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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수첩이요?”

     

    나는 무심코 아셀라의 질문을 재확인했다.

     

    그녀는 내 태도를 수상쩍게 여겼는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상한 문장들을 수도 없이 적어놨잖아. 멸망이니 죽음이니, 위에 선을 그어서 지워놓기도 했고.”

     

    “아니, 그걸 보셨어요?”

     

    “간수를 잘 했어야지.”

     

    이건 조금 낭패였다.

     

    수첩에는 아셀라의 신체 정보나 제약식도 적혀있기에 항상 몸에 붙여 지니고 있고 절대 떨어트리는 일이 없다.

     

    다음 권으로 넘겨야 하면 필요한 정보만 옮기고 이전 권은 불태우고 있다.

     

     

    아셀라가 얘기한 건 배드엔딩 리스트겠지.

     

    그러고 보면 적었던 적이 있었다.

     

    상태창은 엔딩 이름만 출력하고 내용까지 설명하진 않는다.

     

    각 엔딩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나 기억을 되살리고, 현재의 사건과 연관짓기 위해 정리하던 때가 있었다.

     

    ‘그걸 또 언제 훔쳐봤어.’

     

    기분은 나쁘지만 그걸 따질 때는 아니다.

     

    아셀라가 구체적인 내용을 알게 되면 그 자체가 영감이 되어 배드엔딩으로 직행하게 되지 않을까.

     

    그 가능성에 생각이 도달하니 내가 얼마나 방심했는지 깨달았다.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정확한 문장을 읽지는 않은 것 같다.

     

    아직 무마할 수 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셀라에게 대답했다.

     

    “아, 그 메모를 보고 악몽을 적어놨나 생각하셨군요.”

     

    “그럼 뭔데?”

     

    “요즘 즐겨 보는 소설이 있습니다. 곧 완결이 다가오는데, 결말이 어떻게 날지 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거든요. 제 나름대로 상상을 해봤는데 이야기는 익숙지 않아서 한참 고민해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소설책 이야기였다고?”

     

    “예. 두 가문의 전쟁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주인공이 죽거나 세상이 멸망하는 결말일 듯해요.”

     

    마침 심심풀이로 봤던 소설 중에 끼워 맞출 게 있긴 했다.

     

    이걸로 밀고 가는 수밖에.

     

    아셀라는 살짝 의심쩍은지 눈을 고양이처럼 얇게 떴다.

     

    “공자가 소설을 좋아하는지 몰랐네.”

     

    “생각보다 볼만합니다. 관심 있으시면 몇 권 추천해 드릴게요.”

     

    “그럴 시간 없어. 나 참, 무슨 소설 이야기를 그렇게 잔뜩 적어놨담. 뭐였더라, 마력이 폭주하느니 어쩌느니.”

     

    “하하, 그런 내용도 써놨었나요. 기억도 잘 나지 않….”

     

    변명하던 중에 아셀라와 눈이 맞았다.

     

    그녀와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였을까, 그녀의 입으로 직접 배드엔딩 내용에 대해 들어서였을까.

     

     

    ―비켜! 거기서 비키거라! 고트베르크!!

     

    ―아아, 왜, 어째서 짐의 마력회로가…!

     

     

    눈앞에서 아셀라가 날뛴다. 그녀의 온몸에 새겨진 마력회로가 미친 듯 번쩍인다.

    곧 아셀라에게서 주체할 수 없이 마나가 흘러나오더니 시야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콰앙, 귀가 멍멍해지는 폭발음이 들렸다.

    죽음의 감각이 생생하게 손끝에서 휘몰아치며 눈앞이 깜빡였다.

     

    “웁.”

     

    그만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공자?”

     

    아셀라의 당황스러운 목소리.

     

    나는 입을 틀어막고 스프링처럼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셀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주치의가 자기보다 먼저 쓰러지면 내가 환자라도 불안해서 몸을 못 맡긴다.

     

    바로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표현했다.

     

    “춤을 너무 오래 췄나 봅니다. 잠깐 현기증이 났네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깜짝 놀랐잖아.”

     

    아셀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지간히 몸이 허약하구나. 그래서 어떻게 황실에서 버티려고 그래.”

     

    “하하, 정진하겠습니다.”

     

    “후우… …진짜 괜찮아?”

     

    “그럼요. 현기증은 일시적인 증상이에요. 휴식을 취하면 금방 나아집니다.”

     

    “일단 들어가자.”

     

    아셀라와 나는 짧은 무도회를 마치고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

     

     

     

    회장의 음악은 부드러운 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조명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셀라의 옆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니 상태도 괜찮아져서 남은 파티도 마저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귀족들은 인사를 나누는 단계는 넘어갔고,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주류와 함께 사담을 나누고 있다.

     

    ‘어디.’

     

    라우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대공녀와 깔깔댄다. 주변에 영식과 영애는 약 스무 명. 저쪽이 사교계 에이스 그룹이겠고.

     

    부지런히 늙은이들 비위 맞추며 영업 다니는 애도 보이고, 구석에 찌그러져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애들도 있고.

     

    사회가 어딜 가든 똑같지 싶다.

     

    “공자, 나는 다시 귀족을 상대해야 해. 옆에 있을 수 있겠어?”

     

    “문제없습니다. 제가 갑자기 없어지면 그 그림이 더 이상하잖아요.”

     

    “…그래.”

     

    어째 아셀라가 묘하게 친절한 느낌이다.

     

    친절하다 해도 화를 내지 않는 것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병자에게까지 독하게 굴지는 않는 걸까.

     

    나중에 휴가 내고 싶을 때 꾀병을 써먹어야겠다.

     

    “후우.”

     

    아셀라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표정이 다시금 카리스마 넘치는 황가의 일족으로 돌아왔다.

     

     

    멀리서 서부 대공이 아셀라를 발견하고 호위기사와 함께 다가온다.

     

    오늘의 주 타겟이다.

     

    “아셀라 황녀님, 존안을 뵙습니다.”

     

    대공이 먼저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중앙 협곡 방어전의 승리를 축하하네, 슈바르츠슈바이크 공작.”

     

    역시 아셀라다. 초면에 바로 반말로 상대를 제압한다.

     

    물론 아셀라가 계급이 더 높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공작이고 전쟁영웅이기에 예를 갖출 법도 하건만. 거리낌이 없다.

     

    눈치를 보니 공작은 오히려 아셀라의 당당한 태도를 높게 산 듯했다. 그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열렬한 치하에 황송할 따름입니다.”

     

    “귀공 덕분에 1억 제국민이 외적의 침입에서 자유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네.”

     

    “제국의 깃발이 용맹하게 휘날리는 은덕 덕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아셀라가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공작, 이번 전투에서 부상으로 은퇴한 기사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사교계에서 모든 대화는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이 있다.

     

    계급상으로는 황족인 아셀라가 공작보다 위일지 모르지만, 공작의 가문도 황실의 궁 하나 급은 될 정도로 힘이 강하다.

     

    반면 아셀라의 월광궁은 승계권자 다섯 중 가장 작은 파벌.

     

    심지어 이곳은 그가 주인공인 파티장이다.

    사실상 우위는 공작에게 있다.

     

    때문에 아셀라는 그를 포섭하기 위해 다른 귀족들은 꺼내지 않았을 독창적인 주제를 제시했다.

     

    공작은 아셀라가 꺼낸 주제에서 이 대화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지 흥미를 보였다.

     

    “은퇴자 말입니까? 치명적인 부상으로 치유할 수 없게 된 기사라면 백이십입니다.”

     

    “베너렛 기사가 서른둘이나 편성된 규모 있는 전투 아니었는가. 그만한 피해만으로 선방한 사실 또한 귀공의 공적일세.”

     

    여기서 여신의 가호나 황제의 은덕을 언급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셀라는 굳이 공작을 집어 치하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이 공작과 친분을 쌓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

     

    전투의 상세한 내용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어필해 자신의 능력도 증명했다.

     

    “제국을 위해 국정을 운영하시는 황녀님의 은덕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공작은 아셀라와 초면임에도 굳이 공을 양보했다. 그가 아셀라의 악수를 받은 것이다.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문장은 예의범절로 포장하되 이면에 뜻을 담아 한 단어도 낭비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화술은 어렵다.

     

     

    공작이 호의를 보였으니 다시 아셀라의 차례가 됐다.

     

    말로만 오고 가는 친분은 정치계에 없다.

     

    서로 득실을 챙겨주는 이해관계가 전제되어야 성립한다.

     

    아셀라는 공작에게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속 빈 강정이 된다.

     

    “백이십의 은퇴자를 열로 줄일 수 있었다면 공작령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로군.”

     

    공작이 입꼬리를 올리며 관심을 보인다.

     

     

    지금 아셀라는 두 가지를 제시했다.

     

    공작령의 병력을 강화할 수단을 거래하고 싶다는 의사가 하나, 그리고 기사단의 규모 증설 허가가 둘이다.

     

    공작도 어쨌든 소유할 수 있는 군대의 규모는 황실의 제약을 받는다.

     

    행여나 공국으로 독립하면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니까.

     

    아셀라는 공작에게 가장 맛있는 먹이를 제안한 것이다.

     

    “은퇴자를 줄일 방법이라 하시면?”

     

    구체적인 수단을 물어보는 공작.

     

    아셀라가 턱을 치켜올리고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페니실린이라고 들어보았는가?”

     

    아, 처음부터 나로 영업할 생각이었구나.

     

     

     

    결과적으로 공작은 항생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월광궁과 협력체제를 구축할 단초를 만들게 됐다.

     

    작은 부상으로도 파상풍 등의 추가감염으로 팔다리를 절단하게 되는 현실이다.

     

    항생제는 그런 사태를 방지하는, 전장에서 없어선 안될 필수 의료품이다.

     

    아셀라가 영업을 제대로 해냈다.

     

    그녀는 고트베르크 가문에서 사업이 시작하면 양산될 항생제를 미끼로 공작을 낚았다.

     

    물론 대규모 기사단이 쓸 정도로 양산을 하려면 사업이 본격화 되어야 하고 몇 년은 걸리겠지만.

     

    큰 전쟁이 있는 시대도 아니니 공작가도 그 정도는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다.

     

    “이 파티는 분명 여신님이 제게 내려주신 축복임이 틀림없군요.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귀인을 뵈었으니 말입니다.”

     

    공작은 아셀라와 교류에서 상당히 만족한 듯했다.

     

    공작령이 커지면 공국으로 독립할 수도 있고, 승계권자 황가 직통 라인도 하나 더 생겼으니 기쁠 수밖에.

     

    물론 아셀라가 즉위하면 순식간에 그의 숨통을 조여버리리란 사실을 그는 모르겠지.

     

    첫 사교계 자리부터 무려 공작가와 대등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다니, 역시 아셀라는 다르긴 다르다.

     

    “축배를 들고 싶군요. 거기.”

     

    공작이 적당히 신호하니 근처를 돌아다니던 시종이 샴페인이 담긴 잔을 가져왔다.

     

    아셀라 역시 공작과 함께 잔을 들었다.

     

    가능하면 알코올은 말리고 싶지만 낮은 도수고, 기분이 좋아 보이니 한 잔 정도는 봐줄까.

     

    생각하던 때였다.

     

     

    [No. 040 : 맹독함정 19% → 86%]

    [No. 101 : 마력폭주 4% → 100%]

     

     

    상태창의 숫자를 본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셀라가 푼 독 함정에 죽었던 기억이 플래시백 되기도 전에.

     

    ―쨍그랑!

     

    나는 아셀라가 입까지 거의 가져갔던 잔을 쳐내 떨어트린 후였다.

     

    “공자?”

     

    “드시면 안 됩니다, 황녀님.”

     

    ―쿵!

     

    몸이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비명을 지른다.

     

    고개를 돌리니 공작이 컥컥대며 바닥을 구르고 있다.

     

    성질 급하게도 벌써 마셔버렸다.

     

    “진단.”

     

     

    [부상 상태 : 신경작용 중독]

     

     

    목표는 공작이었나, 아셀라였나.

    아니면 둘 다?

     

    독살하려 했다.

     

    우선 치료부터.

     

    나는 정장 외투의 단추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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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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