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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

         

         외교관저가 무슨 마왕성도 아니고, 칠용장이 기거하는 군왕거(君王居)도 아니므로, 대부분의 공무청 사무실이 그러하듯 평범한 형태를 띄고 있다.

         

         즉, 사무실과 사무실이 늘어선 무기질적 백색 복도가 몇 층 정도 쌓여 있는 곳을 생각하면 대개 맞다.

         

         물론 이는 다소 특이하다 할 수 있다. 애초에 관저라 한다면 행정을 위한 건물이 아니라 거주를 위한 건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크라실로프 외무장관은 왕세자란 점이다. 일국의 왕세자가 관저에서 살 리가 없잖은가.

         

         따라서, 외무성은 외교관저를 다목적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다. 왕세자의 성은이라 할 것이다. (잠을 잔다면 사무실에서 ‘편히’ 자라는 왕족 다운 은혜다.)

         

         

         “이거….”

         

         

         이반은 관저의 3층을 돌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5층 건물의 중간까지 돌파하는 동안, 사무직원은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고 나오는 것들이 다들 무장 군인들이었다.

         

         용병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저열한 종류의.

         

         

         “이거 1챕터 스테이지 같은데….”

         

         

         이쯤에서 이반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용사 파티의 자제가 주인공이라 가정한다면, 당연히 스토리를 진행할 때에 적과 도전과제, 퀘스트, 기타 적대 세력이 나타나는 것이 상식이니까.

         

         그렇다고 가정할 때, 이반이 느낀 이 미묘한 ‘어설픔’과 ‘무능함’이 해결된다.

         

         

         Q) 대체 왜 용사 파티 자제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납치를 한 것인가.

         A) 캐릭터 선택 후 스테이지를 깨야 하기 때문.

         

         Q) 왜 외교관저에 하급 용병들만 몰려다니나.

         A) 1챕터 일반 몬스터가 과도하게 강력해선 안 되기 때문.

         

         Q) 대체 방첩사령부는 뭘 하고 있길래 용사 파티 자제들이 하나하나 납치당하는 데도 넋 놓고 있었는가?

         A) 그것이 아케이드 게임의 ‘상식’이기 때문에.

         

         

         아하.

         

         이런.

         

         이반은 짧은 깨달음과 짧은 탄식을 동시에 흘렸다. 그럼 이거 내가 다 죽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는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무기질적 백색 복도는 이제 붉은 페인트통을 여기저기 흩뿌려 둔 모양이 되어 있었다.

         

         멀쩡한 외교관저가 순식간에 성업 중인 육가공공장(그러나 보건위생엔 신경 쓰지 않는)으로 성공적인 업태 변경을 한 광경에, 이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소 과감하게 추론해보자면, 이 에피소드는 용사파티 자제들. 그러니까 주인공들의 ‘성장’ 이벤트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개중에 ‘정사’로 불릴 스토리라인은, 에시디스의 성장이겠지.

         

         믿었던 삼촌, 그러니까 허스칼의 납치에서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애초에 기획된 의도가 아니었겠는가.

         

         이반은 턱을 쓰다듬으며 짧게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점에선 어차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모든 일은 한번 굴러간 이상 종착점에 도달해야 완수되는 법이다. 중간에 ‘아닌 것 같다’며 내려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그는 상념을 떨치고 도끼를 든 채 계단을 타고 올랐다.

         

         

        *

         

         외교관저 4층. 불 꺼진 복도엔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가며, 이반은 천천히 도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청각이 점차 예리해진다. 삐익, 하는 익숙한 이명과 함께.

         

         

        -우리도 잡혀 왔어.

        -아하….

         

         

         소근거리는 소리는 용사 파티 자제들의 것. 들리는 방향은 한층 위 바로 앞 사무실이다.

         

         위치 파악이 끝난 즉시 이반은 걸음을 떼어냈다.

         

         스테이지든 에피소드든 챕터든, 이 이야기가 무엇을 위한 안배였든 일단 구해 놓고 고민하자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에시디스의 튜토리얼 이후 이자벨의 튜토리얼 난이도가 급격히 뛰어올랐던 것을 고려해본다면, 이번 이벤트 또한 다음 이벤트에 영향을 끼칠 테니까.

         

         게임의 상식을 따르고 있지만, 국가 정세와 세력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변동되는 사건들. 게임과 현실의 이 미묘한 차이가 이반의 머리를 헝클였다.

         

         

        -피이잉….

         

         

         그때 저 멀리에서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인식한 즉시 이반은 허리를 숙였다.

         

         곧, 맹렬한 사선 감지가 깜빡거렸다.

         

         

        -후우웅….

        -콰아아앙!!

         

         

         이반이 서있던 자리에 대검 한 자루가 날아와 박혔다. 이반은 몸을 튕겨 거리를 벌리고 도끼를 들었다.

         

         사선 감지를 인식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들이닥친 공격. 일반적인 초인이라면,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죽었다.

         

         그건 곧 이것이 초인의 공격임을 의미한다. 초인과 초인의 전투는 매양 이런 식이니까.

         

         감각 활성화를 통해 진입하는 초인의 전장은,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단위 아래에서 인지할 수 있도록 신경을 가속화시키는 테크닉이다.

         

         그러니, 신경 가속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초인의 급습’을 받게 된다면 대응할 수 없다. 초인의 세상에선 후발선제와 같은 이치가 무의미하다. 선공이 무조건적으로 유리하니까.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 ‘직감’이다. 사선 감지를 한 단계 강화한, 급습에 대한 직감.

         

         사선 감지가 일반인과 초인의 격을 나누었다면, ‘직감’은 초인과 초인의 격을 구분하는 척도다.

         

         

         “이걸 피해?”

         

         

         그러니까, 직감으로 초인의 공격에 반응했다는 것부터 상대방의 경지를 눈치챌 수 있다는 뜻이다.

         

         

         “허, 이걸 할 줄 아는 녀석을 흩어 놓으려고 우리 애들이 온갖 데에서 피땀 흘려가며 애를 썼는데.”

         “다이오나르 에릭손.”

         “날 만난 적도 있는 모양이군. 내가 사람 얼굴 잘 기억하는 편인데, 자네는 누군지 예상이 가질 않아.”

         “알 필요 없다.”

         

         

         이반은 도끼를 들었다. 투둑, 툭. 창 밖을 때리는 빗방울의 음률이 이미 느릿하게 변해 있었다.

         

         여름비가 잦아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간이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화가 멀쩡히 이어지고 있는 것은, 마주본 두 사람이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뜻.

         

         

         “이건 막시밀리앙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 아니. 이것까지 그 자식의 의도였나.”

         “….”

         “과묵하시군. 그래, 지금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니지.”

         

         

         다이오나르는 픽 웃고는 손을 까닥였다. 피잉, 실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벽에 박힌 대검이 빙글 돌아 그의 손아귀 안에 빨려 들어갔다.

         

         한 손으로 대검을 콱 쥐고, 다른 한 손을 늘어트린 채로. 다이오나르는 칼날을 들어 곧게 세웠다.

         

         

         “오라. 실력을 봐주지. ‘예비대’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알려주마.”

         “재밌군.”

         

         

         이반은 피식 웃었다.

         

         ‘예비대’. 즉, ‘용사 예비대’라는 분류는, 엄밀히 말하자면.

         그 자신. 이반 페트로비치 중령의 존재로 처음 만들어진 개념이었다.

         

         이반은 미묘한 감흥에 미소를 지었다.

         

         그 시절, 용사 파티엔 상하관계가 없었다. 나이와 인종, 직위에 상관 없이 모두가 목숨을 걸고 마왕을 도모하던 이들이었으므로.

         

         그러나 ‘예비대’. 그 이름 아래 분류된 이들은 그렇지 않다. 용사 파티와 비견될 수 있었다면 예비대가 아니라 현역으로 마왕성에 함께 올랐을 테니.

         

         그러므로, 예비대로 분류되었던 이 강자들. 분명 ‘강자’들과 ‘초인’들 사이에선 독보적인 입지를 가졌던 이들 중에서는 격의 상하가 존재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띄고 있는지, 이반은 기꺼이 가르쳐줄 용의가 있었다.

         

         그는 대단히 예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후배의 오만을 직접 정정해주기로 했다.

         

         ‘예비대’의 이름을 가진 이들 중, 유일하게 용사 파티와 동행했던 선배로서.

         

         친절하게.

         

         

        *

         

         

        -피이잉!

         

         

         실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후우웅! 대검이 곧장 머리에 내려 꽂힌다.

         

         강맹한 일격, 수직 낙하하는 힘에서 바위를 부수고 성문을 허무는 기세가 느껴진다.

         

         마력이 치밀하게 직조된 검신을 튕겨내고 몸을 뒤틀었다.

         

         

        -콰아아앙!!

         

         

         그가 빗겨친 칼날이 복도를 내려 찍었다. 큰 균열과 함께 바닥이 붕괴한다. 이반은 허물어지는 발판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걸렸구나!”

         

         

         다이오나르가 비릿하게 웃으며 빈 손을 까딱였다. 피이잉!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실 한 자락이 허공에,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이 녀석, 기교파다.’

         

         

         에이나르와 같이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기교를 동원해 대국을 이어가는 종류의 전사다.

         

         큰 덩치와 야성적인 인상 탓에 오해하기 쉽지만, 이 녀석은 오히려 베올그린과 비슷한 전투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마력사(絲)로 공간을 장악해 거미줄을 치고, 중간중간 대검으로 변주를 주는 타입.’

         

         

         마족 중에서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 어둡고 비좁은 실내 공간에서 부비트랩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위협이 되니까.

         

         사선 감지나 직감은 어쨌건, ‘의도’를 가진 공격에 반응한다. 그 자리에 가만히 박혀 있는 함정 같은 경우엔 사전지식과 임기응변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용사 파티에 도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종류의 지식에 정통해야 했으니까.

         

         어둠 속에 도사린, 악의 섞인 함정들.

         

         그 사이에 빈틈을 파고드는 강맹한 일격.

         

         물론 ‘일반적으론’ 파훼하기 까다로운 패턴이다. 확실히 난이도가 있다. 이반은 슬쩍 웃으며 몸을 틀어 공격을 튕겨내고는 생각했다.

         

         

         어린애들이 도전하기엔 빡빡하긴 하겠다.

         

         

         이것이 용사파티 자제들을 위한 스테이지고, 이 녀석이 보스라고 가정한다면.

         

         스테이지의 목적은 아마도, ‘초인의 영역’을 익히도록 강제하는 종류의 구조.

         

         모르면 맞아야지, 하는 종류의 싸움이다. 대단히 악의적인 설계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그건 애들 수준에서 보는 것.

         

         

         용사 파티에 도적이 필수적인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이런 종류의 함정과 적들을 대응하기 위함이며.

         

         그건 곧, 용사 파티가 현역일 당시 이런 종류의 적들을 무수히 마주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반은 그런 용사 파티의 ‘척후조’로서, 엔리케와 함께 발을 맞춰 적지를 돌파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키이이잉….

         

         

         도끼가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난다.

         

         

        -스가악…!

         

         

         날에 걸린 실들이 투둑, 끊어져 내려간다.

         

         

        -후우우웅!!

         

         

         그 틈을 타서 달려드는 대검의 흉험한 파공성을 듣고, 듣는 순간 거리와 속력을 역산하고, 역산이 끝난 순간 몸을 돌려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더 앞으로. 그 안의 거리를 파고들며.

         

         

         “하하하!! 거긴 이미 내가….”

         “알고 있다.”

         

         

         마력이 얽힌 실들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감각기관처럼 운용된다. 말 그대로, 거미줄 같은 구조물이다.

         

         행동을 제약하고, 공격의 방향을 뒤틀고, 빈틈을 만들어, 그 사이로 대검을 쑤셔 박는 전투 방식.

         

         이반은 이미 이런 방식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효율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이미 경험한 일에 두 번 고전하지 않는다.

         

         

        -카아아앙!!

         

         

         “어, 어떻게…!”

         “예비대니까.”

         

         

         예비대란 이름을 달고 이 정도에 놀라서야 쓰나.

         

         이반의 도끼가 대검을 후려쳐 날려버리고, 그 사이 끊어진 실들이 나풀거리며 윤곽을 드러낸다.

         

         다이오나르는 뒤로 주춤 물러서며 황급히 손을 뻗었다. 스르륵, 마력사가 얽히며 튕겨나간 대검을 다시 그의 손에—

         

         

        -콰직.

         

         

         닿지 않는다. 공중에 뜬 대검은 이반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노옴…!!”

         

         

         이반은 대답 없이 몸을 틀어 대검을 곧장 놈의 복부에 박아 넣고, 감겨 오는 실을 피해 몸을 틀었다.

         

         

        -스거억!!

         

         

         동시에 도끼를 뒤틀어 챈다. 번들거리는 날이 허공을 긋고, 유려하게 원을 그려 바닥으로 향한다. 그 사이에 걸려 있던 것들을 모조리 절삭해내며.

         

         실과, 살점과, 뼛조각이 한 수에 갈라지고. 핏물이 새하얀 벽 위로 촤악, 쓸려 나간다.

         

         

         “끄으…으으으… 으으아아악!!”

         “비명이라니. 숨을 아껴라.”

         

         

         이반은 찢어진 팔뚝을 붙잡고 무릎 꿇은 다이오나르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팍 위에 발을 얹었다.

         

         콰앙, 힘을 주어 놈을 눕히고, 그 위에 올라서서 도끼를 들어 올렸다.

         

         

         “대답해야 할 것이 많으니, 비명을 지르는 데에 숨을 낭비하긴 아깝지.”

         

         

         쉴 수 있는 호흡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천천히, 호흡을 아껴가며 대답하길 기대하마.

         

         이반의 두 눈이 불 꺼진 복도 그림자 아래에서 새파랗게 타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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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하고 바로 검수하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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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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