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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한 리디아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흡.”

       

       무표정한 얼굴로 휘두르는 대검. 검신 위를 불태우던 오러가 반달형으로 길게 쏘아진다.

       

       퍼어엉!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가 지면을 울린다. 근처에 있던 고블린들이 작은 움막 채로 날아갔다.

       

       운 좋게 살아남은 고블린이 멍하니 리디아의 모습을 바라보길래 그 미간을 향해 손목 석궁을 쏘아주었다.

       

       쐐애애액…퍽!

       

       처음 써보는 것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강한 위력. 깃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뇌를 관통당한 녀석이 그대로 쓰러진다.

       

       “…요나. 잡다한 놈들은 그냥 놔둬. 이제부터 속도 높일 테니까 따라오는 데 집중, 아니. 그냥 업혀.”

       

       “넹?”

       

       “요나가 발이 빠르긴 해도 아직 날 따라오는 건 불가능해.”

       

       “…….”

       

       조금 전의 일격을 보면 맞는 말 같아서 군말 없이 바로 업혔다.

       

       하프 비키니 아머인 탓에 거의 맨살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 다이렉트로 전해지는 따끈한 온기와 부드러운 감각. 그리고 달큰한 살 내음에 흠칫한 것도 잠시.

       

       “꽉 잡아.”

       

       그 한마디와 함께 세상이 가속했다.

       

       “끄어에에에에에!”

       

       괴성을 내지르며 반사적으로 리디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 그러면 풍압으로 자꾸 머리가 꺾일 것 같았으니까.

       

       쾅! 콰앙! 퍼억!

       

       어마무시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눈에 보이는 홉 고블린들을 향해 오러를 쏘아내고, 가로막는 녀석은 그냥 걷어차 터뜨리는 리디아.

       

       지금의 리디아는 살아 움직이는 전차나 다름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리디아의 어깨에 머리 딱 붙이고 격렬한 움직임에 격렬하게 흔들리는 가슴을 구경하는 일뿐.

       

       …개쩌는군.

       

       하지만 좋은 시간은 언제나 금방 지나간다. 나름 넓은 지역을 차지한 홉 고블린 부락이라지만, 그래봤자 고블린들이다.

       

       리디아의 진심 달리기 10초면 구석진 곳에서 중앙의 족장 집까지 달리기엔 충분하지.

       

       안에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집 전체를 날리는 게 아니라, 지붕만 날릴 생각인지 조금 위를 노려보며 자세를 잡는 리디아.

       

       그런 그녀의 어깨를 탁탁 치며 외쳤다.

       

       “리디아 님! 지붕만 날리고 들어가진 마세요!”

       

       “왜? 함정이 없진 않겠지만, 나한테 위험한 정도는 아냐.”

       

       “그게 아니라 지금 저희 한스 씨나 어쩌면 붙잡혀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남자를 구하러 가는 거잖아요?”

       

       “응.”

       

       “붙잡힌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알몸일 거 아니에요!”

       

       “…그렇지?”

       

       “리디아 님이 제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알몸을 보는 게 싫어요.”

       

       “…….”

       

       대검에 준 힘을 풀며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하는 리디아.

       

       “요나는 방금 전에 셀리 양의 알몸을 봤으면서? 심지어 전에는 레몬과 애플이라는 엘프 자매의 몸도 봤잖아. 심지어 찰싹찰싹 때리기까지 했고.”

       

       “그걸 봤어요?! 하지만 전 괜찮아요! 귀여우니까!”

       

       “…….”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문 리디아. 그런 그녀의 정수리에 볼을 부비적대며 말을 이었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당연히 도와달라고 할게요. 그래도 가능하면 그러고 싶다는 거죠. 안 될까요 리디아 님?”

       

       “…몰려오는 고블린들은 내가 막고 있을게. 그거랑은 별개로 기감을 열어둘 테니 여차하면 바로 달려들기도 할 거고.”

       

       “고마워요! 그리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선물로 제 속옷 정도는 드릴 수 있으니까요!”

       

       “필요 없어.”

       

       “네? 안 빨고 드리는 건데 정말 괜찮아요? 손수건 대용이라던가 필요하지 않나요?”

       

       “…진짜로 필요없어.”

       

       정색하며 대검을 휘두르는 리디아. 초승달 형태로 타오르는 오러가 그 큼직한 족장의 집을 반쯤 날려버렸다.

       

       퍼어엉!

       

       이를 신호 삼아 몸을 일으켰다. 리디아의 어깨에 두 발을 딛고 선 자세. 그 상태에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뒤통수에 뭔가 닿은 리디아가 순간 삐걱댔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허벅지에 힘을 주어 용수철처럼 수축되어있던 전신의 근육을 일시에 펼쳤다.

       

       탓!

       

       빠르게 비상하는 시야.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건물 내부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다른 홉 고블린의 1.5배는 될 법한 거대한 덩치를 가진 족장과 벽에 묶여있는 발가벗은 남자 둘이 보였다.

       

       한 명 더 붙잡혀 있었구만.

       

       속을 혀를 차며 다시 장전해 둔 손목 석궁을 족장을 향해 겨누었다.

       

       한창 즐기는 중이었는지, 옷을 반쯤 벗고 있는 녀석. 다시 걸치려던 가죽을 내팽개친 족장이 다급히 주변의 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순순히 무장하게 놔둘 생각은 없지만.

       

       쐐애액!

       

       빠르게 쏘아진 화살이 그대로 족장의 손등을 꿰뚫는다.

       

       “고브으으윽!”

       

       관통당한 손을 부여잡으며 괴성을 내지르는 홉 고블린 족장. 그사이에 무사히 착지하며 유니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우우웅-!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여느 때보다 격렬하게 진동하는 단검. 그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며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는 녀석이 정신을 차릴 틈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물론 족장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다친 팔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나를 견제하는 동시에, 자기 체구에 어울리는 큼직한 몽둥이를 기어이 반대 손으로 쥐는 데 성공했으니까.

       

       “키야아악! 작은 인간!! 용서 못한다 고브!!! 그대로 들어서 아랫도리가 부러질 때까지 범하겠다 고브으!!”

       

       “시꺼먼쓰. 곤란.”

       

       바닥에 몸을 바짝 붙여 슬라이딩하며 피했다. 그냥 피하기만 하면 서운하니 슬쩍 단검을 들어 머리 위로 지나가는 손목을 베어내기도 했고.

       

       푸슛!

       

       동맥을 제대로 베인 건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피가 전신을 끈적하게 적신다. 다행히 눈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니 이대로 다리 사이를 지나쳐 아킬레스건을 베어버리면….

       

       “꺼, 으허억…?!”

       

       몽둥이를 들어 올리려던 홉 고블린 족장이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쿵!

       

       “…엥?”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회 같으니 쓰러진 녀석의 옆구리에 단검을 박고 주욱 그었다.

       

       우르르 쏟아지는 내장. 하지만 여전히 녀석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뭔가 싶어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 그래도 추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입에서는 거품을 물고, 눈은 까뒤집은 모양새.

       

       마치 극독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은…….

       

       “아.”

       

       손에 들린 유니콘 단검을 바라보았다.

       

       “너니?”

       

       우웅-!

       

       긍정하듯 한차례 진동하더니 그대로 잠잠해지는 녀석. 사악하면서 비처녀인 존재를 세상에서 하나 지울 수 있어 만족한 모양이다.

       

       “무기가 너무 좋아도 문제겠는데?”

       

       지금껏 잡은 홉 고블린은 전부 목을 베거나, 심장을 찔러 죽인 터라 잘 몰랐으나…이래서야 제대로 싸울 기회조차 없을 터. 당연히 실력이 늘 일도 없을 것이다.

       

       “아니지. 애초에 정면에서 싸우는 기술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

       

       스펙이 허접 조루 그 자체인데 뭘 정정당당 검격을 나누겠는가. 뒤에서 한방에 푹찍 할 수 있으면 그래야지.

       

       나아가야 할 길이 조금 보인 것 같아 흐뭇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잡혀있는 남자들에게로 향했다.

       

       갈무리야 조금 나중에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오우.”

       

       가까이서 본 남자 포로들의 상태는 꽤 보기 힘든 것이었다.

       

       여기저기 얻어맞은 흔적은 물론, 별로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액체에 범벅이 된 몸. 무슨 약물에 당한 건지, 정신이 꺾여 그런 건지 알 수 없는 풀어진 눈.

       

       음. 그래도 목숨이 위험한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인가?

       

       포로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기. 한스 씨가 누구죠?”

       

       “……예?”

       “…….”

       

       한 명은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고, 나머지 하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여전히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반응이 있는 쪽을 향해 단검을 겨누었다.

       

       “아하? 그쪽이 한스 씨군요?”

       

       “히익!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셀리 씨가 보내서 왔으니 안심하세요!”

       

       “셀리…?”

       

       단검의 날카로움에 고개를 휘휘 젓던 한스가 셀리의 이름에 멈칫했다.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크게 떠진 그의 눈동자에 키득이며 단검을 휘둘렀다.

       

       “흐아아악!”

       

       카앙!

       

       “……?”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한스가 조심스레 눈을 뜨자 그곳에 보이는 건 부러진 족쇄였다.

       

       한쪽 다리가 족쇄에 묶여 벽에 고정되어 있더라고. 그래서 일단 구속부터 풀어준 거다.

       

       “이제 괜찮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분도 풀어드려야 하니까.”

       

       “엇. 네. 네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한스. 옆에 있는 사람의 족쇄도 풀어주었으나,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분 왜 이러는지 아세요?”

       

       “아, 아마 족장이 먹인 미약 때문에 그럴 겁니다. 환각 증세가 심해서….”

       

       “쓰읍. 어쩔 수 없네요. 그럼 힘들겠지만 한스 씨가 저분을 업고 와주실 수 있나요? 아무래도 저는 아직 몸이 작아서 어른을 업긴 힘들거든요.”

       

       “그으…사실은 저도 일어설 수 없게 되어버려서….”

       

       조심스레 자신의 팔과 다리를 보여주는 한스. 그의 손목과 발목에는 아직 덜 아문 깊은 상처가 있었다.

       

       “힘줄을 잘렸나요?”

       

       “…네.”

       

       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일단 이거라도 걸치세요.”

       

       족장의 집에 있던 가죽으로 된 물건을 죄다 뜯어와 두 남자의 몸에 둘둘 말았다.

       

       “도와줘요 리디아 님!”

       

       콰앙!

       

       그리 외치는 것과 동시에 벽이 부서지며 등장한 리디아.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다 말고, 이미 쓰러진 족장과 피 칠갑을 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한 그녀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가서 셀리 씨 좀 불러와 주실 수 있나요?”

       

       “…….”

       

       리디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급한 일 있으니까 빨리 와보라길래 헐레벌떡 갔더니 불 꺼달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불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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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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