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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53

    <553 – 종족신의 성소(1)>

     

    설마… 이 조숙한 제자가 날 좋아하나?

    브론즈 교수는 의문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오크노디 1년생. 귀관은 혹시 본관을 좋아하나?”

    “당연히 좋아하죠! 브론즈 교수님은 제가 속마음을 공략하지 못한 스승님인걸요.”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다.

     

    “스승의 속마음은 공략해서 무얼 하려고 하니?”

    “호감도보너스를 얻어야죠!”

    “그 보너스를 얻으면 무엇이 좋니?”

     

    이어지는 오크노디의 대답에 브론즈 교수는 맥이 빠졌다.

     

    “전투력이 오르죠?”

    “아이를 낳거나 임신하는 일은?”

    “전투력이 낮아지니까 곤란하죠?”

    “간혹 사랑과 정의의 힘으로 강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 황당한 족속들이 있는데, 오크노디 1년생이 그런 부류의 인간인 줄은 몰랐군.”

    “정의도둑인 브론즈 교수님이 그런 말 해도 돼요?”

    “정의는 힘을 부르지 않는다. 힘이 정의를 부를 뿐. 사랑도 힘을 부르지 않는다. 힘이 사랑을 부르지.”

     

    간단명료한 세상의 이치.

    교수는 사랑이 무엇인지,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어리숙한 제자가 자신을 당황 시켰다는 사실에 괘씸함을 느꼈다.

    본때를 보여줄까?

    어른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스승답게 특별한 교육을 하는 거지.

    하복부 깊은 곳부터 끓어오르는 가학심이 그녀의 머릿속 스위치를 톡톡 건드렸다.

    하지만 브론즈 교수는 늦지 않게 기억했다.

     

    -오크노디. 혹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그림에 익숙한가?

    -우와. 어떻게 아셨어요?

    -이보다 더한 걸 봤나?

    -앗.

    -교수님… 어린애가 야한 걸 너무 일찍 봤다고 혼내시는 거 아니죠…?

     

    지난 1학년 1학기, 안목키우기 강의시간.

    춘화나 야한 그림의 가치를 감정하는 강의에서 묘하게 야한 그림에 익숙한 모습을 보였던 오크노디.

    그녀가 말한 춘화보다 더한 것은 실물밖에 없었다.

    실제 성애장면을 어린 나이부터 목격한 오크노디.

    그녀에게 재단의 교육을 따르지 않으면 창관의 창녀가 될 거라고 협박했을 재단교육자.

    이를 방관, 혹은 방조하거나 어쩌면 직접 지시했을지도 모를 이사장까지.

     

    ‘재단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짓을 내 손으로 할 수는 없지.’

     

    하복부로부터 올라오던 열기가 가라앉았다.

    머릿속의 스위치가 서랍장에 들어가 잠겼다.

    모든 욕망을 철저하게 제어한 브론즈 교수는 약간의 미안한 마음을 담아 서비스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스승을 잘 따르는 기특한 아이에게 특별히 조언 하나를 건네주지.”

    “와아!”

    “이곳은 뱀파이어들의 성소. 모든 성소는 신격들이 중간계에 둔 거점이며, 각 거점은 현인신의 침공에 방지하여 일정 크기 이상의 신격이 성소에 침입할 수 없도록 특별한 장치를 두었지.”

    “그게 무슨 장치인데요?”

    “신격파손장치. 어떤 신도 예외는 없지. 설령 신격을 구체적으로 개화하지 못했더라도 그릇의 크기가 큰 존재는 모두 저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쌓아올린 힘을 소실하게 될 터이니.”

     

    그렇기에 주류24신격이 아닌 만신들의 신전도 세상 어딘가에는 하나씩 존재한다.

    파괴할 수 없다면 잊히게 만들거나,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다른 신들의 견제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선황 또한 분명 이런 성소 지우기에 한몫했었다.

     

    “오크노디 1년생이 지닌 그릇의 크기는 아직 반신급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대로 들어가도 된다.”

    “교수님은요?”

    “본관의 그릇 또한 충분히 커다랗기는 하나 성소를 가득 채우기에는 부족하다네. 무언가를 얻어서 나오지는 못하겠지만 동행은 해주지.”

     

    흘끔 뒤를 보며 고서박물관 저 위, 제어창살이 내려온 지상 방면을 어림짐작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브론즈 교수님의 그림자 은신이 황제의 눈도 속였을까?

    황제가 교수님을 보면 무어라 반응했을까?

     

    “안 들어오나?”

    “지금 가요!”

     

    고서박물관.

    뱀파이어의 성소 안에서 하기엔 뒤늦은 생각이다.

     

    <언더월드 대귀족의 혈족도>

    <인간의 채혈량을 효율적으로 늘리는 법>

    <피주머니에 대해 알아보자 3 : 인간편>

    <AG 003년 천족잼민이 일기>

    <DM 097년 어느 마족 노인의 넋두리>

     

    오래된 서적이라고 무조건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내 눈길을 가장 먼저 끈 것은 하찮은 책들이었다.

     

    “교수님! 천족잼민이 일기 같이 보실래요?”

    “이런.”

     

    브론즈 교수님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더니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이게 안목키우기 강의를 들은 수강생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귀관에게 지난 1학기에 무얼 가르쳤는지 후회마저 드는군. 블러디쥬얼부터 진혈추적서까지 값진 서적과 장식물이 이토록 많은데 제일 먼저 집어든 것이 천족잼민이일기라니.”

    “그래서 안 보실 거예요?”

     

    호기심이 동하기는 했는지 교수님이 블러디쥬얼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조금만이라면 해석을 도와주지.”

     

    ━━━

    <AG 003년 천족잼민이 일기>

    AG 003년 1월 11일

    일기장에 오늘 반성할 일과 내일 할 일을 적으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적었는데 혼이 났다.

    반성할 일이 없고 내일 할 일은 더럽게 많아서 그대로 썼는데 성의 있게 쓰라니, 별거 아닌 일생에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상을 바라는 걸까?

     

    AG 003년 1월 12일

    저는 일기장에 건방진 소리를 적어서 허벅지를 열 대 맞았습니다.

    건방진 소리를 적어서 반성합니다.

    내일부터는 봉사활동으로 굶주린 중간계 미물들에게 에너지를 나눠주고 소모한 에너지는 명상으로 열심히 채우겠습니다.

    ━━━

     

    “이런 내용이군.”

    “AG는 무슨 뜻이에요?”

    “역법. 해를 세는 셈법 중에서 천계의 천신이 중간계를 지배하던 시기를 나타내는 용어구나. 엔젤력이라고도 부르고 AG력이라고도 부르지.”

    “아항!”

    “같은 이유로 DM 097년은 마계의 악신이 중간계를 지배하던 시기, 데몬력의 DM이지.”

    “지금은 제국력 981년이죠?”

    “틀렸다. 제국력이란 제국이 주장하는 바일 뿐, 실제로는 드래곤력, 용력, DG력이라고 불러야겠지.”

    “왜요?”

    “세상을 지배하는 최강자가 교장이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닌 듯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 끝난 플레이어 제외하면 수백 년을 산 황제나 마왕보다도 오모시로이 교장님이 젤 강하긴 하지!

    게임에선 재미없는 배경스토리는 스킵만 눌러서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혹시 그 천신이랑 마신이 지금 주류 24신격과 연관이 있나요?”

    “그때 잘 나가다가 헛물켠 뒷방 노인네들이 주류 24신격이라는 설이 유명하기는 하다.”

    “우와. 교수님은 이런 건 어떻게 알아요?”

    “가치 있는 물건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 실려있지. 오크노디 1년생, 귀관도 지금보다 뛰어난 의적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언어를 지닌 종족은 필시 그 종족이 아끼는 재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

    “고대종족의 보물을 터는 것도 의로운 일이에요?”

    “적어도 천족과 마족은 그렇지. 천족은 가혹한 규칙으로 수많은 생명체를 처형했고, 마족은 잔혹한 암흑마나로 수많은 생명체를 피폭시켜 뒤틀었으니. 그들의 보물은 마땅히 훔쳐도 좋다.”

    “근데 저 의적 아니고 마검사인데요! 마검사는 그런 거 몰라도 되지 않을까요?”

     

    브론즈 교수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헛웃음을 지었다.

     

    “오크노디 1년생.”

    “넹!”

    “제국의 황제를 갈아치워 폭정을 훔치고 선정을 만백성이 누리게 한 도둑이 있다면 그를 어떤 도둑이라 불러야 하는가.”

    “정의도둑이요?”

    “그렇다. 귀관은 이미 어엿한 의적. 이 브론즈 디 아스트라다를 넘어선 대륙십대도적이다.”

    “네에엣?!”

     

    아닛, 내가 대륙십대도적이야?!

     

    “머지않은 시일 내에 대륙십대도적의 공석이 정리되고 새로운 이름이 올라서겠지. 그때가 되거든 귀관의 이름도 한 자리 차지할 터이니, 미리 달라질 명성을 각오해두는 것이 좋다.”

    “그런 건 누가 정하는데요?!”

    “제국의 신물 <랭킹보드>. 각 분야의 가장 뛰어난 10인을 기재한 랭킹보드의 도적부문 랭킹에 매년 초, 곧 다가올 982년 1월 1일에 기재되겠지.”

     

    헉.

    게임시스템이 현실에서는 그렇게 구현될 줄이야!

    원래 랭킹보드는 플레이어들끼리 업적점수 대결하는 고인물 컨텐츠였다.

    흔히 말하는 명예의 전당.

    혹은 고인물 양로원이라고 해야겠지.

    플레이어가 없는 현실에서는 NPC들이 랭킹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나보다.

     

    ‘응?’

     

    그러면 또 의문이 하나 생긴다.

    랭킹에 이름을 올린 랭커는 랭킹보상을 수령하는데…

    NPC도 랭킹보상을 받나?

    유료재화는 어떻게 받지?

    만일 받는다면, 그건 누가 주는 거지?

    누군가 준다면, 그 재화는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

    5살 아이의 멈추지 않는 “왜요?”처럼 끝없는 호기심이 줄줄이 이어졌다.

     

    ‘헉! 난 5살까지는 아니야!’

     

    10살, 아니 이제 해가 지나면 11살이 될 몸이라고!

    11살이었나? 12살로 올라가나?

    나이는 처음부터 몰라서 키 높이로 대충 짐작한 거라서 몇 살인지는 스스로도 헷갈리지만… 아무튼 5살은 아니야!

    그러니 왜요는 이제 금지다.

    대충 이유가 있겠지!

     

    “시시한 옛 역사의 기록이지만 네게는 이런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왜요?”

     

    헉. 왜요 또 해버렸어…

    난 어쩔 수 없는 5살 응애인가…?

    회춘해버린 정신연령에 절망하는 내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교수님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귀관의 그릇은 이미 반신급이기에 현인신 급의 용적이 차오를 위험이 있어, 본능적으로 덜 가치 있는 물건을 집어들고 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무의식적인 가치판별의 작용이지.”

     

    아무리 그래도 천족잼민이 일기가 적힌 비석을 들고 나갈 수는 없었다.

     

    “저는 확정강화권을 들고 나갈 거예요!”

    “흐음?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군.”

    “고마력반응을 숨긴 낱장 페이지를 찾으면 돼요!”

     

    브론즈 교수님의 도움 덕분에 확정강화권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쪽에 있었다.

     

    “오크노디. 조금만 기다리라면서 혼자만 좋은 거 보고 놀고 있었어?”

    “헉!”

     

    고서박물관의 고서(일기장) 보느라 구하는 걸 까먹은 즈앙이 제 발로 걸어왔다.

    가면을 눌러쓴 것이 삐져도 아주 단단히 삐졌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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