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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전염병 아포칼립스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이다. 전염원을 차단하고, 아예 발병자가 없도록 만드는 일.

       

       흑사병 에피소드가 시작된 이상 감염 경로를 원천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게 게임에서 정해 놓은 규칙이었으며,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초기 발병자 수를 조절하여 초동대응에 나설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시련을 퍼펙트로 클리어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버멜은 이세계판 흑사병의 중간숙주인 모기를 제거하기 위한 약을 만들기 위해 연성 동아리 부실 문을 열어젖혔다.

       

       “어?”

       

       그리고 그곳에는 에테르와 프레이가 먼저 와 있었다.

       

       ‘얘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원래라면 플레어 에피소드가 끝난 직후 메인 스토리에서 에테르의 비중은 공기가 되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가 가려는 곳에 뜬금없이 등장할 리가 없는데.

       

       “너희 뭐 해?”

       “취미생활.”

       “취미로 스크롤을 만들어…?”

       “그러면 뭐 어때서. 내가 내 등록금 내고 부실에서 취미생활 좀 하겠다는데.”

       “뭘 만드는데 그래?”

       “모기 잡는 거.”

       “……?”

       

       뜻밖의 대답에 버멜의 사고가 멈춰섰다.

       

       “그러니까, 그 스크롤로 모기를 잡는 도구를 만들겠다고?”

       “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스크롤을 활용한 하급 마수 교란기는 버멜이 원래 작성하려고 하던 새 빌드의 일부였다. 그런데 그걸 에테르가 먼저 개발하려 하고 있었다.

       

       ‘시련 두 개가 겹쳐지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흑사병 시나리오는 ‘첫 번째 시련’에 해당한다. 반면에 에테르의 스트레스 수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을 때 임의로 발생하는 이벤트는 시간상 ‘네 번째 시련’에 해당한다.

         

       첫 번째 시련의 주인공을, 네 번째 시련의 주인공이 박살내려는 모양새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고사성어를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스템상에서 네 번째 시련이 아직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에테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흥미본위로 벌인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플레이어가 여러 일을 하는 사이에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던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메인 이벤트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학교생활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도 좋았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우와! 다 했구나!”

       

       어쨌건 자신이 하려던 일을 에테르가 대신 해 주고 있다. 고인물 인생을 살며 이런 경우를 처음 보니 뉴비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버멜은 소녀를 따라 자리를 나섰다. 에테르가 찾아온 곳은 근처 관엽식물이 자리한 물웅덩이였다.

       

       “왜 이런 곳으로 온 거야?”

       “모기가 기계인 건 알지? 근데 책을 보니까 얘네들도 나름대로 습성이 있더라고.”

       “습성?”

       

       모기에게 자세한 습성이 있는지는 버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게임에선 어디까지나 흑사병의 중간숙주가 모기라는 것, 그리고 흑사병을 치료하려면 운향과에 속한 나무의 껍질이 필요하다는 것만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였으니까. 이 세상에 어떤 학문이 어떻게 발달했는지까지는 관심 대상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만한 학식을 쌓을 시간도 부족했다.

       

       하지만 에테르는 달랐다.

       

       “모기가 기계로 된 마수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얘들도 번식과 발생을 하기 때문이야. 모기 자체가 추위에 못 견딘다기보다는, 알을 까고 새끼를 칠 환경이 마땅치 않아서 잠시 동면 같은 걸 하려고 사라져주는 거지.”

       

       에테르는 자신이 원할 때마다 지식을 익혀서 써먹었다. 이런 세부적인 건 게임 속 모든 컨텐츠를 플레이하면서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액체 상태의 물, 그리고 무환자나무목이 있는 곳이라면 번식조건은 완성돼.”

       “무환자나무목?”

       “식물 분류체계 얘기야. 그중에서도 귤속에 속한 식물군에서 모기떼가 많이 몰려든다는 연구결과가 있더라. 흔히 시트러스라고 부르는 거 있지? 레몬이나 라임, 유자나 만다린오렌지 같은 거 말이야.”

       

       ‘유자라니, 설마…!’

       

       이세계판 흑사병의 치료제를 구성하는 재료 중 하나가 바로 유자나무의 껍질과 열매다. 그리고 이세계의 흑사병은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체를 감염시키는 능력을 갖춘 비현실적 전염병이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 모든 설정이 들어맞는다. 비산란기 모기가 왜 이런 나무에서 수액을 빨아먹고 돌아다녔는지, 실제 시련이 닥친 직후 귤향에 미쳐 살던 세피아 선생이 흑사병에 걸리더라도 살아남았는지도 알았다. 버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가에 스크롤을 설치하는 에테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테르를 컨트롤하긴 어렵다.

       

       하지만 타락만 시키지 않는다면, 해피엔딩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카드가 되리라.

       

       

       **

       

       

       북방으로 향하는 길은 춥고 고되며, 또한 외롭기까지 하다.

       

       전쟁터로 끌려나가는 병사들의 곁에는 전우라도 있기에 망정이지, 홀로 움직이는 클라이스에겐 한 발자국씩 내딛는 그 모든 과정이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집으로 가는 길인데 마음이 편칠 않다. 한적한 북쪽 산맥지대에서 보통 사람들은 한파와 마수만을 무서워하지만, 클라이스에게는 공포를 주는 대상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아버지였다.

       

       “들어오십시오.”

       

       무미건조한 집사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클라이스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하이얀 시루떡 가루가 흩날리는 날씨 속에서 부츠를 벗어두고는 현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공작쯤 되면 각 가문마다 추구하는 예술적 기준이 있다. 하스펠트 가문의 미적 감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미니멀리즘’이었다. 간소화할 건 간소화하고, 절약할 건 절약한다. 그만한 긴축 덕분에 하스펠트는 예술품과 사치품을 살 돈으로 플레어 연구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본가의 복도가 도자기 하나 없이 무미건조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이윽고 제 아버지에 다다른 클라이스는 심호흡과 함께 문을 두들겼다.

       

       똑똑. 응답은 없었다.

       

       “…실례할게요.”

       

       적당한 원목으로 만든 문이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내며 여닫혔다.

         

       집무실의 내부 경관 또한 호화로운 수준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옻칠이 되어 있는 가문비나무 책상 하나 놓인 게 그나마 사치라고 부를 만한 가구였다. 소파나 선반? 기껏해야 하급 귀족이 쓰는 제품과 비슷한 품질이다.

       

       책상에는 한 중년 남성이 의사를 삐거덕거리며 서류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그가 슬쩍 눈을 들어올리며 클라이스를 바라봤다.

       

       “…클라이스, 내가 왜 너를 부른지 아느냐?”

       

       이 시대에 웬만한 일은 유선전화로 해결된다. 간단한 일이었더라면 아버지도 클라이스를 본가로 호출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아버지가 다 큰 딸내미와 얼굴을 맞대려고 하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가문의 위신을 훼손했을 때다.

         

       “내가 웬만하면 네 실책을 감싸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탁, 하고 한기를 머금은 갱지 묶음이 카페트 위로 안착했다.

         

       신문기사였다.

       

       [틸레트 아카데미에서 최상급 화계마도 ‘플레어’의 개발에 성공… 학부생이 핵심 원리 규명한 것으로 밝혀져]

       

       “변명이나 좀 들어보자. 그 신문에 나온 금안족 계집애한테 연구자료라도 도난당한 거냐?”

       “네?”

       

       뜬금없는 질문에 클라이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너 전에 나랑 통화할 때 그런 얘기 있지 않았나? 3년 전에 금안족 노예를 하나 들여다가 연구실에 앉혀놨다고.”

       “그, 그런데요.”

       “‘그런데요?’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냐? 지금 성도에 금안족이 그 기사에 실린 네 노예 말고 더 있냐고 묻겠다. 있느냐, 없느냐?”

       “어, 어, 없어요….”

       “그렇다면 너는 그 노예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도 모자라서 가문이 연구하던 걸 가로채게 만들었다는 소리겠군. 아비 말에 틀린 거 있느냐?”

       

       아버지 앞에서 딸내미는 벌벌 떨어야만 했다. 무어라 항변을 해야만 하는데, 말이 멋대로 나오질 않았다. 준비했던 말을 꺼내봤자 모두 변명거리로 전락할 게 뻔했다. 

       

       부모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자식은 본능적으로 눈을 내리깔고 마룻바닥에 난 패턴을 관찰해야만 했다.

       

       이럴 때 클라이스가 자주 써먹던 묘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대가리부터 박는 것이었다.

       

       “…제 불찰이에요. 죄송합니다.”

       

       클라이스는 깊게 허리를 구부렸다. 상체를 어찌나 앞으로 숙였는지, 흘러내린 머리칼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런 클라이스의 정수리 위로 희뿌연 연기가 지나갔다.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아버지가 클라이스와 같은 파지법으로 마력초를 태우고 있었다.

       

       “그래, 가문의 비원이니 뭐니 하는게 뭔 소용이냐. 중요한 건 제국에게 절멸급 마수를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는 거지. 80년간 우리가 쏟아부었던 자본이 원금회수조차 하지 못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다지 상관없는 일은 아닐 게다. 그래, 특허가 풀리더라도 상관없는 일이겠지, 그래…. 너도 그리 생각하지? 클라이스.”

       “…….”

       

       그 비꼬는 말 한 마디가 심장에 비수처럼 박혀왔다. 그러나 결정타는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야. 왜 표절 얘기가 나도는 거냐?”

       “…네?”

       

       클라이스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논문 표절이라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누가 그러더군, 성도에 벌써 소문이 쫙 퍼졌다고. 네가 한때 노예로 부렸던 그 금안족 꼬맹이가 쓴 논문을 거의 똑같이 따라 쓰다가 데스크 리젝을 받았다는 얘기가 이 아비의 귀에 들어온 건 대체 누구 책임이냐?”

       

       진짜 모른다. 설마 자신이 여기로 오는 동안 유선으로 퍼진 건가? 요샌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가 빠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다른 건 어떻게든 참겠는데, 논문 표절은 도저히 가만 못 두겠구나. 클라이스, 너 때문에 가문의 위신이 땅에 쳐박히다못해 대륙 내핵을 뚫고 들어갈 수준이 됐다.”

       “그건 곡해된 거예요…! 정말로… 저는 정말로 표절하지 않았어요…!”

       

       억울했다. 그러나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할 수단은 남아있지 않았다.

       

       “클라이스.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선 널 감싸고 싶어도 감쌀 수가 없다. 설령 네가 그 꼬맹이의 논문을 참고하지 않았더라도 유사도가 높은 이상 끝장이야.”

       

       물론 클라이스 자신도 짚이는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플레어를 완성한 과정과 방식은 대개 에테르가 만든 것의 하위호환이었으니까.

       

       마소-에너지 교환성 정리로부터 플레어의 제반 이론을 쌓았다는 점, 스크롤을 증축하고 3차원 형태로 배열해서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점, 둘 다 같은 파장의 마력파를 사용하여 실험을 진행했다는 점.

       

       그 모든 점이 이상하리만치 들어맞아서, 클라이스는 속에서 뜨거운 게 끓어오를 정도로 억울했더라도 변명할 수가 없었다. 말할 거리를 늘어놓아봤자 학계에서 도둑년 취급만 받을 게 뻔하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도, 하스펠트의 가주는 재털이를 집어던지는 대신 평온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널 여기 부른 건 널 채근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선택하게 하기 위함이지.”

       “선택이라 하시면…?”

       “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문의 위신을 떨어뜨린 책임을 물어 우리 집안에서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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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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