결말에서 벗어나려 노력해봤자, 결국 더 큰 실망감이 되어 돌아올 뿐이었으니까.

    아무리 시도해봐야 결과에 닿는 과정만이 달라질 뿐, 결과는 바꿀 수 없었다.

    마치 이미 이야기가 짜여진 인형극.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체념이 몸에 익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는 그저 맹목적으로 결과만을 좇기 시작했다.

    “이런, 나 답지않게 감상에 젖었군.”

    메를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그간 단 한번도 진정한 ‘가족’이란 뭔지 생각해본 적이 없거늘, 오늘은 무언가 느낌이 다르다.

    그것은, 정말 옳은 일이었을까.

    결국 포기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길을 택한 것이?

    ‘그래도, 시도는 했어야지.’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서드가 다시 돌아왔다.

    -찰칵.

    “이제 다들 갔군요, 메를린.”

    “아아, 그래. 조용해졌구나.”

    메를린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는 서드.

    그는 그녀가 바라보던 액자를 향해 잠깐 시선을 보내더니, 이내 눈을 돌렸다.

    “그들이 떠오르시는 겁니까.”

    “잊은 적이 없지.”

    “그렇군요.”

    “…….”

    메를린은 서드를 만났을 당시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였다.

    ‘그’를 제외하면 두번째로 보게 된 운명이 보이지 않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닿을 결말이 어떨까에 대한 호기심.

    이미 수많은 이야기의 결말을 보아온 그녀로서는, 그 소년 역시 오래지않아 그 명이 다하리라 손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와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쳤다.

    전투라기보다는 거의 자폭에 가까운, 효율적이지만 몸을 사리지 않는 특유의 방식으로.

    하지만, 그 소년은 어째서인지 뭔가가 달랐다.

    운명이 보이지 않는 자들에겐 무언가가 있다는 걸까?

    소년은 어떤 상황과 임무에서도 반드시 살아돌아왔고, 결과적으로 임무를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목숨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더 소년에게 애정이 갔다.

    그녀의 시선에서, 소년은 유일하게 살아 숨쉬는 존재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애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서드,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예? 무엇을 하고 싶냐니요?”

    “꿈이라는 게 있냐는 뜻이란다.”

    “꿈……. 말입니까?”

    서드는 메를린의 말에 문득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보니, 딱히 꿈이랄 것을 가진 적은 없었다.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고.

    과거 루크도 몇번 꿈에 대해 묻기는 했지만, 그 때도 그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기기 일쑤였다.

    그에 루크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꿈이 있느냐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평범한 삶을 느껴보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루크는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메를린이 묻는 질문에는 뭔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드는 링거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인형점에서, 진정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조용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글쎄요,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은 있습니다.”

    “호오, 그게 뭐지?”

    “좀 뜬금 없는 것 같지만…….”

    서드는 잠시 우물쭈물거리다, 털어놓듯 이야기했다.

    “카페를 차려보고 싶습니다. 꽤 재미있어 보이더군요.”

    서드는 꽤 예전부터 무언가를 레시피대로 만드는 것에 익숙했고, 음료를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있었다.

    한 때 살기 위해 불법적인 약물을 조제하기도 했고, 불순물이 섞여 엉망인 상태의 약의 순도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높이려고 레시피를 나름대로 개량해보기도 하면서, 좋으나 싫으나 그런 행위들에 흥미가 붙어있었으니까.

    그러다 우연찮게 루크가 카페를 하는 것을 보고, 조금이지만 재미있어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약물을 내리는 것과 음료를 내리는 것은 분명 차이가 존재할 테지만, 그래도 서드는 한번쯤 카페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하하, 카페라……. 그렇군.”

    서드의 말을 들은 메를린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설마 그런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재미있었다.

    “……역시 이상합니까?”

    “하하, 아니? 의외이긴 하지만, 놀리려던 마음은 전혀 없었단다.”

    “그런가요…….”

    메를린은 잠시 서드가 카페에서 음료를 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그다지 긍정적인 인상을 주지 못하는 외모가 조금 손님들의 눈에 밟히긴 하겠지만, 그 또한 나름대로 즐거울 것 같았다.

    “그러면 나중에 이 인형점을 카페로 바꿔보는 것도, 생각해봐야겠구나.”

    “……아뇨, 그럴 것까진…….”

    —-

    며칠 뒤, 특별할 것 없는 도심지의 한 카페.

    딱히 분위기가 좋다고도 할 수 없고, 음료의 맛이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하리만치 그지없는 카페였지만, 평소에 자주 오가던 거리의 익숙한 카페에 앉아 창 밖으로 한가로운 거리를 눈에 담으며 마시는 새콤하고 시원한 과일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기분전환이 되는 것이었다.

    ‘흐음, 가끔은 시원한 과일차도 좋네.’

    그녀가 입가에 퍼지는 상큼한 과일의 향과 맛을 음미하며 거리를 다니는 행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사이, 한적한 카페의 차임벨소리가 울렸다.

    -짤랑-.

    들어온 인물은 후줄근한 야구점퍼를 입은 다크엘프 여성이었다.

    “어서오세요.”

    그녀는 카페 주인의 인사에 가볍게 목례한 뒤, 카운터보다 먼저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에게 곧장 다가가기 시작했다.

    “예르나, 안녕. 여기서 보자고 하는 건 오랜만이네.”

    예르나라 불리운 여성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이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 시에나. 오랜만이야. 자, 얼른 앉아. 네건 미리 시켜놨어.”

    시에나는 그녀가 시킨 음료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평소에 자신이 숲에 놀러가서도 자주 얻어마시던 종류의 차.

    아무래도 시킨지 시간이 좀 되어 식었는지 김은 피어오르지 않고 있었지만, 너무 뜨겁지 않고 미지근한 정도가 자신에겐 더 좋았다. 

    두꺼운 빨대로 속편하게 쭈욱 빨아들일 수 있으니까.

    그것을 아는지 예르나는 자신의 자리에 빨대까지 준비해 두었다.

    정말 배려심이 깊은 여자라니까.

    그녀는 곧 자리에 앉아 컵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후후. 바쁠텐데 바로 나와준건데, 내가 더 고맙지.”

    “…….”

    ‘바쁠텐데’라…하긴.

    TV가 온통 테러와 범죄와 관련된 이야기들로 떠들썩한 지금, 평소라면 경찰이 바쁠 시기이긴 하다.

    지금의 자신은 아니었지만.

    굳이 오랜만에 사복차림으로 만난 친구와 자신의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던 시에나는 예르나의 말에 조금 멋쩍게 웃어넘겼다.

    “하하, 그런가…….”

    시에나는 주제를 돌릴 겸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예르나가 마시고 있는 음료가 평소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그나저나, 웬일로 과일차야? 넌 항상 녹차류만 마시지 않았어?”

    과일차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입맛이 바뀐걸까?

    그러자 예르나는 마치 말하는 것을 깜빡했다는 듯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나 임신해서. 찾아보니 녹차같은 건 태아에 좋지 않다더라.”

    “풉, 뭐??”

    예르나가 임신을?

    굉장히 뜻밖인 사연에 시에나는 자칫하면 입에 머금은 음료를 뿜어낼 뻔 했다.

    “임신? 그 남자랑?”

    시에나의 물음에 예르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시에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아니, 뭐, 생각해보면 이상한 이야기까진 아니다.

    직장에서 만난 인간 숲지기와 숲의 저택으로 이사해 동거하고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조금 갑작스럽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이야기는 좀 미리 전화로, 하다못해 문자로 알려줄 수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자 예르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하하….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 요새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깜빡해버렸지뭐야.”

    입덧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바로 루크숲의 웨이브가 터졌고, 현장대신 행정과 전술업무를 맡는 바람에 머리로 생각해야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보니 일상적인 인간관계는 일단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었고, 슬슬 여유가 생겨갈 시점에 갑자기 만남을 청하다보니 그동안 이야기할 타이밍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예르나의 설명을 들은 시에나는 조금 당황을 거두며 물었다.

    “그, 언제부터?”

    “글쎄, 이제 4주쯤 되었다는 것 같은데… 사실 나도 알게 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그, 그렇구나……. 흐응, 그거 축하할 일이네. 축하해.”

    “응, 고마워.”

    축하한다는 말에 웃으며 감사를 표하는 예르나에게 시에나는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1년 전만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솔로였던 그녀가, 어느새 뱃속에 새로운 생명을 품게 되었다니….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이미 아이가 집에 셋이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아직도 집에 돌아가면 반겨주는 이 없이 혼자인데 말이다.

    그 묘한 괴리감이, 시에나로 하여금 예르나를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예르나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여자였던가?

    그녀는 대체 언제 이렇게 여성스러워진 걸까?

    정말 그녀가 자신이 알던 예르나가 맞긴 한걸까?

    사랑을 하면 사람이 바뀐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 사랑에 그런 힘이 있었다니?

    그건 그냥 전설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게 시에나가 계속 충격받은 표정을 하고있자, 예르나는 이제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본론을 꺼냈다.

    “크흠, 시에나. 사실 오늘 내가 널 부른 건 있잖아. 잠깐 루크를 맡길 사람을 찾을 수 없을까 해서야.”

    그러자 그제서야 시에나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루크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제부턴 슬슬 썼던 전개와 이어지기 시작할겁니다.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늦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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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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