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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2

    <552 – 상대적 난이도(4)>

     

    남부신성도시국가연맹 교외 미개척지.

    도적길드 안전가옥.

    길드 본부가 혁명군과의 교전으로 불살라지고 망령들의 습격까지 겪으며 난장판이 된 이후, 도적길드의 잔당들은 디스트로이어의 회복에 집중했다.

     

    “세력을 회복하는 일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디스트로이어 님의 회복은 때를 놓치면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멍청한 녀석들… 콜록콜록. 경쟁자들은 가만히 두고만 볼 것 같으냐? 너희가 지금 챙기지 못한 자산과 흔들리는 사람은 모두 재단에게 넘어갈 거다.”

    “상관없습니다. 처음부터 디스트로이어 님의 쓸모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길드. 뜻이 맞는 이들끼리 함께 한다면 마음이 변한 변절자들이 떠나는 것이 옳습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정직하군… 콜록콜록. 조금쯤은 막내제자 오크노디의 영악함을 배워도 좋으련만.”

     

    도적길드 지부장 슈 츄러스는 안전가옥의 벽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을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다.

     

    “귀여운 아이였지요. 꼭 해바라기처럼.”

    “무서운 아이기도 하지.”

    “그래도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디스트로이어 님은 마인의 암흑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 테죠. 거기까진 버텨내더라도 이후의 혁명가의 습격은…”

    “틀림없이 죽었겠지. 내가 가장 증오해왔던 혁명가에게 패하고, 영혼마저 놈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최악의 형태로. 콜록콜록. 내 영혼을 인질로 잡는다면 도적길드의 절반은 혁명군에 붙었을 테고.”

    “그런 아이가 어떻게 무섭겠어요? 제국에 가서는 그 황제에게마저 한 방 먹였다는데.”

     

    슈 츄러스를 따라 해바라기 그림액자를 바라보던 디스트로이어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오크노디가 해바라기와 닮았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어떤 면에서 그렇지?”

    “그 아이는 한결같이 디스트로이어 님을 위해서 정진해왔잖아요. 실제로 그 아이가 지금껏 물리친 상대들을 떠올리면, 디스트로이어 님의 소꿉친구…”

    “괜찮다. 이제는 그 이름을 말해도.”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던 슈 츄러스가 한결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비의 죽음에 일조한 세력들의 격퇴에 힘을 쓰고 있고요. 혁명군과 제국은 실제로도 크게 한방씩 먹었잖아요?”

     

    솔직히 통쾌하기는 했다.

    정말 나 때문에 오크노디가 이 모든 짓을 벌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스승을 구하고자 마인의 암흑마나를 나누어 받고.

    하비의 원수였던 혁명가를 스승을 불러 죽였으며.

    선황을 물러나게 만들고 차기황제마저 죽여 매스각키를 황위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제국의 압력에 굴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하비의 아버지 하베스트 교수의 최후를 떠올리면 더욱 의미심장한 대목이었다.

     

    “콜록콜록… 아쉬움이 있다면, 마탑과 아카데미에는 복수를 하지 못한 것이군…”

    “디스트로이어 님…..”

     

    점점 심해지는 기침에 이어서 손에 묻어나는 새빨간 선혈까지.

    암흑마나로 인해 신성주문에 의한 치료도 불가능하고 포션과 영약에 의한 원기회복도 통하지 않는 디스트로이어의 몸 상태에 슈 츄러스는 눈물을 글썽였다.

     

    “슈 츄러스. 오래도록 나의 곁을 지켜왔던 그대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네.”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만일 디스트로이어 님이 원한다면 설령 인간의 길을 저버리는 방법이라도…!”

    “그만.”

     

    죽어가는 몸으로도 두 눈 가득 형형한 기운을 뿜어내며 상반신을 일으켜 앉은 디스트로이어.

    그가 강력한 힘이 실린 목소리로 엄중히 경고했다.

     

    “세상에는 알더라도 걸어서는 안 되는 길이 있다. 인륜을 저버리는 길. 그리고 인간을 벗어나는 길이 그것이다. 두 번 다시 마인화를 입에 담지 마라.”

     

    암흑마나 피폭자가 살아남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인으로의 종족변화를 이루는 것.

    전신이 암흑마나를 수용하고 힘으로 전환하는 일종의 영단화를 이루거든 인간시절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한층 더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다.

    하물며 디스트로이어 정도의 강자라면 그 강력함은 마왕군 사천왕을 단신으로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런 대단한 힘을.

    복수를 이룰 기회를.

    성장이 확정된 미래를.

    디스트로이어는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라.”

    “실례했습니다… 언제라도 간병이 필요하거든 긴급부저를 눌러주십시오. 저는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눈치를 개 준 것이 아니고서야 모를 리가 없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곁을 지키는지.

    디스트로이어는 늘 그렇듯 그 마음에 답하지 않았다.

    암흑마나를 일정수준 이상 지닌 자.

    정에도 해로운 기운이 담기기 마련이니.

    마물과 마인, 마족을 토벌해온 그에게 암흑마나 피폭이란 피할 수 없는 길.

    그릇이 넘치다 못해 깨질 지경에 달한 지금, 남녀의 정을 나누는 짓은 상대를 피폭시키는 행위였다.

    아끼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오래도록 자신을 따른 측근이라면.

    더욱 정을 나누는 짓은 벌일 수도 없고, 벌여서도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잡을 수 없는 바람, 머물 수 없는 파도, 멈추지 않는 열차. 사랑이란 참으로 딱한 감정이지. 디스트로이어 교수, 그대에게 이런 인간적인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어.”

    “…교장이 보냈나?”

    “의적은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일하지 않지. 오직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향하고, 자신의 정의가 허락하는 물건만 훔쳐.”

    “콜록콜록… 이 꼴을 봐라. 죽어가는 남자에게 훔칠 것이 남아있나?”

    “병색이 완연한 남자에게는 없지. 하지만 대륙십대도적의 서열 1위, <최강도둑>에게는 있어.”

    “최강도둑이라…”

     

    디스트로이어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최강. 세상에서 제일 강한 존재. 그 이름을 한순간이나마 훔쳐낼 수 있는 도둑은 근 300년 이내에 오직 당신뿐이지 않은가?”

    “나를 죽이고 명예를 거두어갈 셈인가?”

     

    그림자 속에서 걸어나온 브론즈 교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뻗었다.

     

    탁.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얼굴 옆을 스친 지팡이를 병상에 누운 채로 쳐다보는 디스트로이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이미 말했잖아? 본관이 훔치는 건 마음이 향하고 정의가 허락하는 물건 뿐이라고.”

    “최강의 이름도, 대륙십대도적의 필두의 자리도 원치 않는다면 무엇이 너를 불러들였지?”

    “당신의 자식.”

     

    디스트로이어는 쉽게 동요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용사행을 거치며 온갖 수라장을 목격했다.

    평온한 일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지옥을 수십 번도 더 끄집어내고 파괴했다.

    그런 그도 지금만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백색의 정장 너머, 의적심 주머니에 손을 올리며 브론즈 교수는 당당하게 유혹했다.

     

    “본인을 만족시킬 남자는 흔치 않지. 그것이 곧 세상을 떠날 남자라면 기회는 더욱 없을 테고.”

    “미친 건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세상이 아쉬워할 희대의 천재의 정을 훔쳐 자식을 낳는다. 도적으로서 이보다 영광스러울 일이 있나?”

     

    이 여자는 진심이다.

    정장 외투를 벗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푸는 모습에 디스트로이어는 진심으로 식겁했다.

    그의 거부반응을 본 브론즈 교수가 짐짓 상처 입은 여인처럼 옷깃을 여몄다.

     

    “본관의 매력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네만, 역시 당대최강의 도적에게는 부족했는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당신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암흑마나의 피폭자는 그 정에도 암흑마나가 담긴다는 사실 말이다.”

    “상관없다네. 본인은 용사로서 과업을 이루어왔던 그대와 다르게 마인을 죽일 일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렇기에 그대를 골랐지.”

     

    세상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을 신의 사도이자 선택받은 용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류진영의 진정한 고수들은 암흑마나의 피폭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인의 숨통을 끊는 자를 용사라고 부른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수명을 깎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그런 이의 피를 끊어지게 두는 것만큼 안타까운 손실은 없지.”

    “너는 내가 없더라도 오크노디를 가르치고 이끌 수 있는 몇 안 되는 실력 있는 교수다. 이런 식으로 수명을 헛되이 소모하지 마라.”

    “스승이 제자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있어도 제자가 스승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네.”

     

    철컥, 금속 허리띠를 풀고 스르륵, 옷이 살결을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면… 역시 그대는 이런 쪽이 좋은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지난 세월에 새겨두었던 것처럼.”

     

    브론즈 교수의 작아지는 키를 바라보며 디스트로이어 교수는 정조의 위협을 느낀 여자아이마냥 다급히 방범부저에 손을 올렸다.

     

    “거기까지다. 허튼짓을 벌이면 부저를 누르겠어.”

    “괜찮겠나? 소중한 측근이 다쳐도.”

    “네 정의는 무고한 이의 피를 허락하는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한 사람의 피는 흘릴 수 있지. 본인은 그 피가 오직 본인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 정도는 기꺼이 더 감내할 수 있네. 본인과 같은 의미의 피라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허락할 의향도 있지.”

    “…”

    “어린 제자를 노리든, 떠나간 제자를 노리든, 곁을 지킨 충직한 부하를 노리든 개의치 않겠네. 본관은 의적심주머니만큼이나 마음씨도 대범한 여성이니. 영웅의 씨는 하나라도 더 많이 퍼질수록 의롭지.”

     

    기어이 속옷으로도 향하려는 손에 디스트로이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브론즈 디 아스트라다. 너는 혁명가와 다른 의미로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군.”

    “이제야 응할 마음이 들었나?”

    “영웅행에 나선 뒤의 용사가 씨를 뿌리면 용사보다 마인이 탄생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 그런 위험을 순순히 감수할 것 같은가?”

    “잘못 낳으면 죽이면 된다.”

    “차라리 교환조건을 걸지.”

     

    브론즈 교수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본인은 만찬을 앞두고 떠나는 몹쓸 버릇이 없다네. 손만 뻗으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진미를 취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물러나야 하지?”

    “오크노디의 몸에 심어둔 기운이 제도를 떠나 제국의 또 다른 금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만일 그 아이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때는 설령 마인화를 일으키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안의 얼마 남지 않은 순수한 기운을 그녀에게 전송할 거다.”

    “!!”

    “알겠는가? 나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제자를 위해 남은 수명, 남은 기운, 그 모든 것을 전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령 내 생명을 억지로 붙들더라도 내게서 얻을 수 있는 아이는 무조건 마인 밖에 남지 않을 거다. 그건 너의 의로움, 정의에 위배 된다.”

     

    과연, 썩어도 준치라더니.

    이런 빈사의 몸으로도 자신의 행동을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줄이야.

    그 혁명가의 적수로 오래도록 혁명군을 억제해온 진정한 영웅다웠다.

     

    “당했군.”

     

    그것이 브론즈 교수의 극의, <도적의 그림자>가 메이드 리프를 이용해서 아무도 모르게 오크노디의 뒤를 쫓게 된 계기였다.

    물론, 그녀라고 순순히 당하기만 하고 오크노디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서둘러야 할 거다. 제국의 금지에 오크노디를 데려갈 수 있는 자는 제도에서 물러난 선황뿐이…?!”

     

    도둑고양이처럼 사뿐히 다가온 고개가 입술을 훔쳤다.

    저항하는 디스트로이어 교수의 몸에서 마나가 이상반응을 일으키기 직전, 디스트로이어 교수의 입안에 물씬 다가섰던 히아신스 향기가 멀어졌다.

    끈끈하게 늘어지는 은색의 침을 닦으며 브론즈 교수가 도발적으로 히죽 웃었다.

     

    “선수금은 받았어. 애태우는 건 한 번뿐. 아무리 좋은 남자라도 두 번은 용서하지 않아.”

     

     

    * * *

     

     

    “디스트로이어 교수에게는 그런 부탁을 받고 널 도우러 왔단다.”

     

    브론즈 교수의 솔직한 이야기가 끝났다.

    그녀는 내심 궁금했다.

    오크노디는 특별한 아이다.

    디스트로이어의 제자.

    동시에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아이.

     

    오크노디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스승과 스승의 결합에 부끄러워할까?

    아니면 어른스러운 여성의 모습에 호기심을 품을까?

    하비노디라는 인격을 개화할 정도로 스승을 안쓰러이 여기고 연모하는 아이다.

    스승의 순결을 위협하는 자신을 질투할지도 모르지.

    무엇이든 좋다.

    이 혼돈은 즐길 가치가 있으니.

    너의 반응을 보여다오.

    온갖 호기심이 소용돌이치는 브론즈 교수의 앞에서 오크노디는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떻게 병상에만 누워도 여자가 찾아올 수가 있지?? 이런 괘씸한 알파메일 같으니!!”

     

    답은 질투였다.

    그것도 자신이 아닌 디스트로이어 교수를 향한 질투.

    230cm의 근 력올인한방캐릭이좋아해병이 호감도 최종공략에 실패한 캐릭터가 자신이었음을 알지 못하는 브론즈 교수는 조금이지만 당황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의문의 알파메일 디스트로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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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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