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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쿵.

     

     

    아담 형과 엘프 장로는 문 뒤로 사라진다.

     

    나와 아르윈만이 적막한 방에 남는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었다.

     

    과거 네르 때도 이랬을 것이다.

     

    “…”

     

    “…”

     

    하나 다른점이 있다면 아르윈은 네르보다 당당해 보였다.

     

    허리를 곧게 세운채 그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은 야릇한 분위기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도 참 어색한 상황에 놓였다는걸 자각한다.

     

    기껏해야 한두마디 나눈 상대와 몸을 섞는게 맞을까.

     

    상대가 싫어하는게 역력한데도 말이다.

     

     

    물론 나와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아르윈의 미모에 홀려, 모르는 척 얼렁뚱땅 몸을 섞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아내를 소중히 대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소중히 대할까.

     

    바스러지기 직전이었던 아르윈의 세계수잎을 봐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걸지도 몰랐다.

     

     

    “…술 한잔 하시겠어요?”

     

    아르윈이 적막을 깨고 묻는다.

     

    나를 등진채 고개만 살짝 돌린 그녀.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 한켠에 놓여있던 술병을 들고, 아르윈은 잔에 술을 따랐다.

     

     

    이내 천천히 다가와, 내게 잔을 건넸다.

     

    “…잠시 앉으시죠.”

     

    그러며 제안한다.

     

    나는 잔을 받아들며 근처에 있던 의자에 착석했다.

     

    아르윈도 마찬가지로 잔을 들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내 나는 술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화한 풀의 향기가 나는게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술 이름이…?”

     

    내가 묻자 아르윈이 답한다.

     

    “…바르디 술이에요. 엘프들의 전통주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그녀가 제안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아르윈은 술잔을 꺾지 않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술잔을 반쯤 비웠을 때, 나는 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안드시나요?”

     

    “…술은 싫어해서.”

     

    “…”

     

    그럼에도 제 잔을 채운건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으리라.

     

     

    “그래서요?”

     

    나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곧장 본주제로 향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숨기는게 없어야만 한다.

     

    처음부터 가식 위에 관계를 쌓아올릴 수 없다.

     

     

    아르윈도 나의 물음에 그 날카로운 눈을 깔았다.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잔을 톡톡 치던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네르에게 들었어요. 부단장 당신이-”

     

    “-베르그에요.”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녀가 말을 고친다.

     

    “…베르그 당신이 인족중에서는 정말…착한 사람이라고.”

     

    나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네르가 그런 말을 해줬어요?”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다시 꺾었다.

     

    아직 입에 맞아들지는 않았지만, 매력이 있는 술이라 느낀다.

     

    시간이 흐르면 좋아하게 될 것도 같았다.

     

     

    “그래서요?”

     

    나는 이어서 대화를 촉구한다.

     

    아르윈도 망설이지 않았다.

     

    “몸은 내어줄 수 있어요.”

     

    “…”

     

    “필요하다면 아이까지도 낳아드릴게요. 하지만 그 이상을 내게 바라지는 마세요.”

     

    시원하게 뚫고 들어와 제 의견을 피력하는 부분에서 그녀의 성격이 느껴진다.

     

     

    내가 물었다.

     

    “그 이상을 바라지 말라는 말은…?”

     

     

    아르윈은 이내 그 차가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를 낳아도 나는 애정을 쏟지 않을거고, 당신과 부부의 정을 나누지도 않을거에요. 우리의 계약이 끝나는 순간…그러니까 당신이 죽는 순간, 나는 떠날거니까.”

     

    “…”

     

    나는 목을 긁적였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이런 말들이 올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마찬가지로 아쉬움도 느낀다.

     

     

    왜 항상 이렇게 시작이 되는지.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담 형도 나에게 한번은 맞아야할 것 같다.

     

    그 유치한 생각에 나는 또 웃음을 흘렸다.

     

     

    아르윈은 그 웃음에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곧장 표정을 고치며 손사래를 쳤다.

     

    “미안해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

     

    “….”

     

    “어쨌든. 왜죠?”

     

    내가 물어보았다.

     

    아르윈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종족이 다르잖아요.”

     

    “혼인을 했잖아요.”

     

    “사랑해서 한게 아니었잖아요?”

     

    “…그러니 더 노력을 해야죠.”

     

     

    아르윈은 고개를 젓는다.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저는 장수종이에요. 엘프들은 800년을 살아요. 특히나 저는…특이체질이라 1300년까지도 살게 될 거에요.”

     

    그 사실에 나는 순수히 놀랐다.

     

    “1300년이요?”

     

    “네. 하지만…단명종인 당신은 얼마나 살죠?”

     

    “…”

     

    “기껏해야 80세까지. 앞으로 60년 남은게 아닌가요? 그것도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갈때의 이야기고. 당신의 시간은 내게 있어 찰나 같은 시간이에요. 언젠가는 당신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될지도 몰라요.”

     

    아르윈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문득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가 이런 표정으로 살아왔을지 의아해졌다.

     

    항상 이렇게 웃음 없이 살았으면 힘들었으리라.

     

    부정적인 그녀의 자세가 엘프들의 특징일지, 아니면 웃음이 없었을 삶 때문일지 알수가 없었다.

     

    “60년 동안 사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죠? 당신의 기준으로 바꿔서…6년 혹은 7년만 사는 생명체를 사랑할 수 있나요?”

     

     

    6년. 혹은 7년.

     

    또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회상에 빠져든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흘렸다.

     

    “….아마도.”

     

    “네?”

     

    “…아닙니다. 확실히 어려울수도 있겠네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에요. 마음이 변하기도 어려운 시간이고. 그러니 처음부터 말씀 드리는거에요. 제 의무는 다하겠지만, 그 외에는 바라지 마세요.”

     

    “…”

     

    “그런 게 필요하면 네르에게 바라세요. 네르가 안된다면 새로운 아내를 들여도 괜찮아요. 저는 뭐라하지 않을게요. 대신 제게 사랑을 바라거나…헌신을 바라지는 마세요.”

     

     

    나는 또 술잔을 꺾었다.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었다.

     

     

    “…안돼요.”

     

    하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또 아니었다.

     

    아르윈의 차가운 표정이 깨진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

     

    “네?”

     

    “안된다고요, 그렇게는. 나는 당신과 부부가 된거고, 그렇게 된 이상은 부부처럼 살거에요.”

     

    “말했듯-”

     

    “-당신에게는 찰나겠지만.”

     

    나는 아르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이 잠시 굳어있었다.

     

    “…나에게는 평생이야.”

     

    “…”

     

    “평생 아내와 서먹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거기에 아무리 엘프더라도 6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겠죠. 삶에 비하면 짧은거지, 시간이 당신들만 빨리 흐르는건 아니잖아요?”

     

    “…”

     

    이내 내 술잔이 비워진다.

     

    아르윈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제 잔을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가벼운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우리의 시작이 너무나 이상하네요. 지금부터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말 편하게 해도 되죠?”

     

    아르윈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댔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래, 아르윈. 나도 이해해. 하지만 몸을 내어주니 아이를 갖느니…이런건 다 벌써 생각하기에는 이른 문제들이야. 지금 고민해봤자 의미가 없어.”

     

    “….”

     

    “내가 강제로 너를 취할까 그 걱정에 이 주제를 먼저 꺼냈겠지만, 네가 싫다하면 나도 성관계를 갖고 싶지 않아.”

     

    “…그러면 잘된거고요.”

     

    “단계를 뛰어넘고 결혼을 했다고 해서, 우리까지 뛰어넘어야할 이유는 없잖아. 뭐, 대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연기를 해야할지는 몰라도 말이야.”

     

    아르윈은 그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외적으로 의무는 다할 생각이에요. 연기해달라면 연기도 해줄 수 있어요. 딱 거기까지만.”

     

    “그런 서먹한 말은 접어두자는 이야기야. 그러지 말고, 친구부터 하자고.”

     

     

    아르윈의 눈썹이 꿈틀댔다.

     

    “…친구?”

     

    “단명종이랑은 친구도 못한다는 엘프만의 법이 있는건 아니지?”

     

    “…”

     

    “어쨌든 서로의 곁에서 특정시간을 보내는 만큼, 좋게 좋게 보내자.”

     

    “…”

     

    “설령 내 죽음 뒤에 네가 미련없이 떠나더라도…좋은 시간이었다 회상할 수 있도록 하자. 지금의 걱정도 결국 시간이 흐르, 아. 엘프들은 시간의 힘을 믿는다면서. 시간이 다 해결해주겠지.”

     

    아르윈의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향했다가, 다시 아래로 깔린다.

     

    내가 말했다.

     

    “서로에게 맹세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전에 한 맹세요? 그저 구실을 맞춘거잖아요.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진심이었어.”

     

    “거짓말.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를 살아있는 동안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지켜주겠다고요? 누가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해요?”

     

    “…부부잖아.”

     

    “…”

     

    “믿지 않아도 돼. 네가 그러거나 말거나 난 똑같이 행동할거야.”

     

     

    취기가 오른다. 바르디 술은 꽤나 도수가 쎄나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웃통을 벗었다.

     

    아르윈의 몸이 경직되고, 풀어지려던 눈매에 힘이 들어간다.

     

    긴 귀가 파르르 떨렸다.

     

     

    “…봐.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결국에는…”

     

    “그게 아니고 나는 원래 이렇게 자. 쉬자 아르윈. 하루가 길었다.”

     

    “…네?”

     

    -탁.

     

    나는 아르윈의 팔목을 잡아 이끌었다.

     

    언제나 그녀와 닿을때마다, 피부가 차갑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과연 엘프의 특징일지 궁금했다.

     

     

    “…읏.”

     

    아르윈은 미약한 힘으로 내 손길을 거부했다.

     

    결국에는 풀릴 오해라 생각해 나는 그녀를 침대에 밀어넣었다.

     

    아르윈은 힘 없이 풀썩 침대에 눕혀진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옆에 털썩 누웠다.

     

    아르윈은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세웠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멈춰 있었다.

     

     

    “안한다고 했잖아.”

     

    내가 그녀를 상기시켜줬다.

     

    아직 내 말을 온전히 믿지 않는 듯 했다.

     

     

    취기가 올라서일까.

     

    그냥 이 모든게 귀찮아진다.

     

    내가 바라는 부부의 모습은 이런게 아니었다.

     

     

    그냥 하루를 소소하게 마무리하며,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관계를 원했다.

     

    “…그냥 이야기나 하며 자자.”

     

    “…이야기?”

     

    “네가 몇 살이라 했지 아르윈?”

     

    “….170살이요.”

     

    “성년이 아닌데 혼인을 해도 괜찮은거야?”

     

    “…대장로들은 그런거 생각 안해요.”

     

     

    문득 생각난 질문이 있었다.

     

    “듣자하니 셀레브리엔의 엘프들은 성년이 될 때까지 영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던데.”

     

    아르윈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이에요.”

     

    “전에 그러면 우리 마을로 온게…”

     

    “…처음으로 영지를 벗어나본 거에요.”

     

    “꽤 흥미로웠겠는데.”

     

    “…당연히.”

     

     

    나는 차근차근 이어지는 대화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런거였다. 감정적인 싸움보다는 이런 대화를 원했다.

     

    처음부터 이럴 수 있었는데 왜 괜한 대화를 나눠야했을까.

     

     

    졸음과 취기가 섞여, 오랜 추억이 떠오른다.

     

    이럴때마다 꼭 나눴던 대화주제가 있었다.

     

    늦은밤, 단 둘이 있을 때 말이다.

     

    소소한 이야기거리가 되기에 좋은 주제였다.

     

    어느새 침묵을 유지하는 아르윈에게 내가 물었다.

     

    “…꿈이 있어, 아르윈?”

     

    처음에는 대체 무슨 주제를 던지는 거냐며 표정을 찡그리던 아르윈이었지만…취기에 던진 질문이라는 걸 이해했는지, 이내 그녀는 조용히 답했다.

     

    “…억압받았던 만큼, 세상을 여행하고 싶어요.”

     

    “억압?”

     

    “…당신은 몰라도 돼요. 어쨌든…오랜 삶을 세상을 구경하며 보내고 싶어요.”

     

     

    차가웠던 눈매에 이채가 들어선다.

     

    아련하기도, 동심이 담긴 것 같기도 한 눈빛이 반짝인다.

     

    저걸 보고 싶어 물었던 걸지도 모른다.

     

     

    ‘…난 세상을 여행하고 싶어. 부모님을 따라 여행할 때 재밌었거든. 너한테 내가 본 것들을 보여주고…’

     

     

    가슴 한켠이 시큰해지는 그 목소리가 또 들려온다.

     

    잠시 졸린 눈을 깜빡이던 내가 아르윈에게 말했다.

     

    “…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같이 가보자.”

     

    “…네?”

     

    “용병단이라…여기저기 돌아다니거든…네르도 좋아할 것 같고…”

     

     

    아르윈의 표정이 처음으로 풀어진다.

     

    미소와는 거리가 먼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경계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내 옆에 몸을 뉘였다.

     

    내가 이렇게 졸고 있으니 경계를 푸는 듯 했다.

     

     

    “…그건 참…”

     

    아르윈이 속삭인다.

     

    끝내 문장을 완성하지 않은 아르윈이었지만, 나름 그녀의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내 몸의 힘이 풀어진다.

     

    의식이 점멸한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내게 물어왔다.

     

    ‘넌 꿈이 있어?’

     

    아르윈이었을까, 아님 먼 기억속의 누군가였을까.

     

    나는 그 질문에 잠시 고뇌했다.

     

    그러다, 잠에 빠져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dms****_414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노코멘트하겠습니다! ㅋㅋ 나중에는 알게 되실거라 믿어요!

    노오오루님! 1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뒷 부분 살짝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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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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