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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서커스단의 명성이 1 떨어졌습니다.]

         

         

       관람석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얼마 안 있어 메시지가 떴다.

       아나이스가 우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재빨리 커튼을 쳤었는데, 그동안 사람들이 또 우리를 두고 수군댔던 모양이다.

         

       이러다 이거 완전 바닥 치는 거 아닐까.

         

       현재 서커스단의 명성은 21.

       악스빌에서 한 공연에 더해 엘라가 잠시나마 장미 풍차의 무대에 올랐던 덕분에 40까지 올랐던 명성은 이제 반 토막이 나 있었다.

       고작 2주 사이에 20이나 떨어진 것이다.

         

       명성 50 보상이 뭘까 기다리던 시절이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고마워요, 단장님.”

         

       아나이스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괴롭고 여전히 아픈 그런 표정이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홀가분해 보였다.

         

       “겨우 이런 것 정도로 그런 소리를 듣기 민망하군요.”

       “아뇨. 이것 말고요. 저를 위로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우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자기가 차였던 기억 때문에 철벽 뒤에 몸을 숨기고 벌벌 떨던 겁쟁이.

       그놈은 그동안 벽 아래에서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다 지쳐버린 상대에게 솔직하게 사과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며 사랑을 고백할 때도.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섭섭함을 토로할 때도

       그저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고 가볍게 두드려주는 것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묻어 있는 물기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것이 내 최대의 용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고맙다고?

       위로의 말을 안 한 것이?

         

       나는 그녀에게 또 배려를 받는 걸까.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진심이었다.

         

       나는 나를 찬 상대가 나를 동정 어린 눈길로 다독여 주는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아.

       가슴에서 무언가 혐오스러운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건 분명 엄청 비참할 것이다.

       

       그렇게 안 해줘서 고맙다는 건가.

         

       다행이었다.

       내가 한 행동이 더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어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사의 인사를 받는 건 과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맥락 없고 성의 없는 사과였다.

       더군다나 웃고 있기까지 하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밉지 않을까.

         

       내 우려와 달리 그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안에 있는 걸 쏟고 나니 차라리 후련하네요.”

       “……정말입니까?”

         

       내 조심스러운 접근에 아나이스는 팔짱을 끼고는 나를 노려봤다.

       입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톡 쏘아붙였다.

         

       “당연히 안 괜찮죠! 그럼 차인 사람 기분이 좋을까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사과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그냥 지금까지처럼 지내요. 후원자 대 서커스 단장의 관계로 말이죠. 아,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유라크네 씨랑은……아무 관계 아니죠?”

         

       조심스럽게 건네오는 그녀의 물음.

         

       설마 그런 걸 의심했단 말인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그냥 단원일 뿐입니다.”

         

       나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후후, 그래요? 그쪽도 힘들겠군요. 그거 알아요? 당신 정말 재수 없는 인간이에요.”

         

       갑자기?

       내가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웃고 있자, 아나이스는 코웃음을 쳤다.

         

       “흥. 됐어요. 됐어. 이제 다 끝난 일인데……. 어쨌든 예정대로 내일 기자회견을 열어서 발표할 거예요. 이사회 노인네들의 말대로 단장님은 ‘병을 치료해준 은인’으로 1달간의 여행은 ‘후속 치료를 위해 함께 했던 것’ 정도면 충분하겠죠. 아, 내친김에 오늘 할까요? 개막식 일정에 서커스 단장의 선서와 함께 후원자 소개 시간이 있던데.”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말을 쏟아냈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나와 감정적으로 연결된 부분에는 아직도 상처 입은 짐승이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만날 때마다 재빨리 지나치려는 것이다. 놈에게 물리지 않게.

       물리면 아프니까.

         

       실연을 당해본 사람으로서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처럼 말이죠?”

       “네. 아, 달라지는 건 있겠네요. 이제 장부 점검을 꼼꼼히 할 거예요. 그동안 단장님을 너무 몰아붙이기 싫어서 대강 넘겼거든요.”

         

       그녀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대충 한 거였다고?

         

       그동안 장부에서 뭔가 쓸데없어 보이는 항목들(거기에는 통닭을 접다가 우몬이 찢어먹은 십여 장의 비단 수건에 대한 비용 청구도 있었다)에 지출이 발생하면, 내가 대표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항목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서 지적하던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기서 더 어떻게 꼼꼼하게 살핀다는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제 엘라가 요청하는 대로 족족 돈을 주고, 거스름돈은 대충 용돈으로 가지라는 방식을 바꿔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갑자기 홀 전체가 어두워졌다.

         

       “이제 시작하려는 모양이네요.”

       “자작님 그런데 아까 하신…….”

       “이제 사과는 됐다니까요. 단장님에게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요. 아직 개막식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세요. 자꾸 그러면 후원을 철회할 거예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을 끊고는 무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사과하려는 게 아니라 장부 점검을 좀 봐달라는 소리를 하는 거였는데…….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도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장미 풍차 카바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장미 풍차의 경영자 브왈레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는 간략하게 인사를 하고, 축제에 협력해 준 명사들을 무대 위로 초청했다.

         

       루즈의 시장, 부시장, 소유주 무스탕 후작, 루즈 행정위원회의 사람들, 인근 귀족들, 루즈 기마경찰대의 대령, 루즈 경찰서의 부서장(어째서인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감독 유그 마로이네 등이 올라와 짧게 인사하고 내려갔다.

         

       브왈레는 이어서 서커스 그랑프리가 어떻게 다시 발족할 수 있었는지 설명했다.

         

       이는 게임에 나오지 않은 설정이었다.

       TT1에서는 그냥 세계 최대의 공연예술제라고만 소개되었고, TT2부터는 이후의 사건이 배경이라 그랑프리에 대해서는 더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게임의 뒷얘기를 듣는다는 심정으로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대회로부터 17년이 지나서 열린 이번 대회는 동부의 여섯 나라가 협력할 수 있기에 재개되었습니다. 키예프, 샤를로티아, 델로스, 카스티유, 포스투리카, 베가스. 여섯 나라의 대표분들에게 박수를!”

         

       또 정장을 입은 나이 든 사람들이 한 명씩 올라와 준비된 개회사를 꺼냈다.

       그 내용은 온갖 수사가 잔뜩 들어가 있었고 그 내용이나 구성은 상당히 지루했다.

         

       아무리 서커스 그랑프리라 해도 이런 면은 현실의 축제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힘 있는 사람들의 협력을 얻는 대가로, 정치 인사들의 눈도장 찍는 용도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브왈레는 서커스 그랑프리의 규칙에 대한 설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가 신호를 주자 그의 뒤로 마법사가 만든 선명한 환상이 떠올랐다.

         

       옆으로 넓적한 반원 형태의 섬이 구름의 바다를 가로지르며 날고 있었다.

       그 위에는 상아색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살짝 탄성을 내질렀다.

         

       너무나 익숙하고 반가운 곳이었다.

         

       하늘도시 히포드롬.

       TT1의 배경이 되는 무대였다.

         

       브왈레가 다음 신호를 주자 환상이 점점 확대되었다.

       도시의 어느 지점을 향하여.

         

       나는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확대의 소실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히포드롬의 구조를 완벽히 알고 있는 덕분이기도 했고, 대회 소개의 맥락 상 그곳을 조명할 수밖에 없었다.

         

       지름 1.5km의 매끈한 원반이 도시의 북쪽 끝에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히포드롬은 본섬 외에도 주변의 여러 부속 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그중 하나였다.

         

       내 입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이런 방식으로 마주하니 반가웠다.

         

       그곳은 서커스 그랑프리의 본선이 열리는 무대였다.

       TT1의 최종보스 전이 치러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저곳이 바로 TT0 메인 퀘스트의 최종 종착지였다.

         

       공중극장 원더스테이지.

         

       “17년의 아픔을 딛고 원더스테이지가 다시 개방되었습니다! 2년 3개월 뒤에 저기서 서커스 그랑프리의 본선이 열리게 되지요. 본선에 오르기 위한 조건은 간단합니다. ‘별’을 7개 모을 것! 테이블 위에 있는 지도를 봐주실까요? 붉은색으로 표시된 6개의 도시가 보이시죠?”

       이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라가 설명해주었다.

         

       6개 나라 6개 도시에 있는 6대 극장에서 열리는 예선전.

       그곳에 참가하여 극장이 낸 시험을 통과하면, 그 극장으로부터 별을 하나 받을 수 있었다.

         

       2년 동안 대륙 동부를 주유하면서 6곳의 극장을 들러 시험을 치르는 것.

       그것이 바로 서커스 그랑프리의 예선전이었다.

         

       이곳 말고 다른 5개 지역에서도 현재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시차 때문에 약간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렇게 6개 극장에서 6개의 별을 얻고, 나머지 별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크리스티앙 가이드>라는 권위 있는 잡지의 평론가 집단에서 예선전이 진행되는 동안 서커스단마다 등급을 부여한다고 했다.

       별은 최소 0개에서 최대 3개.

         

       즉, 이론상 6대 극장의 시험을 모두 통과해도 <크리스티앙 가이드>에서 별을 받지 못하면, 본선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크리스티앙 가이드>에서 별을 3개 받으면, 6대 극장 중 4곳에서만 별을 받으면 됐다.

         

       물론 둘 다 일어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대회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신나서 떠들어대던 브왈레가 갑자기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 카바레의 명물, 캉캉을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추도의 시간을 갖고 지나가겠습니다.”

         

       축제의 시작에 웬 추도식을?

         

       그러나 나 말고 의문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다들 자연스레 묵념했다.

         

       “제2회 서커스 그랑프리. 우리는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이 축제를 열지 못했습니다. 엄청난 사고로 많은 동료 곡예사, 가수, 배우, 마법사, 관객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설정이 있나 보지?

       나는 기도하는 척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감았다.

         

       “17년 전, 하늘도시 히포드롬의 원더스테이지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 우리는 그 범인이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그 목적도 그 정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는 알죠. 그 저주받을 이름.”

         

       브왈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너무나 친숙한 단어였다.

         

       “검은 마도사.”

         

       원더스타인의 별명 중 하나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남겨진 국밥 님, 2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부탁하신대로 제 간식비에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박재우_119 님, 5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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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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