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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7

    영원한 신성의 국가, 아린세이아.

    한때 영광으로 찬란했던 국가는 더이상 그 누구도 없음에도 여전히 그 찬란했던 시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잃지 않은 채 고요히 펼쳐져 있다.

    시가르마타는 그 풍경을 성의 연설대 너머로 바라보며 추억에 잠긴 듯 웃었다.

    “아린세이아, 참으로 멋진 나라였지.”

    늘 풍요로운 국민들, 자애가 넘치며 공명정대한 여왕, 그리고 대륙 어느 곳보다도 안전한 치안.

    이상향을 그려놓은 듯한 아린세이아는 그야말로 모든 대륙인들이 살고싶어 꿈에 그리던 신성국가였다.

    “여왕이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키기 전까진.”

    “…뭐?”

    예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한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멸망시키다니? 레니에가? 대체 무엇때문에?

    아린세이아의 멸망에는 외부적인 요소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거짓말, 대체 그녀가 왜…?”

    소녀의 반응을 본 시가르마타는 설마 전혀 몰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짐짓 놀란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진실에, 루크는 고개를 거세게 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시가르마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던 건가? 하하, 아니.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구나. 이런 간단한 모순조차 깨닫지 못했을 줄이야. 그렇다면 설마, 그대는 자신의 본질조차 이해하지 못한 건가.”

    그녀는 혀를 차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불쌍하긴.”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연민’.

    “너무나 안타깝고도, 바보같은 자로다. 사랑에 눈이 멀어, 간단한 모순조차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녀는 진실 앞에 무력한 소녀, 또는 다른 무언가를 향해 불쌍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허나 이해한다. 나 또한, 감정에 의해 여기까지 오게 된 존재이니 말이지. 감정은 때때로 이성을 마비시키게 마련이 아닌가.”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소녀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루크가 겪는 그 혼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는 이어 말했다.

    “도와주지, 마법사. 원한다면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겠다.”

    “…난 너를 믿을 수 없어.”

    이는 분명 이간질이 분명했다.

    자신과 레니에를 떼어놓기 위한 교란.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녀의 말에는, 가슴 한켠에서 무겁게 내리앉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진실의 무게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 그렇게 말한다.

    그녀는 소녀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로 검은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듯 하다.

    “나를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전혀 상관이 없느니라, 마법사여.”

    소녀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려 했지만, 그녀는 물러섬이 없었다.

    “보아하니, 그대는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지 않았구나.”

    궁지에 몰린 소녀는 결국 그녀의 손길에 턱을 내어주고 말았다.

    그녀는 조용히 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거래를 마친다면, 모든 것은 스스로 깨닫게 될 테지.”

    “거래…라니, 무슨…?”

    앞으로 벌어질 두려워하는 소녀에게, 그녀는 웃음지으며 말했다.

    “죽음과의 거래가, 죽음 외에 별달리 있겠는가.”

    이어 죽음이 속삭였다.

    “온 대륙에 퍼져있는 모든 신성의 그릇. 나는 모든 ‘딸’들을 죽음으로 해방시키길 원하느니라.”

    “……루크, 어때? 괜찮아?”

    누군가 자신의 머릿결을 넘기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벤치에 앉아있었다.

    ‘나는…….’

    루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상황을 인지했다.

    자신은 자전거를 배우던 와중 예르나와 아이들이 피크닉을 와서 따듯한 차가 담긴 컵을 쥐고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괜찮은거니? 말하는 도중에 멍하니…….”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을 좀 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었죠?”

    “자전거는 어떻게, 배울만 한지 묻고 있었어.”

    예르나의 걱정 섞인 질문에 루크는 “네, 배울 만 해요.”하고 둘러대곤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들어 이런 상황이 잦다.

    이 플래시백 현상, 이제는 깨어있을 때도 나타나는 건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원인은 아마도 아린세이아에 잠들어있는 ‘자신’이 꾸고 있는 악몽.

    바로 며칠 전, 시가르마타가 적하장에서 강림한 순간 내려온 ‘신탁’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죽거나 잊힌’ 것에 국한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탁을 내릴 수 있는 범위 또한 ‘죽거나 잊힌’ 곳에 한정된다.

    따라서, 그 ‘신탁’을 몸으로 받은 것은 이곳에 분리되어있던 내가 아니라, 아린세이아에 잠들어있던 그녀였다.

    그녀가 느낀 공포, 피로감, 권태감, 그리고 배신감.

    그러한 감정이 간헐적으로 역류해서, 이곳에 있는 자신에게 영향이 오게 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격으론 버티기 어려운 충격이었을 테지, 이성보다 감정이 더 많이 남아있기에 더욱 그러할테고.’

    나뉜 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타인화시키는 것이 조금 미묘하긴 하나, 현재로썬 실제로 현실의 자신과 아린세이아의 자신이 꽤나 차이가 있는 형편이다.

    자신은 그녀가 느꼈을 감정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여기에 있는 자신과 아린세이아의 자신은 아직 연결되어있기에 같은 정보를 공유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현재는 몸에 흐르는 신성의 성질조차 시가르마타의 제안을 받아들인 대가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공감할 수 없는 고통, 하지만 분명히 전해진다.

    그 전까지는 잠을 잘 때만 발생하고 있어서 무시했지만, 계속 이런 상태면 곤란할텐데.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두가지 있다.

    아린세이아와의 연결을 끊거나, 그녀가 스스로 악몽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러나 전자를 선택할 경우, 자신이 지닌 가장 강력한 패를 스스로 지워버리는 꼴이다.

    저쪽이 시가르마타라는 ‘열쇠’를 손에 넣은 이상 아린세이아가 더이상 전처럼 완벽하게 안전한 공간이 되지는 못한다지만, 그래도 결국 대체제가 없다.

    게다가 이런 상태에서 연결을 끊고 나면 홀로 악몽에 빠져있을 자신이 어떻게 될 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고.

    그래서 후자를 선택하자니, 그리 할 방도가 없다.

    그쪽이 감정이 더 많이 남은 만큼, 이쪽은 전보다 더 이성적이고 냉정해진 상태.

    그렇기에 자신은 애초에 악몽에 빠진 그녀의 불안과 우울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을 울리는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리 없다.

    악몽을 극복할 수 있도록 무언가 격려를 해 주려 해도, 기껏해야 떠오른다는 것이 ‘정신 제대로 차리자, 아직 남은 일이 많다, 여기서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정도의 다그치는 것 같은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이성적인 자신이라면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동기부여가 되겠지만, 뭔가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겐 영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어떻게 틀에박힌 말로 공감과 위로를 건네보려해도, 나 자신이 바보가 된 것은 아니었기에 그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대충 상황을 해결하려고 지어낸 말인지 파악이 빠르다.

    ‘차라리 조금 멍청했으면, 괜찮다고 몇마디 하는 걸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거늘…….’

    루크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다행히 자전거를 탈 땐 뭔가 안정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조금 쉬자마자 바로 이렇게 되다니.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때, 예르나가 루크의 굽은 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많이 힘들지? 조금, 벅찬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벅차다’라……, 그게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싶다.

    루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조금 그러네요.”

    그러자 예르나는 곧바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

    루크는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예르나를 돌아보았다.

    자신도 그랬다고?

    무슨 뜻이지?

    설마, 인격이 둘로 나뉘어서 한쪽만 우울한 상태인 자신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해본 경험이 있다는 건 아닐테고.

    자세히 듣길 원한다는 듯 예르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인생에 힘든 시기는 누구나 다 찾아오는 법이야. 뭐, 그게 이상한 건 아니지. 집이 날아가고, 가족이 떠나고…. 언젠가 다 겪어야 하는 일 아니겠니?”

    마치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는 듯한 예르나의 말에 루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르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자신의 탓이 아니긴 하지만, 집이 날아간 건 자신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침입자를 저택에서 상대하면 승리할 수 있을 줄 알고서 무턱대고 끌어들인 것이 원인이었다.

    결과적으론, 대실패였고.

    그러니 할 말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인생에 힘든 시기 중 하나를, 자신에 의해 겪게 되었다는 소리 아닌가!

    다행히 ‘언젠가 겪어야 할 일’정도로 생각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뭔가 입이 마르는 것 같은 느낌에 루크는 손에 든 따듯한 차 한모금을 마시며 대답했다.

    “……그렇겠죠.”

    “맞아.”

    예르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루크를 쓰다듬었다.

    귀가 간질거렸지만, 거부하기엔 염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지금 네가 힘든 그 감정. 그걸 극복하는 것도…. 응, 어쩌면 자전거 타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

    루크는 예르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탈 때는 위태롭고 힘들지만, 결국 혼자서 탈 수 있게 되었잖아? 옆에서 도와주니, 더 빨리 탈 수 있게 되었고.”

    예르나는 그렇게 말하며 공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받아라! 메루링 어택!!”

    “가만히 맞아주고 있진 않을거야!”

    “야! 이건 필살기인데, 맞아줘야지!”

    티격거리면서 뛰어다니는 디아나와 파이리스의 모습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즐거워보였다.

    “이봐, 너희 원래 그렇게 잘 뛰어다니는 애들이었어?”

    그런 아이들을 열심히 따라다니는 다이튼의 모습도, 바보같지만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예르나는 한마디를 꺼냈다.

    “이런게, 가족이란 거겠지.”

    “…….”

    가족이라…….

    루크는 문득 예르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예르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뭔데?”

    “가족같았던 사람에게서 만약,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나요?”

    그것은 레니에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의 이야기였다.

    아린세이아의 자신이 악몽에 빠진 원인이나 다름없는 진실.

    물론 그녀에게 모든 사정을 말할 순 없으니 조금 돌려말하는 식이 되긴 했는데, 그녀라면 어쨌든 해답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이라…, 그렇네.”

    다행히 예르나는 루크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곧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역시, 난 믿어보려고 노력해볼 것 같아.”

    “노력이요?”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직접 입으로 들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일단은 믿어줘야하지 않을까? 가족이니까.”

    “……그렇군요.”

    예르나의 대답을 들은 루크는 어딘가 마음이 편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레니에가 진실을 숨겼다고 해서, 그것이 ‘악’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린세이아를 포기해야만 했던 부득이한 이유가 분명 있었겠지.

    적어도, 지금으로써는 그렇게 믿어보는 수밖에.

    ‘그래. 책망은, 진실을 알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이 연결되어있는 아린세이아의 자신도 꽤나 안정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르나가 물었다.

    “어때, 좀 괜찮아졌어?”

    루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좀 그런 것 같아요.”

    그 때였다.

    “앗, 차가워!”

    한참 뛰어다니던 파이리스가 돌연 외쳤다.

    그를 쫓던 디아나도 문득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고는 눈을 빛냈다.

    “와, 눈이다!”

    비록 쌓이기엔 굉장히 작은 알갱이였지만, 그것은 분명 눈이었다.

    루크는 고개를 들어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차가 담긴 컵을 들었다.

    “눈도 오기 시작하니, 들어갈까요?”

    “그래, 아무래도. 자전거는 좀 나중에 연습해야 할 것 같네. 오늘은 돌아가서 따뜻한 거나 좀 마시자.”

    예르나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루크가 테러리스트였던 어머니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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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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