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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아니, 당신이 여기서 왜 나오냐고!’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강소영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원우님.”

     

    “아, 네…. 안녕하세요.”

     

    리무진에서 내리며 내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강소영. 하지만 미간의 주름을 볼 때 이건 뭔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보이던 모습이다.

     

    짧은 시간이었다지만, 강소영에게 지옥 같은 훈련을 받으면서 눈치를 보다 보니 이제는 기분이 어떤지 정도는 확실히 눈에 보였다.

     

    “원우님….”

     

    작게 날 부르는 목소리가 리무진에서 들려오더니, 수정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리무진에서 내렸다.

     

    어깨가 드러나는 새하얀 원피스에 작은 해바라기가 포인트처럼 박혀 있는 챙이 넓은 큰 모자를 쓴 청순한 모습.

     

    누가 봐도 여름 휴가와 바다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의상이었고, 벚꽃을 보러 갔을 때보다 발랄함은 조금 떨어질 수 있지만, 청순함이 더 부각 된 느낌이 들었다.

    모 이온 음료 광고에 나와도 손색없을 거 같은 밝은 의상을 입은 수정이지만, 표정은 굉장히 어두웠다.

     

    ‘이 정도면 진짜 누군가 날 억까하는 것이 분명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기가 막힌 상황에 어찌 된 것인지 묻기로 했다.

     

    “수정아,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그…, 그게… 말이죠.”

     

    평소의 수정이답지 않게 우물쭈물하자, 옆에서 실려있던 짐을 다 내린 강소영이 날 보며 말했다.

     

    “아가씨가 큰 착각을 하셨더군요. 전 휴가를 다녀오자고 했지, 단둘이 보낸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아무리 연인이라지만 1박 2일로 보낼 수는 없죠. 예전의 일도 있고. 그렇지 않나요, 원우님?”

     

    “아, 그렇죠….”

     

    더운 날씨에도 내게 한기를 잔뜩 풀풀 풍기며 말하는 강소영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

     

    그리고 슬쩍 수정이를 바라보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실수했음을 재확인시켜줬다.

     

    결론은 수정이가 착각해서 단둘이 여행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렇게 끝나게 되면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옆에 있는 강소영이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몰래 치맥 사건 이후로 언제든지 수정이의 몸을 노리는 문란하고 음탕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면서 나에 대한 신뢰도가 폭락장의 주식처럼 확 떨어졌다.

     

    그런데 단둘이 여행을 간다고 하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강소영의 입장에선 또 한 번의 배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수정이가 그렇다니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간 거라 억울함이 가득하지만.

     

    [신호역행 기차 탑승객분들께서는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가 타야 할 기차에 대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강소영은 날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휴가 끝나고 이야기하죠. 즐거운 마음이 괜히 퇴색될 수 있으니.”

     

    그렇게 말하고는 강소영은 몸을 돌려 여행용 캐리어 가방 2개를 끌고 앞장서서 걸었다. 수정이 또한 내게 미안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헤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요? 그냥 가서 재밌게 놀아요.”

     

    “그렇긴 해. 뭐가 됐든 수정이랑 첫 여행 가는 거니까.”

     

    아쉬운 마음은 잠시 접고 수정이의 의견에 동의하며 옆에 세워뒀던 가방을 들쳐메고는 기차를 타기 위해 움직였다.

     

    *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빠르게 갈 수 있는 고속 열차가 아닌 예전부터 있었던 일반 열차를 탔다.

     

    수정이가 나와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인데, 고속 열차를 타게 되면 자주 타고 다니던 비행기를 타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적극적으로 주장해 타게 되었다.

     

    덕분에 오래된 열차들 특유의 조금씩 덜컹거리는 승차감과 기차 소리에 수정이는 만족해하는 얼굴이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아예 안 보이네.”

     

    평일이다 보니 사람이 없는 건가 싶었는데 내 옆에 있는 수정이와 그나마 신경 써준다고 마주 앉은 좌석이 아닌 뒷좌석에 앉은 강소영을 빼고는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 저희가 있는 칸을 포함해 양옆의 열차 2칸까지 몽땅 다 빌렸습니다.”

     

    “그…그랬군요…, 하하.”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강소영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수정이의 경호는 강소영이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어 이러한 조치를 한 사람 또한 강소영이었을 거다.

     

    ‘굳이 3칸이나 빌리 다니. 씀씀이가 큰 편인 건지 아니면 그만큼 걱정이 큰 건지.’

     

    적어도 수정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만큼은 굉장히 진심인 사람이다.

     

    “맞다. 원우님 우리 가자마자 수영하고 놀아요.”

     

    내 어깨에 붙어 있던 얼굴을 떨어뜨리더니 올려다보며 수정이가 말했다.

     

    “지금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바닷물은 차지 않을까?”

     

    “에이, 실내 수영장이 다 있지요. 그러려고 제가 미리 수영복까지 다 챙겨왔어요!”

     

    “수영복? 난 아무것도 안 챙겨왔는데. 미리 말해주지.”

     

    수영장이라고는 수영 배우려고 예전에 갔던 거 말고는 경험이 없다 보니 수영 모자를 쓰고 삼각 수영복 바지를 입었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에이, 원우님은 그냥 편하게 아무거나 입으셔도 되세요. 개인 수영장이니까. 제가 입은 거 예쁜지 안 예쁜지만 보시고 말씀만 해주시면 되세요, 후후.”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짓는 수정이의 그 말에 여러 종류의 수영복을 입고 뇌쇄적인 매력을 뿜어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이 갔다.

     

    “크흠.”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에 정신이 들었고, 슬쩍 돌아보자 강소영의 불을 뿜는 듯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여자 두 명이 서로 다른 의미로 날 잡아먹으려고 드니 중간에 끼인 입장에서는 눈치 보느라 기분 좋아야 할 휴가인데도 고구마를 잔뜩 먹은 기분이다.

     

    “어?”

     

    그때 멀리서 문이 열리더니 간식을 잔뜩 실은 카트가 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정이 또한 발견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와! 진짜 저렇게 기차 내부에 다니면서 파는군요? 인터넷에서 보고 꼭 사 먹어보고 싶었는데.”

     

    “그래? 그냥 편의점이나 그런 곳에서 파는 거랑 똑같은데.”

     

    그 말에 수정이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까닥 흔들며 말했다.

     

    “어디서 누군가와 먹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원우님이랑 같이 이런 걸 먹었다며 추억하고 나중에 결혼해서 서로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아이를 낳았을 때 아빠랑 엄마가 이랬어 하고 설명하며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는 거고요.”

     

    간식 하나에 이미 머나먼 미래까지 확정된 듯 말하며 흥분해서 설명하는 수정이를 보며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내가 없는 미래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질투할지언정 수정이의 옆자리에 내가 항상 있다고 상정하고 있다.

     

    가끔 이런 진심 어린 이야기를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말하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받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분이 좋아진다.

     

    “제 말 듣고 계신 가요, 원우님?”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수정이가 채근하며 말했다.

     

    “응, 듣고 있어. 알겠으니 카트 오면 먹고 싶은 거 사자.”

     

    “네!”

     

    어차피 손님이라고는 우리들뿐이라 빠르게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간식 카트.

     

    다양한 종류의 과자들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빵 종류, 음료수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압축 포장된 오징어나 육포도 맛있어 보이긴 했지만, 아침을 먹고 와서인지 딱히 생각이 없어 단지 모양의 바나나 우유만 하나 집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서 강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 드실래요? 제가 사드릴게요. 경호도 좋지만, 여행이니까 뭐라도 드셔야죠.”

     

    내 제안에 뒤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강소영은 말없이 있다가 몸을 움직여 오징어와 육포, 캔커피를 골랐다.

     

    옆에서 과자를 유심히 보며 고심하던 수정이가 날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참, 우리 원우님은 자상하고 다른 사람을 잘 챙긴다니까.”

     

    “같이 가는데 우리만 먹기는 좀 그렇잖아?”

     

    “맞아요, 맞아. 근데 자꾸 그렇게 챙기고 그러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좀 그렇네?”

     

    넌지시 들려오는 날카로운 한 마디에 우리 둘 다 움찔하며 수정이의 눈치를 살폈다.

     

    이전의 일이 떠올라 큰일 났다 싶었지만, 다행히도 수정이는 웃으며 말했다.

     

    “에이, 농담이에요. 농담. 이거 맛있겠다. 원우님 잘 먹을게요!”

     

    진담 같은 농담을 던진 후 수정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아이 같은 얼굴로 산 것들을 허벅지에 올려놨다.

     

    일단 알 수 없는 위기는 넘긴 듯 보이지만, 방심하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든다.

     

    ‘아까까지는 달달함에 감격했다가 이제는 눈치 보고. 미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산을 끝내고 앉았을 때, 갑자기 수정이의 손이 쭉 하고 뻗더니 내 입에 삶은 달걀을 넣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듯 아무 생각 받은 뒤 씹었고, 고소한 맛과 더불어 입안을 가득 메우는 퍽퍽함이 따라왔다.

     

    “저희보다 윗세대 어른들은 이렇게 기차에서 삶은 달걀을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여기.”

     

    입안이 퍽퍽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사이다를 건네는 수정이.

    입을 달래기 위해 마시자, 가뭄에 단비가 뿌려지는 것처럼 입안을 적시면서도 단맛이 퍼지면서 깔끔하게 마무리된 느낌을 받았다.

     

    이게 음식의 조합이라는 건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익숙하게 먹던 것들인데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런 내 표정에 만족한 듯 수정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리고 저 이것도 해보고 싶었어요!”

     

    수정이가 이번에 고른 것은 가느다란 초코가 발라진 막대기 과자였다. 11월 11일을 기념일로 만드는 말도 안 되는 상술이 들어간 그 과자.

     

    과거에 한유라가 그 날을 잊었다고 난리 쳤던 기억이 있어서 절대 먹지 않는 과자 중 하나다.

     

    수정이는 조심스레 포장을 뜯더니 하나를 꺼내 자신의 입에 물었다. 그리고 수정이의 붉은 눈이 반달을 그리고 웃으며 날 바라봤다.

     

    단번에 뭘 원하는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로의 양 끝에서 과자를 물고 먹으면서 최대한 거리가 작게 나올수록 이기는 게임.

     

    주로 남녀를 커플로 만들거나 아니면 커플들의 애정을 확인해보는 방법으로 자주 나왔었다.

     

    “빨리요, 원우님. 저 꼭 해보고 싶었어요.”

     

    약간 부정확한 발음으로 과자를 문 채 재촉하는 수정이. 나도 단둘이었다면 편하게 했을 거 같은데 강소영이 신경 쓰였다.

     

    슬쩍 눈치를 살피자, 의외로 강소영은 곁눈질로 우리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별달리 제지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이 정도는 연인이니 봐준다 이건가? 기준선이 정말 애매하다 애매해.’

     

    그렇게 속으로 불만을 쏟아내고는 기다리고 있는 수정이의 요청대로 과자를 물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어? 으응.”

     

    수정이는 기다렸다는 듯 조금씩 과자를 천천히 부서지지 않게 갉아먹으며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 현재 기차 내부에는 간식 카트가 없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신호역 또한 가상의 역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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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irl I Saved Came Back As An S-rank Hunter

The Girl I Saved Came Back As An S-rank Hunter

내가 구한 그녀가 S급 헌터로 돌아왔다
Score 3.4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s soon as she became an S-rank Hunter, my childhood friend and lover said we should break up. As I was hurting, another S-rank girl came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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