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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아리엘의 숙소로 가기 위해 대공성의 북문으로 향하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르미앙과 마주쳤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든 르미앙이 손을 뻗고 있는 것이었다.

       뻗은 왼손이 무엇을 잡으려는 듯 움켜쥐었다 펴지길 반복한다.

       그리고 그 손은, 몇 겹의 얇은 붕대로 감싸져있었다.

       

       “…….”

       

       한 인간이 길에 우뚝 선 채, 그곳만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 허공을 휘젓고 있는 것은 다소 기이한 광경이었다.

       또한.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 광경이었다.

       옅은 멍이 든 뺨, 붕대로 감싸진 왼손, 공허를 담아 허공으로 향한 눈동자, 그리고 히죽거리는 미소까지.

       하루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체 무엇을 겪었기에 하루 만에 상태가 이상해진 걸까.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마치 어딘가가 망가진 듯한 느낌.

       어떠한 줄이 뚝 끊긴 듯한 느낌.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시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기이한 행동을 해내던 르미앙이 손과 고개를 내렸다.

       초점을 잃은 채, 그리 하늘을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내게로 내려온 것이다.

       더 이상 울분과 표독이 아닌, 헤아릴 수 없는 공허와 체념을 담고 있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궁금해 물었다.

       이 야밤에 길 한복판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

       왜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고 있었던 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인지 이전처럼 외면과 회피로써 지나쳐갈 수가 없었다.

       하루 전이라면 또렷하게 울려야 할 목소리가, 깊은 동굴에서 힘겨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푹 꺼져있었다.

       

       “구름… 보고 있었어.”

       

       며칠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맹한 목소리와 퀭한 눈빛.

       하루 만에 일어난 변화라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손은 어쩌다 그리 되신 겁니까?”

       

       붕대가 감긴 왼손을 보며 물었다.

       그리고.

       

       “자, 자해를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또 한번 믿기 힘들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 뺨을 할퀴었던 그 손톱으로 제 손바닥을 짓눌러 피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상처… 아물었네……?”

       

       뺨을 훑어본 르미앙이 다소 놀란 표정을 하며 그리 물었다.

       레이첼의 연고 덕에 말끔해진 내 뺨을 보며.

       

       “예.”

       

       한데, 내 대답에 르미앙의 퍽퍽해진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다.

       뜻 모를 미소였다.

       

       “다행… 이네.”

       

       무엇이 다행이란 말일까.

       충동으로써 해낸 폭력의 흔적이 지워져 위안이 된다는 것일까.

       균열이 인 신념을 봉합할 수 있을 거 같아 다행이란 걸까.

       의문으로써 시작된 우연한 재회는 의문만 낳았고, 그렇게 의문만 남긴 채 가려했다.

       

       “가…볼게….”

       

       아카데미에서부터 늘 엘든이 그녀를 지나쳐갔던 지난 날과 달리, 이번엔 르미앙이 나를, 엘든을 지나쳐간 것이다.

       

       “대공녀님.”

       

       그리고.

       

       원작 엘든의 기억과 나의 기억을 통틀어, 처음으로 그녀를 불러세웠다.

       억울한 생에서의 탈출을 위해 해낸 일들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일들로 인해 벌어진 파국을 즐기고픈, 집착을 탓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주인공의 공허를 연민하고픈, 동정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그에 따른 죄의식을 가지고픈 생각도 없었다.

       

       그저.

       

       “받으십시오. 상처를 흉지지 않게 해줄 겁니다.”

       

       전할 수 있는 것을 뒤에 숨기고 아낄 생각은 없었다.

       작은 것조차 내주기 싫어 바락대는 쫌생이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가진 것이 없어 아무것도 베풀 수 없었던 지난 날과 달리, 이젠 가진 것이 있었고 소박한 베품이란 걸 할 수 있으니까.

       기권이란 탈출을 위해 회피와 외면을 해내야만 했었던 지난 날과 상황이 달라졌기에 전한 도움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 도움을 맹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르미앙의 손에 연고가 든 통을 직접 쥐어준 후, 북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마른 밤하늘에서 내린 보슬비가 북부령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우. 갑자기 웬 비야. 어서 가자. 레이첼.”

       “네.”

       

       서둘러 아리엘의 숙소로 향해야 했다.

       

       

       **

       

       

       “모두 집합-!”

       ““예-!””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밤.

       비상 상태가 선포된 아리엘의 숙소에선 곧 들이닥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시종들이 비상 경계 체제에 돌입했다.

       또한, 모시는 아가씨께서 처음으로 초대한 친구에게 최고의 파티를 선사하기 위한 비상 경계 체제이기도 했다.

       맞이할 손님이 개망나니로 정평난 공자란 것이 문제였다만.

       

       “그,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니까? 엘든 이제 무서운 사람 아니야.”

       

       그런 시종들의 경각심을 풀기 위해 용을 써보는 아리엘이었다.

       괜히 엘든을 초대해 평안했던 시종들의 밤을 해친 것 같아 전전긍긍하며 말이다.

       

       “얘, 얘들아? 진짜 겁먹지 않아도 돼. 엘든 정말 달라졌다니까? 믿어줘…!”

       “각을 맞추도록! 식기와 그릇의 오와 열을 딱 맞추거라!”

       ““예!””

       “저기?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너희들이 알던 엘든이 아니라니까?”

       “자! 호위병들은 파티가 끝나기 전까지 비번자들도 빠짐없이 비상 경계 근무 태세로 들어간다!”

       ““예!””

       

       본의 아니게 시종과 호위병들에게 시련을 안겨버린 듯한 느낌에, 아리엘이 사방을 누비며 쩔쩔맸지만 이미 공포에 질려버린 이들의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마음 같아선 파티를 취소하고 싶을 정도였다.

       

       “끄으응…….”

       

       옛날의 엘든이 아닌데.

       이제 그 누구보다 멋진 사내가 된 그인데.

       무서워 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아직 엘든을 그저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종들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한 아리엘이었다.

       이해는 했다.

       개망나니라 불리던 공자의 변화를 아직 목도하지 못 했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다만, 소중한 독서벗의 노력이 폄하되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었다.

       

       결국.

       

       포기한 아리엘이 전속시녀와 함께 치장실로 들어섰다.

       파티란 걸 언제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릴 적, 몇 번 했었긴 한 거 같은데… 관심이 전혀 없었던 탓에 무얼 했는지 무얼 먹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것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 그저 책 읽는 게 좋을 따름인 어린 소녀에겐 불필요한 시간일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드레스에 화장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맨날 만나던 친구랑 소소한 식사를 하는 것뿐인데?”

       

       아리엘에게 한 명의 여인으로써의 덕목은 부족했고, 드레스나 화장 같은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전속시녀의 뜻은 완강했다.

       

       “백작가 영애께서 파티를 개최하시는데 드레스를 안 입고 화장을 안 하시면 엘론드 백작가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다들 왜 이렇게 유난일까.

       결국 아리엘은 전속시녀의 손에 이끌려 실로 오랜만에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금발에 썩 잘 어울리는 붉은빛 드레스였다.

       가슴 위까지 어깨가 파이고 그 윗선에 물결 모양의 레이스가 달린, 여성미 물씬 풍기는 드레스를 입은 아리엘이 괜히 전신거울 앞에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쭈뼛거린다.

       특히나 등은 날개뼈 아래까지 파여 남사스러울 정도였다.

       

       “너, 너무 과하지 않아…?”

       “과하긴요. 다들 이 정도는 입는다고요. 파티란 게 귀족 분들께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요. 아마 엘든 공자도 멋진 정복을 입고 올 걸요?”

       “멋진… 정복?”

       “그럼요. 그런데 아가씨께서 남루한 차림으로 맞이하면 화난 엘든 공자가 어떤 소란을 일으킬지…!”

       

       부르르.

       전속시녀가 질린 얼굴로 한차례 어깨를 떨었다.

       아리엘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엘든이 정복을 입는다고?

       엘든 역시 늘 편한 차림을 입고 다녔기에 정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정복을 입어야 할 최종 평가전이 없는 날, 또는 그것이 끝난 후에 만났었으니까.

       

       파티용 정복을 입었을 엘든은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진 아리엘이 그렇게 엘든이 도착하길 기다렸고, 그가 도착했단 소식에 버선발로 마중을 나간 아리엘이 눈을 휘둥그레 떠야 했다.

       

       “엘든! 어서 와! ……어?”

       

       그의 옆에 서있는 한 개의 어여쁜 실루엣 탓이었다.

       자신과 같이 붉은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

       늘 딱딱한 기사용 정복만 입고 있던 레이첼의 드레스 차림이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게다가, 꽁지를 묶고 다니던 머리도 풀어헤쳤다.

       평소와 달라진 여성스러운 모습.

       그것을 본 아리엘은 남사스럽다 여긴 드레스를 입은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영애님.”

       

       그리고 엘든의 옆에 딱 붙어선 채, 제게 인사를 건네는 레이첼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붙어선 둘의 모습이 위화감 하나 없이 너무도 잘 어울려 그런 것일까.

       자신과 똑같은 붉은빛 드레스를 입어서 그럴까.

       왜인지 모를 질투심이 드는 건 참으로 나쁘고 못된 마음이리라 여긴 아리엘이 환히 웃으며 맞이했다.

       

       “어서 와요. 레이첼 경.”

       

       그렇게.

       

       파티가 시작을 알려왔다.

       

       

       

       **

       

       

       

       파티장의 원형 테이블에 정확히 120도 각도로 나뉘어 삼등분해 앉은 아리엘과 엘든과 레이첼이었다.

       

       “이렇게 초대해줘서 고마워. 아리엘.”

       “히히. 당연히 해야지.”

       “드레스 정말 잘 어울려. 예쁘네.”

       

       후끈!

       엘든이 무심히 건넨 인사에, 아리엘의 얼굴이 화장으로조차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붉게 달아오른다.

       드레스의 상단 레이스를 괜히 매만지며 말이다.

       언제 받아봤을지 모를 여인으로써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그녀였다.

       

       “너, 너도 정복 정말 잘 어울려.”

       “그래? 다행이네. 나름 신경 좀 써봤는데.”

       

       서로에 대한 칭찬이 오갔고 잠시 후, 술과 음식들이 푸짐히 상에 오른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훑어보던 엘든이 다소 놀란 얼굴로 아리엘에게 물었다.

       

       “몬스터 요리도 있네?”

       “아. 네가 좋아하니까. 준비해봤어.”

       

       주변에 시종들의 눈과 귀만 없었다면 ‘먹어보니 맛있더라’라고 얘기했을 아리엘이었다.

       그 말을 삼켜낸 아리엘이 술잔을 들었다.

       짙은 보랏빛의 와인이 든 잔이었다.

       파티의 주인이 먼저 건배잔을 들어야 한다는 전속시녀의 가르침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자, 건배 할까?”

       “좋지.”

       

       테이블이 넓어 잔을 부딪힐 수 없었고, 서로 잔을 얼굴 정도까지 드는 것으로써 건배를 했다.

       꿀꺽꿀꺽.

       엘든과 레이첼이 거리낌 없이 와인을 마신다.

       아리엘은 잔 속의 액체를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린다.

       사실, 술이란 거 입에 대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술 마실 줄 안다던 볼멘소리는 무엇인지 모를 조급함이 빚어낸 소소한 반발이었었다.

       

       탁.

       

       잔이 하나씩 테이블 위로 내려졌고, 레이첼의 잔이 비워진 것을 본 아리엘이 결심한 듯 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금 피어오른 왠지 모를 조급함에, 아리엘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와인을 마신다.

       

       꼴깍.

       

       꼴깍.

       

       ‘음?’

       

       한데, 두 눈이 뜨였다.

       목 넘김이 나쁘지가 않다.

       난생 처음 먹어본 몬스터 요리가 맛이 있었듯, 처음 마셔본 와인도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맛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처음 맛본 달콤 쌉싸름한 맛이 뭔가 싫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게.

       

       탁.

       

       “후아……. 뭐야. 괘, 괜찮네…?”

       

       입 안 가득 퍼지는 진한 알코올의 향을 날숨과 함께 뱉어낸 아리엘이 텅빈 잔을 내렸다.

       그리곤 뿌듯한 눈으로 텅빈 잔을 보며 생각했다.

       

       ‘오호. 나, 제법 술을 잘… 마실지도?’

       

       나도 술 마실 줄 안다며 해낸 볼멘소리가 반발이 빚은 허풍만은 아니었겠구나 싶은 아리엘.

       

       잠시 후.

       

       

       “흐헿, 취한당.”

       

       

       그녀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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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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