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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어, 그러니까……”

        

       “벌, 받겠다구요.”

        

       그나저나 불순 이성 교제도 아니고 불순 교제라니. 하긴, 남자 건 여자 건 성별 상관없이 사귀더라도 아무 문제 없는 이 세계에서는 굳이 ‘이성 교제’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긴 했다. 그렇다고 불순 이성 동성 교제 같은 말은 좀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우니까.

        

       물론 그런 세계라고 하더라도 두 사람 이상을 한 번에 사귀는 일은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이 세계나, 내가 살던 세계나, 결혼은 일부일처…… 아니, 여자끼리는 일처일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니까.

        

       이렇게 양쪽에 여자를 끼고 다니면 충분히 풍기 문란해 보일 수 있지. 교실에서 그 난리를 치기도 했고.

        

       그렇다고 학생회가 직접 나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학교 내의 가장 중요한 곳에 있는 학생들이 아닌가. 나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선도 위원의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봤더니, ‘손아름’이라는 이름이 노란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노란색, 흰색, 구리색—아무래도 금, 은, 동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 같은—으로 이루어진 이름표는, 매해 1학년이 입학할 때마다 번갈아 가며 색이 바뀐다.

        

       올해 들어온 아이들은 금색으로 이름을 새길 차례였고, 졸업할 때까지 쭉 이 색을 사용하다가, 우리가 졸업하는 해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금색을 물려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표를 보면 그 학생이 몇 학년인지 구분하기가 수월하다. 선생들은 가끔 헷갈리는 모양이지만.

        

       그러니까 얘는 이제 막 선도 위원이 되어 의욕이 넘쳐흐르는 1학년생이라는 것이다.

        

       내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자기 가슴을 손으로 가리는 것을 보면, 나에 대해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 모양이다.

        

       ……아니, 오해하라고 그렇게 행동하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대놓고 치한 취급받으면 좀 우울해진다.

        

       나를 포함해서 함께 다니는 네 사람 중 신체접촉이 있을 때 가장 주의하는 사람은 나라고.

        

       말하더라도 믿어주지는 않겠지만.

        

       ……음, 이렇게 생각하니까 상대를 조금 골려주고 싶어졌다.

        

       “동성애 성향이 있다고 해도 보는 사람을 모두 성적인 시선으로 보는 건 아니야.”

        

       어차피 같은 학년이라는 것도 알았으니, 이젠 굳이 말을 높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속 편하게 매우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를 던졌다.

        

       “엇,”

        

       동성애가 어느 정도 보편적이라도, 그걸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조금은 존재하는 세상이다. 당연히 내가 한 말은 가불기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저 말에 ‘내가 동성애자’라는 말을 담지는 않았다. 나중에 이 이야기가 다시 나오면 ‘나는 나를 동성애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놀릴 생각이었으니까.

        

       ……뭐, 사실 따지고 보면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행동하고 있고, 무엇보다 예사라 몸속에 있는 내가 남자에게 성적인 관심이 없었으니까. 만약에 나중에 ‘진짜로’ 애인이 생기더라도 절대 남자는 아닐 거고.

        

       손아름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내 표정을 보고 농담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손아름은 나에게 척, 삿대질하며 외쳤다.

        

       “너, 너가 변태라는 거지, 동성애자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거든!?”

        

       뭐,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변태가 아니……

        

       라고 생각하려다가, 어제 수업 시간에 하늘이의 무릎 위에서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니, 그건 일부러 그렇게 보이려고 한 행동이니까. 본인에게 허락도 받았고.

        

       물론 여기서는 혐의를 부인해선 안 된다. 내가 학생회로부터 징계 이상의 벌을 받아야 하니까.

        

       이 학교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을 전면으로 부인하는 사건으로 발전시키려면, 되도록 상대가 확대해석하도록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가—”

        

       “그래서, 그게 무슨 문제야?”

        

       그 말에 동의하고자 입을 여는데, 갑자기 내 옆에 매달려있던 유하늘이 불쑥 입을 열었다.

        

       “뭐?”

        

       손아름이 유하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되물었다. 유하늘이 그렇게 갑자기 끼어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문제냐고. 우리가 수업 시간에 껴안고 있었던 건 맞아. 사라가 수아랑 팔짱 끼고 수업을 들은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야? 교사도 모른척해 주는데.”

        

       ……어, 그거 완전.

        

       악역 영애가 할 법한 말인데.

        

       아니면 악역 영애 옆에 따라다니는 떨거지 1이 하는 말이거나.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는 도도한 악역 영애 옆에 붙어있는 떨거지 1이, 굳이 입을 열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악역영애 대신 떠들어주는 진부한 악당 대사.

        

       여주인공이 들으면 들었지, 그 입에서 나올 대사는 아니었다.

        

       내가 경악해서 유하늘을 바라보자, 유하늘은 얼굴을 내 귀에 바싹 붙이더니 작게 말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말 좀 맞춰줘.”

        

       “…….”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늘의 행동력은 치이면 이세계로 사출되는 덤프트럭 급이기는 하니까.

        

       “뭐, 뭐, 뭐, 뭐…….”

        

       당당하게 상대방의 논리를 깔아뭉개 버리고 내 얼굴 옆에 자기 얼굴을 바싹 붙인 채 뭔가 속삭이는 유하늘을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손아름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원래 미연시를 포함한 웬만한 학원물에서 선도 위원이니 풍기 위원이니 하는 애들 머릿속이 가장 음습하고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일종의 클리셰다. 그나마 전 연령 매체에서는 딱 그 정도에서 끝나는 정도고, 성인용 미연시나 동인지, 상업지까지 가면…….

        

       ……뭐, 얘는 ‘If you wish’에는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이긴 하다. 적어도 공략할 수 있는 세 명의 여주인공에겐 포함되지 않는 캐릭터다. 만약 내가 스트리머의 플레이 영상으로 보지 못한 구간에서 나왔더라도 스탠딩 CG도 없는 엑스트라로 나오고 말았을 것이다. 이 게임에 시크릿 히로인이나 숨겨진 루트는 없다고 제작자가 공언했으니까.

        

       “게다가, ‘불순하다’라고 할만한 행위는 학교에서는 하지 않았어.”

        

       “……응?”

        

       갑자기 이어지는 하늘이의 폭탄 발언에, 다시 한번 분위기가 쩌적 얼어붙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선도 위원은 물론이고, 은근히 걸음을 멈추거나, 친구들과 대화하는 척 멈춰서 우리가 싸우는 소리를 엿듣던 아이들도, 완전히 행동을 멈췄다. 교문 밖에서 차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이 주변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게 느껴졌다.

        

       “학, 학교에서는, 이라니?”

        

       “그냥 끌어안는 게 어떻게 불순 교제가 될 수 있겠어? 입을 맞춘 것도 아니고, 그, 그, 그런 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하늘이도 말하면서 조금씩 부끄러워지고 있는지, ‘그런 행위’를 말할 때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아니, 뭐, 그럼…….”

        

       “그래.”

        

       생각하지도 못한 하늘이의 폭탄 발언에 말을 마구 더듬는 선도 위원에게,

        

       “맞아. 어제, 나는 사라네 집에서 ‘자고’ 왔으니까.”

        

       그래, ‘자고’오긴 했지.

        

       그런데 그 ‘자고’에 힘을 줘서 말하니 뭔가 의미가 이상하게 뒤틀리는 기분인데.

        

       선도 위원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붉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이마 위에 달걀 깨서 올려놓으면 프라이도 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아 참, 그러고 보니, 네 속옷 아직도 그대로 입고 있어. 나중에 빨아서 돌려줄게.”

        

       그리고 그런 선도 위원을 그대로 두고, 하늘이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직 입고 있었냐고!

        

       아니, 입고 있긴 하겠지만!

        

       아, 잠깐. 그러면……

        

       어제 밖에서 속옷을 사 온 사람은 신소희 한 명뿐이었다. 하늘이는 물론이고, 이수아도 내 저택에서 자고 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으니까.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수아를 바라보자, 이수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내 팔을 더욱 꼭 잡으며 작게 말했다.

        

       “나, 나도, 나중에 빨아서 돌려줄게…….”

        

       그렇게 말하며 내 눈을 살짝 피하는 이수아의 얼굴은 가련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선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

        

       선도 위원의 머리 위에 보이지 않는 느낌표가 떠올랐다.

        

       입을 뻐끔거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마 상상력의 한계치까지 동원해서 나와 하늘이와 이수아가 어젯밤에 무엇을 했었는지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모양이었다.

        

       실제로는 그냥 치킨 먹고 잤을 뿐이지만.

        

       “아, 맞아. 소희도 그랬어. 아무래도 미안하니까 셔츠 빨아서 돌려주겠다고.”

        

       !!!!!

        

       선도 위원의 머리 위에, 더 많은 느낌표가 떠올랐다. 실제로 보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확실하게 그랬다.

        

       “여, 여자, 세 명을……?”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하렘 왕 같잖아.

        

       아니, 하렘 퀸인가?

        

       ……아니면 레즈퀸? 아무튼.

        

       하늘이가 시작한 그 정신 나간 발언은, 아무래도 하늘이가 의도한 것 보다도 더 제대로 먹힌 것 같다. 선도 위원 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던 모든 이의 어그로 수치를 300%까지 끌어올렸다. 분명 여기가 미연시가 아니라 게임판타지였다면 쟤는 분명 방패 전사였을 거야.

        

       아, 아니다. 하늘이 본인이 탱커를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어그로가 통째로 나한테 토스 된 것 같은 분위기니까.

        

       “…….”

        

       선도 위원은 주먹을 꽉 쥔 채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분노가 임계치를 넘어가서 이성을 붙들고 서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힘든 모양이다.

        

       “어…… 그러니까.”

        

       사실 하늘이의 말을 듣고 선도 위원과 함께 정신이 날아갈 뻔했던 나는, 얼른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이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말이지?”

        

       내 말에, 선도 위원 손아름은 나에게 척! 하고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얘 삿대질 진짜 좋아하네. 선도 위원 캐릭터는 다 이렇던가?

        

       하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하지! 절대로 그냥은 못 넘어가!”

        

       그래도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늘이의 발언이 엄청나게 효과적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내가 선도 위원이었어도 같은 학교 학생이 ‘나 어제 난교파티하고 옴’같은 소리를 하면 경악해서 선생한테 꼰질렀을 거 같긴 해.

        

       물론 하늘이는 섹스의 ㅅ자도 꺼낸 적이 없지만.

        

       ‘잤다’라고 했지.

        

       ……어쩌면 얘는 정치인의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하늘이를 바라보자, 하늘이는 나에게 슬쩍 웃어 보였다. 주변에 사람만 없었다면 손가락으로 브이 자도 만들어 보였을지 모른다.

        

       “내가 학생회 회의에 안건을 올려서, 너희들의 그, 그…….”

        

       “그?”

        

       “그, 문, 문란한! 행위를! 확실하게 알릴 테니까!”

        

       보고서에 뭐라고 쓰려고? 예사라가 다른 동성 학생 세 명과 섹스 파티를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쓴다면 나도 할 말이 생기고, 그걸로 서로 물고 뜯다 보면 학교에서도 결국 무시하지 못할 테니 나야 좋긴 했다.

        

       “좋아.”

        

       나는 혼자 팔짱을 끼려다가, 아직도 양팔이 두 사람에게 잡혀있다는 것을 깨닫고 얌전히 포기한 뒤 말했다.

        

       “한번 해 보라고. 이쪽도 생각이 있으니까.”

        

       그리고 한쪽 입술을 슬쩍 올려준다.

        

       선도 위원의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뭐, 나랑은 완전히 반대의 생각을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좋은 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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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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