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55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서 ‘일반인’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과연 무엇일까.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나 마법, 혹은 지위 같은 건 일단 없다고 가정하고.

         

         

        말을 잘하는 능력이나 요리를 잘하는 기술, 그 외에 여러 기술적인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살아가는 데 도움은 되겠지.

         

        하지만 그런 식의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말고, 그저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항목은 뭘까?

         

        사람에 따라 대답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 개인적인 의견은 이렇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항목은 ‘자기 주제를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도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폭군 앞에서 주둥아리를 놀리면 모가지가 썰려 나가는 거고.

         

        아무리 요리를 잘한다고 해도 뒷배 없이 수도 한가운데에 음식점을 내면 빚 때문에 깡통을 차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제3 황녀의 탄생일 연회에 평민 메이드가 참석한다는 건 명백하게 주제 파악을 넘어 콧대가 부러질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행위였으니.

         

        이 상황을 막아내기 위해 내 몸이 옆에 있는 에단의 방으로 향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자, 잠깐만, 릴리스! 옷 갈아입어야 한다니까 갑자기 어디가?!”

         

        “릴리스 아가씨…! 그쪽은 도련님 침실….”

         

         

        이사벨의 설명을 듣자마자 방에서 튀어 나간 나를 따라 이사벨과 카타리나가 따라오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내 머리는 흥분으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 모든 일의 원흉으로 유력한 에단의 방문을 두드리게 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똑, 똑, 똑.

         

         

        에단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혼란스럽게 요동치고 있었고.

         

        머지않아 문 너머에서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드지?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나타난 검은 머리의 귀공자.

         

        이쪽도 나름대로 연회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지, 평소보다 훨씬 말끔한 정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본판이 멀쩡해지니까 검은 양복도 꽤 어울리긴 하네. 『루미노르 아카데미』에서는 단추가 터질 것처럼 조이는 양복을 입는 꼴밖에…아니, 이게 아니지.

         

        순간적으로 다른 곳으로 새버렸던 생각을 되돌리자마자 검은 양복 차림의 에단이 나를 바라보았고.

         

        손으로는 나를 따라온 이사벨과 카타리나에게 잠시 물러나라는 손짓을 보였다.

         

         

        “…….”

         

        “…….”

         

        -끼이익.

         

         

        얼떨결에 내 뒤를 따라 에단의 개인실에 들어왔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지는 두 명의 동료들.

         

        그런 그녀들이 자리에서 사라지자마자 에단은 뻔뻔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메이드? 저녁 연회에 참석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 두는 게 좋아.”

         

        “…제정신입니까?”

         

        “응?”

         

        “제정신이냐고 물었습니다, 에단 도련님.”

         

        “…….”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황녀의 탄생일 연회에 자기 메이드를 파트너로 참석시킨다는 게 말이나 되는 짓이냐고.

         

        아무리 블랙우드 공작 가문의 귀공자라지만,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하다못해 어디 백작이나 자작 가문 자제의 생일 연회라면 상관없겠지. 그런 자리는 에단이 참석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그 파트너로 메이드를 데려가든 동네 빵집 아가씨를 데려가든 문제 자체가 생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연회의 주최자는 황가, 그것도 제3 황녀의 탄생일 연회.

         

        비록 제3 황녀가 차기 황권에서 앞서 나가는 인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례함의 극치였다.

         

        블랙우드 공작 정도의 가문이 파트너로 하급 귀족조차도 아닌 평민 메이드를 데려간다고?

         

        그 꼴을 본 제3 황녀나 다른 귀족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황좌와 거리가 먼 제3 황녀를 평민과 비교하기 위해 나를 데려왔다거나, 혹은 블랙우드 가문의 황가에 대한 충성심이 일개 평민 수준과 다르지 않음을 상징한다는 등.

         

        그 상황을 지켜보는 황가와 다른 귀족들에 의해 별 이상한 음해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행보였으니.

         

        멍청한 표정으로 내 말을 되묻는 에단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이런 감상이 떠올랐다.

         

         

        ‘요즘 경영 교육도 받고 있다길래 좀 멀쩡해진 줄 알았는데, 내용물은 여전히 애새끼였나?’

         

         

        블랙우드 공작 가문의 귀공자가 지녀야 할 기본 중의 기본도 못 지키는 에단의 모습에 내 머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그나마 최근 좋아졌던 에단에 대한 평가 또한 실시간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무례를 저지를 거면 그냥 제 혼자 할 것이지, 대체 나를 왜 개입시키냐고.’

         

         

        그러나 내 반응에도 에단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그저 태연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으니.

         

        머지않아 그의 입이 열리며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그래서 내가 물었잖아, 메이드. 정말로 같이 연회에 참가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그야 당연히 도련님의 전속 메이드로서 자리에 임하라는 뜻으로 알고…!”

         

        “분명히 나는 메이드에게 재차 물어보기까지 했어. 그런데도 당연히 알고 있다면서 대답한 건 메이드였고.”

         

        “…….”

         

        “이제 와서 무를 순 없어, 메이드. 이미 다 정해진 일이니까.”

         

         

        …그래, 이렇게 따지고 드니 확실히 내 잘못이기도 하네.

         

        에단이 말하는 ‘연회에 함께 참가하자’라는 말의 의미를 대충 넘겨짚은 건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체 어떤 메이드가 상상할 수나 있겠냐고.

         

        지가 모시는 주인이 자기의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해달라고, 그것도 제3 황녀의 탄생일 연회에서 그딴 짓을 해달라고 요청한다니.

         

        상식적으로 이건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잖아.

         

        만약 에단이 말한 내용의 진의를 알고 있었더라면 고려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거절했을 터였다.

         

         

        “하지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지 말해줄래, 메이드?”

         

        “도련님은 블랙우드 가문의 귀공자입니다. 또한, 주인님께서는 다른 자식이 없으시니 차기 블랙우드 가문의 가주이기도 하시고요.”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저는 그저 평민 메이드입니다. 그것도 빚으로 팔려온 하찮은 신분의 메이드죠. 비록 제가 분에 안 맞게 도련님의 전속 메이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는 그것으로 제 신분 등급이 올라갔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

         

        “게다가 이번 연회는 제3 황녀님의 탄생일 연회이니만큼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 파트너로 평민 메이드를 데려가셨을 때 일어날 파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알아들었으면 제발 지금이라도 취소해.

         

        네 정치적 퍼포먼스에 내 목숨까지 걸지 말고 그냥 평범한 귀족 영애로 아무나 데리고 가라고.

         

         

        “역시, 메이드는 생각이 깊군.”

         

        “네?”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었어.”

         

         

        내 말을 들은 에단은 혼자서 무언가를 작은 목소리를 중얼거렸고.

         

        이윽고 내가 고려한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을 이어갔다.

         

         

        “메이드가 걱정하는 부분은 잘 알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떻게 걱정을…!”

         

        “이미 황실 측으로 서한을 보내놨어. 내 파트너 자리는 내 전속 메이드인 네가 맡을 거라고.”

         

        “네……?”

         

        “메이드의 말대로, 평민 메이드를 연회에 데려가면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으니까. 미리 그런 의도가 없다는 걸 전해두면 상관없지.”

         

         

        …그 얘기가 나온 게 겨우 사흘 전인데, 그걸 미리 서한을 보내놨다고?

         

        그 준비성 자체는 인정할만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다른 의문이 내 머리에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나를 공식적인 연회 자리에 파트너로 데려가고 싶은 건지, 그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

         

        “…….”

         

         

        그로 인해 내 의심스러운 눈빛은 에단의 대답 이후에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고.

         

        그 또한 내 눈빛의 의미를 읽은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파트너로 데려가는 것에 대한 이유를 보충했다.

         

         

        “메이드를 파트너로 데려가는 이유는, 다른 귀족들의 귀찮은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야.”

         

        “…귀찮은 접근이요?”

         

        “메이드도 알다시피 나는 아직 약혼자가 없으니까. 어렸을 때는 저주 때문에 병상에 누워있었고, 요즘에는 바빠서 다른 귀족 가문과 교류할 시간 자체가 없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대체 얼마나 많은 귀족이 블랙우드 가문의 위상에 편승하려 할 것 같아?”

         

        “…적어도 적지 않은 소란이 일어날 정도는 되겠군요.”

         

         

        에단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것 같긴 했다.

         

        블랙우드 가문 정도 되는 유력 귀족의 약혼자 자리가 비어 있다는 건, 블랙우드 가문에 연줄을 댈 수 있는 가장 막강한 자리가 비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병상에서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부터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귀족들도 있었고, 서한으로도 꾸준하게 에단의 약혼과 관련된 내용이 날아오고 있었으니.

         

        아마 이런 공식 행사에 에단이 참여하는 순간 여러 귀족이 그에게 약혼자 관련으로 몰려들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외모면 굳이 블랙우드 가문의 휘광이 없더라도 아가씨들에게 주목받을 만한 외모이기도 했고.’

         

         

        비록 내가 해럴드를 만날 때마다 벌벌 떨며 속으로 씹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해럴드는 확실히 남자의 시선으로 잘생긴 편이었다.

         

        그 아내인 타나시아 또한 청순미 가득한 아름다운 기품을 뿜어내는 귀족 아가씨였고. 물론 이쪽은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서 태어난 에단의 외모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두꺼운 지방질이 그 잠재력을 전력으로 감추고 있었지만, 지금의 에단은 혹독한 수련 덕에 그 지방 덩어리들을 전부 제거한 상태였으니까.

         

        저런 외모의 인간이 블랙우드 가문의 후계자이기까지 한다면…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연회의 주인공보다 더 주목을 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나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메이드.”

         

        “…….”

         

        “제3 황녀 탄생일 연회이니만큼, 나는 당연히 황녀님께서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저 또한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메이드에게 부탁한 거야. 메이드가 나와 같은 반지를 끼고 파트너로 참석해주면, 이름 모를 약혼자인 척하고 관심을 끊어낼 수 있으니까.”

         

        “약혼자인 척….”

         

         

        “그리고 내 전속 메이드는 내가 아는 메이드 중에 가장 믿을 만한 메이드니까. 그게 아니라 단순히 외모로만 보더라도 메이드가 가장 예쁘기도 하고.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도 메이드가 내 파트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네?”

         

        “…아니, 이건 그냥 혼잣말이야.”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은 아니었다.

         

        마치 파트너 약혼자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다른 귀찮은 손님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작전 자체는 충분히 그럴싸해 보였으니까.

         

        다만 이 작전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실제 귀족이 아닌 ‘귀족인 척’ 위장한 평민이라는 점이지.

         

         

        그저 에단과 내가 같은 반지를 낀 모습만 보고 약혼자라 생각하며 물러가는 것 정도는 내 신분으로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만약 상대 쪽에서 직접 내 신원을 물어오기라도 한다면 나는 당연히 내 계급과 신원을 밝힐 수밖에 없는 지위였으니.

         

        어쨌든 나는 평민이고, 내게 질문을 건네오는 상대방은 십중팔구 귀족일 터였다.

         

        그리고 평민의 신분으로 귀족의 질문을 거부했다가는 당연히 후일 문제가 생기겠지.

         

        그렇기에 당연히 이 부분을 강조하며 에단에게 재차 물어보았으나.

         

        에단은 이 부분도 미리 준비해뒀다는 듯 준비된 답변을 건넬 뿐이었다.

         

         

        “제 신원에 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만약 상대방 측에서 제 이름과 지위를 물어보신다면 저는 어쩔 수 없이 제가 평민 메이드임을 밝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괜찮아, 이번 연회에서 너한테 그런 질문을 건네올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만약 물어오더라도, 무시하면 그만이고.”

         

        “……네?”

         

        “이번 제3 황녀님의 탄생일 연회 콘셉트는, 가면무도회니까.”

         

         

        …아.

         

        그래, 너무 예전 일이라 잠시 잊고 있었네.

         

        『루미노르 아카데미』의 히로인. 제국 제3 황녀가 원작에서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춤춰라! 릴리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망나니 공자의 메이드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transmigrated into a character from my favorite game in my previous life. Moreover, as the character I despise second most in the game. (Not a wasteman) The cover was designed by Deep Dark Wolf, and the typography was done by 유일유화 (Yu Ilyuhwa).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