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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하렌 왕국의 관료들을 두 부류로 나누자면, ‘왕정주의자’와 ‘공화주의자’라 말할 수 있다.

       

       허나, 착각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면, 공화주의자들이 왕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또한 왕의 권리란 신성불가침한 것이며, 왕의 군림 아래에서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누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단지, 그러한 질서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란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할뿐이었다.

       

       공화주의자들이 하나의 파벌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만이구나. 나하렌.”

       “하렌의 백성이 위대하신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쓸 데 없는 미사여구는 집어치우고.”

       “알겠습니다!”

       

       

       정작 그 ‘신성불가침’한 왕실을 이루는 왕족 대다수가─, 그리고 ‘나태왕’이 공화주의자였던 탓이다.

       

       선량왕 이래로 하렌의 왕실은 모든 권리를 국인들에게 돌려주기를 바랐고.

       

       공화주의자들은 그러한 이상에 감화되었다. 

       

       즉, 공화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사상이란 여러 정치적 수식어를 떼어내고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 “우리의 왕께서 모든 권위를 국인들에게 돌려주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마땅히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모두가 용에게 부디 영원히 군림해달라 애원하는 하렌 왕국에서.

       

       오직 왕의 뜻만을 이정표로 삼는 외눈박이 충신들.

       

       그것이야말로 ‘공화주의’의 본질이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모든 하렌인의 적법한 주인이십니다! 저희의 육신과 영혼은 당신께 속하는 것이니, 영원토록 성수무강하소서!”

       “너희의 육신과 영혼은 그저 천주께 속하는 것이지, 세속의 군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폐하께서는 동방의 주교이자 하렌의 군주이십니다! 누가 그 권세를 의심하리이까?”

       “끙….”

       

       

       그렇다고 왕정주의자들이 나태왕에게 반발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오히려 나태왕을 너무 사랑하는 탓에, 나태왕이 아무리 바라는 일이라고한들 들어줄 수 없는 ‘선’이 존재할뿐이다.

       

       하렌의 모든 권세는 오직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만 했다.

       

       누구라도 그 권세를 나누고 훔치고 약탈하고 짓밟으려는 자가 있다면, 오래된 율법의 이름 아래 마땅히 심판받을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나태왕 자신이라도 말이다.

       

       

       “너희들은 정말 질리지도 않는 거냐?”

       

       “폐하께서 내일의 자유를 바라신다면, 오늘 불길에 뛰어들더라도 마땅히 이룰 뿐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말이라면 날마다 다시 말하더라도 질리지 않는 법입니다. 어제와 내일의 말이 다르다면 그것을 어찌 질서라고 하겠습니까?”

       

       “귀찮은 놈들….”

       

       

       그러니 나태왕으로서는 환장할 일이었다.

       

       이 나라의 관료라는 것들이, 죄다 나태왕이 불에 뛰어들라면 정말로 불로 뛰어들 미치광이들밖에 없었다. 피곤함에 일을 멀리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단지 그러한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이곳에 강림한 것은.

       

       

       “…일단 미뤄둔 일부터 가져와라. 싸우느라 일을 못하면 안 되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하렌의 하늘 또한.

       

       하늘을 우러러보는 하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면, 더욱 사랑하십시오. 사랑으로 죽는 것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죽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

       .

       .

       

       투덜거리면서 모든 업무를 해결한 나태왕은, 곧 한 출판사를 찾아갔다.

       

       

       “하렌의 백성이 위대하신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어어, 그래. 여기에 소포클레스라는 작가가 있다고 들었는데….”

       

       

       레 미제라블의 출판사, ‘이반 출판사’였다.

       

       출판사의 사장은 황급히 뛰쳐나와 그의 주인을 맞이했다.

       

       

       “예! 저희 번역가 중 한 명입니다!”

       “잠깐 그 친구와 둘이서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싶은데,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겠나? 내가 그 책을 꽤 인상 깊게 읽었거든.”

       

       “알겠습니다!”

       

       

       그렇게 평소처럼 번역을 하고있던 소포클레스가 사장의 손에 붙잡혀 이끌려나오고.

       

       소포클레스 역시 한쪽 무릎을 꿇고 나태왕에게 인사했다.

       

       

       “하렌의 백성이 위대하신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허, 자네는 하렌의 백성이 아니지 않나?”

       

       “예?”

       “편하게 앉게. 이곳에는 귀찮게 구는 아이들도 없으니 말이야.”

       

       

       소포클레스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듯 반문하자.

       

       나태왕은, 그저 가볍게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제 자식의 얼굴도 몰라보는 어버이가 있겠나?”

       

       .

       .

       .

       

       나태왕은 여전히 참 가벼워보이는 사람이었다. 옷은 얼마나 오래 입은 것인지 거적과 그리 다를 게 없었고, 권위니 권력이니 하는 것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호메로스 자네가 우리 왕국까지 찾아와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행이라도 온 건가? 하렌에는 꽤 멋들어진 자연 공원도 있는데 말이야, 굳이 출판사에 박혀있는 것이 사람 참 알만하군.”

       “어, 그게, 제가 호메로스라는 건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말하지 않았나. 하렌의 왕실은 용의 피를 이은 후예들이라고.”

       “예?”

       

       

       나태왕의 눈이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며 뱀의 그것과 같은 형태로 변화했다.

       

       용의 피가 흐른다는 증거.

       

       위대한 푸른 피.

       

       그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은 왕이 바로 나태왕이었다.

       

       

       “이 귀찮기 짝이 없는 용의 눈이 보여준단 말이야. 진실을.”

       “아하….”

       

       “쯧, 저번에 했던 부탁 때문에 찾아와준 것이라면, 미안하게 되었네. 아무래도 공화주의는 실패인 모양이야. 시이델 공화국이야 나라에 망조가 들 때마다 왕의 목을 갈아치우는 근본없는 국가였으니 나름 효용이 있었다마는, 이 빌어먹을 용의 피가 흐르는 하렌은 될 턱이 없던 모양이지.”

       “그렇군요….”

       

       

       나태왕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골치가 아프다는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말이지, 여전히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예?”

       

       “왕 따위, 정말 쓸모없는 자리라고. 귀찮기만 하고, 거추장스럽지.”

       “…….”

       

       

       한참을 아이처럼 투덜거리던 나태왕은.

       

       문득,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지친듯 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저 아이들은 왕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해.”

       “예?”

       

       “오래된 맹약 따위 알게 뭔가. 기껏해야 날아다니는 도마뱀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의욕조차 없는 멍청이가 고결한 하렌인들의 주인이라 불리다니.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지. 하렌인들은 모두 자기 영혼의 주인이야…. 그게 고결한 자들의 의무이고, 특권이지!”

       “…….”

       

       “저들은 더 나아갈 수 있어. 도마뱀의 후예 따위가 저들의 발목을 붙잡을 수는 없지….”

       

       

       그제서야, 나는 ‘나태왕’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이해해버렸다.

       

       그는 단순히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적같은 옷을 입고, 위엄이라고는 없는 가벼운 말투를 쓰며, 권위를 휘두를 생각조차 없는 이 ‘나태’한 왕은.

       

       

       “자식의 독립을 응원하는 건 아버지의 의무이니….”

       

       

       그저 어버이와 같을 뿐이었다.

       

       하늘이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저 태어나기를 모든 하렌인들의 어버이로 태어난 탓에, 그 어떤 권위나 예식조차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국처럼 입헌군주제로 전환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허, 내가 시도한 적이 없겠나? 애초에, 선량왕 시절부터 하렌 왕국은 입헌군주제 국가였다네.”

       

       “예?”

       “선대왕이었던 선량왕은 사려깊은 자였지. 후에 폭군이 나올 것을 우려해서 왕국의 권력을 의회에 나눠주고자 하였어.”

       

       “으음, 제국에는 하렌 왕국이 전제군주정 국가로 알려져있었습니다.”

       “그야, 선량왕이 너무 유능했던 탓이겠지. 선량왕은 사려깊은 자였지만… 너무 성실했거든.”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침묵하고 있으니.

       

       나태왕은 피식 웃으며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선량왕은 다재다능한 자였어. 어쩌면 나 이상으로 용의 피를 짙게 이어받았을지도 모르지. 그 업적을 나열하려면 하루를 온종일 사용해도 부족할 거야. 지금의 의회를 만든 것도, 관리국을 만들어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만든 것도, 왕실 직속의 군대였던 내금부를 경찰사로 개편해서 치안을 지키기 위한 기관으로 만든 것도, 제국의 기술을 수입해서 인쇄소와 왕국 최초의 신문사를 만든 것도─, 전부, 전부 선량왕이 한 일이었지.”

       “굉장히 유능한 분이셨군요.”

       

       “그래. 권력을 국인들에게 나눠주고자 만들었던 의회가, 결과적으로 왕에게 의존하는 무기력한 거수기가 되어버린 것도, 선량왕 그 자가 굉장히 유능하고 성실한 탓이었지.”

       “아.”

       

       “그 양반은 아마 이렇게 될 것을 알고있었을 거야. 알면서도 오지랖이 넘쳐서 제 국민들을 가만히 방치하지를 못했으니, 죄가 깊다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폐하께서 ‘나태왕’을 자처하신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그건 그냥 내가 천성이 게을러서 그런 거고.”

       

       

       나태왕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조금 편안하게 풀어진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튼, 백성들의 마음도 이해는 가. 우리가 타고난 용의 핏줄은… 우리에게 꽤 많은 것을 가르쳐주니까.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도 금방 이해하며, 마주 선 사람에게 두려움과 공경을 심어주고,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며, 여러 분야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선물해주지.”

       “…….”

       

       “하지만, 그 권리를 타고난 모두가 선량왕같을 수는 없는 법이지. 단순히 나처럼 나태할뿐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후에 태어날 용의 후예가 이 재능을 폭력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하겠나? 하렌인들의 영혼에서 자유와 사랑을 앗아가고, 사람을 그저 도구나 부품으로 취급한다면 어찌 하렌의 아이들이 그에 저항할 수 있겠나?”

       “…….”

       

       “그러니, 제국 제일의 지식인이라는 자네에게 한번 묻고싶군.”

       

       

       그 순간 나태왕이 나에게 던진 질문은.

       

       그저 ‘표절 작가’일뿐인 나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The power of a glance has been so much abused in love stories, that it has come to be disbelieved in. Few people dare now to say that two beings have fallen in love because they have looked at each other. Yet it is in this way that love begins, and in this way only.”]
    [“사랑 이야기에서 시선의 힘이 너무 남용되어 믿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시작되며,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시작됩니다.”]

    #####

    레미제라블 속 인물들은 모두 믿기 힘들 정도로 있음직한 사람들입니다. 항상 실수와 죄를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영혼에는 항상 희망을 품고있죠. 빵을 도적질한 우리의 주인공 ‘장발장’처럼요.

    하지만,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처럼.

    그 결말은 대체로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극은 스스로의 죄로 인한 것임과 동시에, 그 죄에서 눈을 돌릴 수 없는 양심으로 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과응보적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판결에 납득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탈옥을 시도하는 상습적인 탈옥수 장발장은 누명을 쓴 부랑배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가 장발장임을 자백하고, 끈질기게 장발장을 뒤쫓던 원칙주의자였던 자베르는 자신을 구해준 장발장을 놓아주고 자살합니다.

    죄와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불완전한 모습,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양심을 선택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레미제라블은 굉장히 설득력있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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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iving as a Plagiarist in Another World

Surviving as a Plagiarist in Another World

Surviving as a Plagiarizing Author in This World 이세계에서 표절 작가로 살아남기
Score 4.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literature of this other world was atrocious.

So, I plagiarized.

Don Quixote, Anna Karenina,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The Metamorphosis… I thought that unraveling the literature of the original world would advance the literature of this other world.

“Those who dream and those who do not, who really is the mad one?”

“To live or to die, that is the question.”

“No matter how fatal the mistake, it is different from a sin.”

But then, people began to immerse themselves too deeply in the novels I plagiarized.

Can’t a novel just be seen as a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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