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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9

    시에나는 예전에 구매만 해두고 사용하지는 않은 채 처박혀있던 고급 찻잔세트를 찬장에서 꺼내 차를 따라내고 있었다.

    설마 누군가를 손님으로 받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준비할 수 있었던 거라곤 소비기한이 끝나는 날이 가까운 이 기성품 티백정도지만, 그래도 그나마 찻잔은 있어서 대접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다.

    실은, 시에나도 루크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을 품고는 있었다.

    자신이 정직당한 이유가 그 ‘테러리스트’ 때문이었음을 생각하면, 종료된 사건파일을 확인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타워를 테러한 인물이 현장에 남긴 머리카락이나 살점 등의 흔적을 분석해본 결과 공교롭게도, 루크와 혈육에 가까울 정도로 유전적 패턴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찰은 이미 해당 침입 사건의 전말을, ‘숨겨진 혈육을 지키기 위해 발생한 내분’정도로 여기는 듯 했다.

    테러단체 내부에서 소위 말하는 ‘꼬리자르기’가 실행되었고, 그것을 편하게 실행하려는 과정에서 딸을 인질로 잡고자 했으며, ‘테러리스트’는 그에 맞서 장렬히 희생했다….

    개연성뿐만 아니라 드라마까지 있는 흥미로운 전개이긴 하지만, 역시 뭔가 이상하다.

    ‘내게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했던 게 그녀였어. 그런데 정작 본인은 같은 편에게 배신을 당한다고? 뭔가 이상한데.’

    시에나는 그녀가 현장을 떠나기 전,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뜻은 자신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믿지 말라는 거였겠지만, 굳이 나를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타인을 믿지 말라고 한 것은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잘하면, 루크에게 정확한 내막을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이를테면…,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라던가?

    시에나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루크를 맡아주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시에나는 테이블에 공손히 앉아있는 루크에게 차 한잔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미안, 집에 이런 것밖에 없어서. 미리 간식거리라도 사둘 걸 그랬나?”

    “괜찮네. 신세를 지는 쪽은 이쪽이니, 너무 부담갖지 말게.”

    그녀는 자신을 잠깐 맡아주는 역할일 뿐이고, 그동안 신세를 지며 실례를 끼치게 될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게 간단히 안부인사를 나눈 루크는 찻잔의 손잡이를 집어올리기 편한 각도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번 사건으로 정직을 당했다니, 유감이로군.”

    “아하하…, 그러네. 뭐 책임을 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린 네가 보기엔 누명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루체스트는 이미 경찰 뿐 아니라 정부와도 깊은 관계를 지닌 거대기업이다.

    이번 사건으로 정직처분을 당한 것을 보면 그녀가 ‘루체스트’의 입김이 닿지 않은 경찰임이 어느정도 밝혀진 것이다.

    이미 사회를 장악한 ‘루체스트’를 진정 끝내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반드시 ‘용사’와 같은 의로운 자의 힘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역시 민중의 편에서 정의를 집행하는 ‘경찰’이 맡는 게 제격이 아닌가.

    그러자 루크가 돌연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자신이 정직처분을 받은 것에 있으리라 지레 짐작한 시에나가 그런 루크를 달래오기 시작했다.

    “뭐 그리 심한 거 아니니 너무 걱정 마. 네가 신경 쓸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평소처럼 있어도 돼.”

    “응, 그리 하지.”

    루크는 시에나가 건네준 찻잔을 집어들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바로 어제, 예르나의 도움으로 아린세이아가 안정된 직후 루크는 케이트를 통해 타워에서의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들었다.

    그리고 시에나는 그 때 케이트가 현장에서 마주쳤던 경찰 중 하나.

    그렇다보니 어쩌면, 그녀에게서 뭔가 새로운 정보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왜냐하면, 루크는 이미 시에나를 예전부터 감이 꽤 좋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미 예전에 그녀와 함께 잡담처럼 오갔던 몇마디에도 핵심을 짚는 듯한 날카로운 면모를 몇번 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경찰이기도하니,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꽤나 정보가 많은 인물이다.

    분명, 그녀만이 알아차린 무언가가 있겠지.

    그것이 아타나시스를 쫓는 데 유용한 단서가 될 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헌데 설마 이렇게까지 집 안이 황량할 줄이야…….

    “집에 있는 것들이 매우 단촐하구나. 마치 사람이 살고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시에나의 집은 실제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라기엔 굉장히 살풍경했다.

    잠깐 살펴본 것만으로는 시에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집을 보면 그 사람의 행동과 심리를 알 수 있다고 하던가?

    일상과 가장 깊은 연관을 가진 ‘집’에는 개인이 평소에 지닌 생각이나 생활방식, 그리고 편견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루크는 처음 시에나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소파와 그 앞에 자신들이 앉아있는 유리 테이블, 그리고 구석에 있는 화분을 제외하면 그 흔한 카펫이나 책장이나 그림등의 어떤 장식물도 보이지 않는 거실은, 사람이 산다기보단 마치 새로운 입주자를 받기 시작하는 신축 건물의 그것을 연상케하는 정도의 몰개성함을 자아내고있었다.

    루크는 찬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듯 물었다.

    “혹시 그대, 최근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건가?”

    날카로운 루크의 질문에 시에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나름대로 먼지 한톨 없이 깔끔하게 치웠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아무런 잡동사니조차 남기지 않은 게 화근이 된 꼴이라니!

    물론 루크가 그 사실을 안다고해서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나쁜 소문 같은 것이 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이를 40 이상 먹고있는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까지 부끄럽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일은 무슨! 그냥, 온다길래 청소를 좀 한 거지.”

    “흐음, 그런가.”

    대충 둘러대는 것이 보이는 시에나의 모습에 루크는 잠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긴 했지만, 객의 입장에서 굳이 더 파고들 필요가 없는 내용이라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결벽증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알겠네.”

    “아, 뭐 그렇지. 그런 셈이야.”

    그리고 시에나 역시, 루크가 내려준 결론을 빠르게 주워삼켰다.

    그야 집 청소나 정리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40대 어른보다는, 그냥 조금 결벽증인 사람이 훨씬 낫지 않은가.

    시에나는 급히 대화를 틀었다.

    “맞다. 너, 여기는 언제까지 있을 예정이야?”

    “빠르면 이틀, 늦으면 나흘정도일 것 같네. 일정에따라 비행기가 그때쯤 준비될 거라고 해서 말이지.”

    “그래?”

    2~4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기.

    그러니까 시에나는 그 기간 내에 루크의 마음을 좀 열고 진중한 대화의 자리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무턱대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물어봤자 제대로 된 취조가 될 리가 없으니까.

    바로 그 때였다.

    -꼬르륵…

    돌연 누군가의 배에서 울린 공복의 신호.

    그에 방금 막 담소를 나누며 깨어진 어색한 기류가 다시 정적과 함께 흐르기 시작한다.

    그중에 먼저 시선을 조용히 피하며 자신의 배를 쳐다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시에나였다.

    “…….”

    “…….”

    아무래도 아침부터 청소한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지라, 그녀의 배가 고파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체시계의 알람기능이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일을 할 줄은 몰랐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

    시에나는 그 분위기를 돌려보려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아하하, 그러고보니 아침을 안 먹었지 뭐야. 루크.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혹시 밥은 먹었니?”

    “나는 아침에 간단하게 먹긴 했다만…, 음. 아무래도 슬슬 배가 고플 때가 되기는 했구나.”

    “그래? 그러면 우리 뭐 배달 시켜먹을까? 혹시 뭐 좋아하니?”

    “배달?”

    그러나 시에나의 제안에 루크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설마 배달음식을 먹자니, 음식은 본디 즉석에서 바로 해먹어야 하는 법이거늘.

    “되었네, 배달음식은 건강에 좋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있는 동안엔 내가 요리를 하지.”

    뜻밖의 제안에 시에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리?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물론이지, 내가 예르나와 지낸 세월이 얼만데.”

    함께 살던 예르나의 영향으로 루크는 이미 모든 종류의 엘프식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있었다.

    시에나의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떤 재료든 있기만 하면 웬만한 요리는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런 루크의 박력있고 자신감넘치는 모습에 시에나는 새삼 루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그렇게 자신감넘치게 부엌으로 향하는 루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에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리를 하려면 뭔가가 있어야 하고, 루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이 아닌 이상 냉장고를 열어볼텐데.

    ‘지금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더라?’

    그렇게 빠르게 기억을 더듬던 시에나는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지금 냉장고에 요리재료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시에나는 빠르게 루크를 불러세웠다.

    “자, 잠깐만! 루크, 기다려봐!”

    “응? 갑자기 왜 그러는가?”

    “우리, 그냥 시켜먹을까? 너도 그 짐 가지고 여기까지 오면서도 힘들었을텐데-.”

    루크는 자신을 걱정해오는 듯한 시에나의 제안을 미소와 함께 사양하며 말했다.

    “하하, 내 걱정은 말게. 난 남는게 체력이야. 그러니 내가 만들어주겠네. 배달은 몸에 좋지도 않으니.”

    “아, 아니, 그래도. 남의 집에서 요리하는 것도 힘들잖아? 더군다나 손님인데….”

    루크는 재차 걱정과 미안함을 토로하며 만류하는 시에나에게 조금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

    “내 신분은 지금 손님이라기보단 식객이네. 그리고 요리하는 건 익숙하고 좋아하는 일이니 너무 걱정 말게나.”

    그리고 루크의 그 고집은 결국 열어선 안될 무언가를 열게 하고 말았다.

    ‘아, 안돼…!’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시에나의 마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절규.

    그렇게 냉장고가 열리기 시작하자, 루크는 경악하고 말았다.

     

    “아니, 이게 무슨…?”

    맥주, 맥주, 맥주, 그리고 또 맥주.

    냉장고를 온통 채운 것은 오로지 캔 맥주와, 더 큰 용량의 병맥주들이었다.

    물론 보리로 만들어 발효시키는 것이 맥주인만큼, 엘프인 시에나가 마시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건 냉장고를 냉장고가 아니라 맥주 보관고라고 바꿔 불러야 할 판이 아닌가?

    그것도 오로지 보리와 드워프의 캐릭터가 그려진 브랜드로 한가득.

    어쩌면, 이 또한 그녀가 지닌 ‘결벽’의 한 종류일까?

    “…그대, 혹시 조상중에 드워프가 섞여있는 겐가?”

    “…….”

    루크의 물음에 시에나는 할 말이 없었다.

    루크는 조용한 시에나의 모습을 뒤로하고 냉장고 안에서 그나마 맥주가 아닌 음식 포장지를 슬쩍 손가락으로 들춰보며 한숨을 쉬었다.

    놀랍게도 샐러드조각이 새로운 뿌리를 막 내리려고하는 참이었다.

    ‘어쩐지, 바로 배달 이야기부터 꺼내더라니…….’

    루크는 대체 그녀가 요리를 그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애초에 요리를 해본 적은 있을까.

    루크는 옛날 예르나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시에나의 상황에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시에나.”

    “으, 응?”

    “일단 장부터 보러 가지….”

    “응….”

    훌륭한 선생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법.

    지금의 시에나에겐 요리보단, 어떤 식재료를 골라야 하는지부터 알려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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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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