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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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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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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 노인은 죽지 않은 듯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이 소파를 짚으며 일어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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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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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윽,허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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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심하게 허리를 다쳤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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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앉아있으라고 했으니까 가만히 있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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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럴 땐 얌전히 가만히 있는 게 좋았다. 그런 나와 달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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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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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의 그림자에서 사람이 솟아났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는 침대에서 끙끙거리는 노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려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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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흐흑,아흑…나,날 건드리지 마! 가만히 내버려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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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아픈지 누군가가 손대는 것조차 거부했다. 노인은 역정을 내며 다가온 남자를 밀어냈다. 역시 가만히 있는 게 답이었다. 괜히 도와주려고 했으면 저기서 욕을 듣고 있는 건 자신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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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에게 다가갔던 사람은 손을 움찔거리며 노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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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으,하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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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노인의 신음 따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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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내가 실수한 거니까 사과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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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적인 생각이 훅 치솟았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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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적하면 사과하자. 아직 안 들켰으면 내 잘못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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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 세계에서 양심이란 딱 이 정도였다. 죄를 줄줄 늘어놓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미남 미녀의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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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를 막고 있어서 그런지 노인의 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할 것도 없어서 바닥의 패턴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사람을 닮은 다섯개의 패턴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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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섯개의 패턴이 치정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사실 나 임신했어.”라고 외치는 패턴과 “..나도 고백할 게 있어. 나 불임이야. 어렸을 때부터 정자에 문제가 있었데.”라고 말하는 패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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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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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노인이 겨우 자세를 바로 하는 게 보였다. 나는 눈치껏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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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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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은 허리를 붙잡으며 끙끙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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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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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설을 내뱉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험악하게 구겨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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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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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노인이 이를 악물며 소파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남자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포션 병을 내밀었다. 회복 포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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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은 곧바로 포션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전부 마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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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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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텅 빈 병을 남자에게 던져주고는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찔리는 게 있었기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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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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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드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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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숙은 이를 갈며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리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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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필 그 순간에 의자가 넘어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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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남자였다. 멋들어진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것도, 굳이 시중을 드는 노예를 그림자에 숨겨두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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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자존심이라 부를 수 있는 ‘가오’가 리안 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반숙은 리안이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을 거라 멋대로 상상하고는 눈가에 핏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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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볍게 인사만 하고 돌려보내려 했었는데 -..이거 안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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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교육해 줘야겠군.
    ​
    ​
    반숙은 비릿하게 웃으며 곁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남자는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리안을 번쩍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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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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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곧바로 소파에서 번쩍 일어나려던 반숙은 허리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에 멈칫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포션을 먹어서 그런지 전보다는 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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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젠장,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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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늦게 자세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신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 남자가 다가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팡이를 가져다주었다. 
    ​
    ​
    화려한 지팡이는 그의 부와 자신감을 나타내주는 액세서리였지만, 오늘만큼은 원래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
    ​
    탁탁.
    ​
    ​
    그는 지팡이에 몸무게를 실으며 걸음을 옮겼다. 반숙은 거실과 이어진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는 사과 바구니가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가 지팡이로 그림을 툭툭 두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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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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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과 그림이 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쪽으로 열렸다. 안쪽은 새하얀 복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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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몇 개의 방문이 보였다. 반숙은 가장 안쪽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남자가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가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
    ​
    방 안쪽도 온통 새하얀 색이었으며, 가운데에 철제 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의자 손잡이와 다리 부분에 가죽 벨트가 매어져 있었고, 핏자국이 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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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 바로 앞에는 검은색 트롤리가 있었는데 안쪽에 살벌한 고문 도구들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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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을 짊어지고 있던 남자는 곧바로 철제 의자에 리안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손목과 발목을 의자와 연결된 가죽 벨트로 묶어버렸다. 
    ​
    ​
    반숙은 입꼬리를 휘어 기괴하게 웃으며 리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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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상황 파악이 됐겠지? 자, 네 녀석은 어떤 절망을 보여주고, 비명을 내지를까?’
    ​
    ​
    남자가 벨트를 단단히 고정한 후 옆으로 비켜섰다. 반숙은 마른침을 삼키며 두려움에 질린 리안의 얼굴을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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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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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안은 태연한 표정으로 방 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가득한 건 호기심이 전부였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에 반숙이 말을 잃고 리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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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 관리하기 힘들겠다.’
    ​
    ​
    리안은 상황 파악을 못한 게 아니었다. 말라붙은 핏자국과 고문 도구만 봐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다만, 무섭지 않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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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렸을 때 병원에 가기 싫다고 떼쓰던 아이들도 어른이 되면 별생각 없이 병원에 가지 않던가? 리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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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별로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니 무서울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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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득.
    ​
    ​
    그 모습이 반숙에겐 도전장처럼 느껴졌다. 
    ​
    ​
    ‘머리가 너무 멍청하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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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통 가지고 놀 장난감을 이곳에 데려오면 묶어놓은 채 몇 시간 정도 방치하는 편이었다. 온통 새하얀 방 안에서 온몸이 묶인 채 두려움에 질려가는 노예를 구경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
    ​
    그러나 리안에게 그런 방법이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자 곁에 있던 남자가 눈치껏 트롤리를 반숙의 옆까지 끌어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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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되나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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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숙은 일부러 순한 노인 같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리안의 시선이 반숙을 향했다. 
    ​
    ​
    슥, 반숙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남자에게 건넸다. 다행히 포션 효과가 잘 들었는지 더 이상 허리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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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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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트롤리에 들어있는 고문 도구 중 펜치를 들어 올렸다.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그는 가볍게 펜치를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한 후 묶여있는 리안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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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리 멍청한 놈이더라도 이쯤 되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곤 겁에 질려 주먹을 꽉 쥐는 게 옳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리안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손을 내어주고 있었다.
    ​
    ​
    ‘그런 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
    ​
    반숙은 삐죽거리는 웃음을 지은 채 펜치로 리안의 손톱을 잡았다. 그의 입술이 기괴하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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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막이 웅웅 울릴 정도의 비명이 들려올 걸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고 저릿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할짝거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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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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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지 못한 희열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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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뾱!
    ​
    ​
    귀여운 소리와 함께 손톱이 뽑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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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던 반숙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무수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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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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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부정’한다.
    ​
    ​
    ‘아,그…그래 잘못 뽑았나 보군.’
    ​
    ​
    그렇다기엔 펜치 끝에 엄지손톱이 잡혀있었지만, 현실을 외면 중인 반숙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다.
    ​
    ​
    투둑.
    ​
    ​
    반숙은 엄지손톱을 바닥에 버리고 검지 손톱을 펜치로 잡았다.
    ​
    ​
    ‘이번에야말로…!’
    ​
    ​
    뾱!
    ​
    ​
    아기 신발에서 날 법한 귀여운 소리가 다시 한번 더 들리고 손톱이 뽑혀 나왔다. 하지만 단 한 방울의 피도 튀지 않았으며, 손톱이 뽑힌 곳에 멀쩡히 손톱이 존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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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숙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한 것처럼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
    ​
    뽁,뾱! 뾱! 뽁뽁뽁뾱뾱!
    ​
    ​
    “헉,허억…허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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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숙은 이런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미친 듯이 리안의 손톱을 뽑았지만, 울려 퍼진 건 리안의 비명이 아닌 반숙의 헐떡거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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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력이 부족해 숨을 헐떡이던 반숙이 시선을 들다가 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리안은…. 새벽에 신문을 줍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노인을 보는 것처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반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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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챙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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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눈빛에 스위치가 눌린 반숙은 펜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미친 사람처럼 트롤리를 마구 뒤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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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날 동정하지 마! 감히,감히 노예 따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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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날이 톱처럼 생긴 칼을 들어 냅다 리안의 허벅지에 꽂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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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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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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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에는 이상한 효과음 없이 제대로 살을 통과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땀범벅이 된 반숙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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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네 놈이 어떤 상황인지 알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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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화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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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치 막혀있던 수맥을 뚫어버린 것처럼 피 분수가 허벅지에서 솟구쳐 나왔다. 
    ​
    ​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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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들짝 놀란 반숙이 뒤로 물러나다가 자기 발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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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두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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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허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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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다쳤던 허리가 다시 삐끗하면서 반숙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셀프(?) 고문중인 반숙씨를 응원합니다.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끄으윽…”

다행히 노인은 죽지 않은 듯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이 소파를 짚으며 일어나려 했다.

우득.

“허윽,허어억…!”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심하게 허리를 다쳤는지 알 수 있었다.

‘음…앉아있으라고 했으니까 가만히 있어야겠지?’

이럴 땐 얌전히 가만히 있는 게 좋았다. 그런 나와 달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보다.

스륵.

노인의 그림자에서 사람이 솟아났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는 침대에서 끙끙거리는 노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려는 듯 보였다

“아흐흑,아흑…나,날 건드리지 마! 가만히 내버려 둬!”

얼마나 아픈지 누군가가 손대는 것조차 거부했다. 노인은 역정을 내며 다가온 남자를 밀어냈다. 역시 가만히 있는 게 답이었다. 괜히 도와주려고 했으면 저기서 욕을 듣고 있는 건 자신이었을 것이다.

노인에게 다가갔던 사람은 손을 움찔거리며 노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으,하으윽!”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노인의 신음 따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 내가 실수한 거니까 사과해야겠지?’

양심적인 생각이 훅 치솟았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지적하면 사과하자. 아직 안 들켰으면 내 잘못 아니지.’

개그 세계에서 양심이란 딱 이 정도였다. 죄를 줄줄 늘어놓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미남 미녀의 특권이었다.

귀를 막고 있어서 그런지 노인의 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할 것도 없어서 바닥의 패턴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사람을 닮은 다섯개의 패턴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섯개의 패턴이 치정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사실 나 임신했어.”라고 외치는 패턴과 “..나도 고백할 게 있어. 나 불임이야. 어렸을 때부터 정자에 문제가 있었데.”라고 말하는 패턴을 바라보았다.

‘파국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노인이 겨우 자세를 바로 하는 게 보였다. 나는 눈치껏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끄으응…”

노인은 허리를 붙잡으며 끙끙 소리를 냈다.

“젠장..”

욕설을 내뱉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험악하게 구겨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듯했다.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노인이 이를 악물며 소파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남자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포션 병을 내밀었다. 회복 포션이었다.

노인은 곧바로 포션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전부 마셔버렸다.

“크흐….”

텅 빈 병을 남자에게 던져주고는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찔리는 게 있었기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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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드득.

반숙은 이를 갈며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리안을 바라보았다.

‘하필 그 순간에 의자가 넘어가서는..!’

그는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남자였다. 멋들어진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것도, 굳이 시중을 드는 노예를 그림자에 숨겨두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자존심이라 부를 수 있는 ‘가오’가 리안 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반숙은 리안이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을 거라 멋대로 상상하고는 눈가에 핏줄을 세웠다.

‘가볍게 인사만 하고 돌려보내려 했었는데 -..이거 안 되겠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교육해 줘야겠군.

반숙은 비릿하게 웃으며 곁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남자는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리안을 번쩍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어흑…”

곧바로 소파에서 번쩍 일어나려던 반숙은 허리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에 멈칫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포션을 먹어서 그런지 전보다는 덜 아팠다.

‘젠장,젠장!’

뒤늦게 자세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신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 남자가 다가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팡이를 가져다주었다.

화려한 지팡이는 그의 부와 자신감을 나타내주는 액세서리였지만, 오늘만큼은 원래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탁탁.

그는 지팡이에 몸무게를 실으며 걸음을 옮겼다. 반숙은 거실과 이어진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는 사과 바구니가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가 지팡이로 그림을 툭툭 두드리자.

끼이익.

사과 그림이 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쪽으로 열렸다. 안쪽은 새하얀 복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얀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몇 개의 방문이 보였다. 반숙은 가장 안쪽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남자가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가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쪽도 온통 새하얀 색이었으며, 가운데에 철제 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의자 손잡이와 다리 부분에 가죽 벨트가 매어져 있었고, 핏자국이 말라 있었다.

의자 바로 앞에는 검은색 트롤리가 있었는데 안쪽에 살벌한 고문 도구들이 들어있었다.

리안을 짊어지고 있던 남자는 곧바로 철제 의자에 리안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손목과 발목을 의자와 연결된 가죽 벨트로 묶어버렸다.

반숙은 입꼬리를 휘어 기괴하게 웃으며 리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상황 파악이 됐겠지? 자, 네 녀석은 어떤 절망을 보여주고, 비명을 내지를까?’

남자가 벨트를 단단히 고정한 후 옆으로 비켜섰다. 반숙은 마른침을 삼키며 두려움에 질린 리안의 얼굴을 기대했다.

“음.”

“…?”

리안은 태연한 표정으로 방 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가득한 건 호기심이 전부였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에 반숙이 말을 잃고 리안을 바라보았다.

‘여기 관리하기 힘들겠다.’

리안은 상황 파악을 못한 게 아니었다. 말라붙은 핏자국과 고문 도구만 봐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다만, 무섭지 않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 병원에 가기 싫다고 떼쓰던 아이들도 어른이 되면 별생각 없이 병원에 가지 않던가? 리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어차피 별로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니 무서울 이유가 없었다.

으득.

그 모습이 반숙에겐 도전장처럼 느껴졌다.

‘머리가 너무 멍청하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나 보군.’

보통 가지고 놀 장난감을 이곳에 데려오면 묶어놓은 채 몇 시간 정도 방치하는 편이었다. 온통 새하얀 방 안에서 온몸이 묶인 채 두려움에 질려가는 노예를 구경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안에게 그런 방법이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자 곁에 있던 남자가 눈치껏 트롤리를 반숙의 옆까지 끌어다 주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되나 보구나.”

반숙은 일부러 순한 노인 같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리안의 시선이 반숙을 향했다.

슥, 반숙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남자에게 건넸다. 다행히 포션 효과가 잘 들었는지 더 이상 허리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잘그락.

그는 트롤리에 들어있는 고문 도구 중 펜치를 들어 올렸다.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그는 가볍게 펜치를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한 후 묶여있는 리안의 손을 잡았다.

아무리 멍청한 놈이더라도 이쯤 되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곤 겁에 질려 주먹을 꽉 쥐는 게 옳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리안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손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런 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반숙은 삐죽거리는 웃음을 지은 채 펜치로 리안의 손톱을 잡았다. 그의 입술이 기괴하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고막이 웅웅 울릴 정도의 비명이 들려올 걸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고 저릿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할짝거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크흐흐…”

참지 못한 희열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

뾱!

귀여운 소리와 함께 손톱이 뽑혔다.

“…??”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던 반숙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무수히 떠올랐다.

“……????”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부정’한다.

‘아,그…그래 잘못 뽑았나 보군.’

그렇다기엔 펜치 끝에 엄지손톱이 잡혀있었지만, 현실을 외면 중인 반숙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다.

투둑.

반숙은 엄지손톱을 바닥에 버리고 검지 손톱을 펜치로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뾱!

아기 신발에서 날 법한 귀여운 소리가 다시 한번 더 들리고 손톱이 뽑혀 나왔다. 하지만 단 한 방울의 피도 튀지 않았으며, 손톱이 뽑힌 곳에 멀쩡히 손톱이 존재했다.

“…?!?!”

반숙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한 것처럼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뽁,뾱! 뾱! 뽁뽁뽁뾱뾱!

“헉,허억…허어억!”

반숙은 이런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미친 듯이 리안의 손톱을 뽑았지만, 울려 퍼진 건 리안의 비명이 아닌 반숙의 헐떡거림 뿐이었다.

체력이 부족해 숨을 헐떡이던 반숙이 시선을 들다가 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리안은…. 새벽에 신문을 줍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노인을 보는 것처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반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챙그랑!

그 눈빛에 스위치가 눌린 반숙은 펜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미친 사람처럼 트롤리를 마구 뒤적거렸다.

‘날…날 동정하지 마! 감히,감히 노예 따위가!’

그는 날이 톱처럼 생긴 칼을 들어 냅다 리안의 허벅지에 꽂아버렸다.

푸욱!

“…! 하!”

이번에는 이상한 효과음 없이 제대로 살을 통과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땀범벅이 된 반숙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이제 네 놈이 어떤 상황인지 알았 -….’

푸화아아악!

마치 막혀있던 수맥을 뚫어버린 것처럼 피 분수가 허벅지에서 솟구쳐 나왔다.

“허억…!”

화들짝 놀란 반숙이 뒤로 물러나다가 자기 발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두둑!

“크허헉?!”

아까 다쳤던 허리가 다시 삐끗하면서 반숙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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