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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자기 주인을 애타게 찾으며 불태워져 가는 혼돈의 정령.

   크라슈는 자그맣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약한데.’

     

   스킬밖에 통하지 않는 혼돈의 정령은 창공의 세대에 골칫거리였다.

   혼돈의 정령이 당시에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스킬의 부재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오러 자체를 스킬로 만들어 버리는 이그니스는 누가 뭐래도 혼돈의 정령에게 가장 유리한 상성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혼돈의 정령을 생각보다 훨씬 쉽게 물리친 크라슈는 살짝 의아함을 보였다.

     

   몸에 구멍 몇 개 정도는 뚫릴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다.

     

   ‘……의외로 혼돈의 정령은 정령왕의 숲에서 나름 정화되고 있던 건가?’

     

   크라슈는 혼돈의 정령이 생각 이상으로 약했던 점을 주목했다.

   크림슨가든이 정령왕의 숲에 혼돈의 정령을 풀어놓은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생각해 보면 혼돈의 정령이 진짜 괴물이 된 건 사건들이 많이 겹친 탓이겠지.’

     

   혼돈의 정령이 걷잡을 수 없는 만큼 강해졌던 건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정령 마법보다 더 위험한 정령 증폭 마법에 손을 댄 마도사 집단부터.

   세계가 각종 전쟁과 세계 침식들이 최흉으로 번져 폭주하며 정령왕의 숲 또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증식하여 혼돈의 정령이 그 혼돈을 집어삼킨 것까지.

     

   단순히 태초의 정령사가 죽은 이후 혼돈의 정령이 정령왕의 숲을 떠돌던 때보다도 단시간에 걷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된 것이었다.

     

   ‘지금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

     

   생각을 정리한 크라슈는 숨을 몰아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은 이그니스의 불에 타서 재생하지 못하고 있지만 혼돈의 정령의 진짜 문제는 그 재생력이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시간이 지나면 핵을 중심으로 결국에는 원상 복구된다.

     

   그러니 혼돈의 정령을 끝내기 위해서는 그 핵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문제는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그 핵을 제거 못 한다는 거겠지.

     

   ‘블랙 후드.’

     

   그렇기에 크라슈는 그 즉시 블랙 후드를 발동시켰다.

   손안에 맺힌 힘과 함께 크라슈의 손에 새까맣고 동그란 구체가 하나 텁하니 잡혔다.

     

   크라슈의 손에 핵이 쥐어진 순간 혼돈의 정령을 이루던 검은 액체가 이제는 크라슈 쪽으로 꾸물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전에 혼돈의 정령을 쓰러트릴 때도 같은 방식을 썼던 만큼 이대로 핵을 부숴 버리면 혼돈의 정령은 죽는다.

     

   크라슈의 눈이 핵에 닿았다.

     

   핵 속에는 검은색의 어둠이 꿈틀거리며 크라슈가 바라보고 있었다.

   이 핵은 세계 침식의 힘을 너무 많이 머금은 탓에 어디에도 쓸 수 없는 악의의 덩어리다.

     

   그러니 예전에는 핵을 얻은 즉시 파괴했었다.

   하지만 크라슈에게는 다른 방법이 하나 있었다.

     

   ‘결국 근원이 세계 침식이라는 것은.’

     

   극혈침독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크림슨가든.”

     

   크라슈의 부름을 듣고, 크림슨가든이 검은 벽으로 무너졌던 잔해 사이로 걸어 나왔다.

     

   “작별 인사할 준비해.”

     

   크라슈는 즉시 핵 속에 담겨 있던 세계 침식을 집어삼켰다.

     

   그 순간이었다.

   크라슈는 머리 위에 느껴지는 햇빛과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앞에는 본 적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평화로운 들판 위.

     

   한 소년이 에메랄드빛을 지닌 소녀와 함께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그니, 어때? 시원하지.」

     

   소녀는 바람을 일으켜 누워 있는 아그니의 얼굴을 식혀주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따라 아그니의 머리카락은 천천히 흩날렸고, 그에 따라 아그니가 웃음을 그렸다.

     

   「오히려 간지러운데.」

   「뭐야. 간지러운 거면 이런 거거든!」

     

   그러자 소녀는 손을 들어 아그니의 몸을 마구잡이로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런 소녀의 기습 공격에 당한 아그니는 웃음을 터트리며 이내는 소녀를 끌어당기며 같이 간지럽혔다.

     

   그 단란한 시간 말고도 수많은 사건을 두 사람은 겪었다.

   어느 때는 영웅으로서 사람을 구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정령 마법의 창시자로서 칭송받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애석하게 멈추지 않고 흐르고 또 흘러 어느덧 소년은 노인이 되었다.

   노인이 된 소년과 달리 그의 옆에 있는 소녀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타들어 가는 모닥불 앞.

   노인이 된 아그니는 주름진 눈을 천천히 감았다.

     

   「에, 리.」

   「응, 아그니, 나 옆에 있어. 불렀어?」

   「미안해. 내 시간은 너처럼 무한하지 않은가 봐.」

     

   세계 침식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령.

   육체의 수명으로 살아가는 인간.

     

   둘의 시간 선은 어떻게 해도 같을 수가 없었다.

     

   「너, 에게 좀 더 많은 걸 보여주고 싶은데. 내 세상은 너만큼 넓게 커지지 못, 했어.」

   「아그니?」

   「에리.」

     

   아그니는 힘겹게 에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더 이상 감긴 눈을 뜨지 못했다.

     

   「내 시, 간은 너가 있었기에 행복, 했어.」

     

   정령사로서 세계를 꿈꾸던 소년은 어느새 노인이 되어 수명에 끝에 다다랐다.

   그러니 그 수명의 끝자락에서 노인은 바랐다.

     

   부디 자기 행복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기를.

   자신이 떠난 뒤 그녀가 슬퍼하지 않기를.

     

   그 바람의 끝에 아그니는 숨을 거뒀다.

     

   「아그니? 자는 거야?」

     

   소녀는 천진난만하게 아그니를 불렀다.

   그녀는 생물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여느 때처럼 아그니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그 날 이후로도 매일 같이 아그니의 옆에 있었다.

   고이 잠든 그의 이름을 매일 같이 부르며 그가 일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그니, 오늘은 날이 추워. 감기 걸릴지도 몰라.」

     

   때로는 따스한 바람을 불어주며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던 코코아를 태워 그의 탁자 앞에 내려놓으며 그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눈 뜨기를 기다렸다.

     

   「아그니, 여름이야. 밖에 매미 소리가 들려. 얼마 전에 태어났다던 옆집 델론의 딸이 시집을 간대. 시간이 참 빨라.」

     

   때로는 열을 식혀 줄 차가운 바람을 불어주며 어디선가 구해온 수박을 아그니의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가 늘 시원하다고 좋아하며 먹었던 수박이 제철이었으니까.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소녀는 매일 같이 아그니의 옆에서 그 날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했고, 아그니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왔다.

     

   소녀는 줄곧 그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아그니의 시체는 점차 백골이 되어갔고, 그는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아그니, 나 슬슬 힘들어. 나 아그니와 다시 대화하고 싶어.」

     

   소녀는 그와 이야기하던 지난 삶이 그리웠다.

   아그니의 웃는 얼굴이, 때로는 슬픈 얼굴이, 그리고 어느 날은 화내기도 하는 그런 나날이 그리웠다.

     

   「아그니.」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나, 아그니가 너무 많이 보고 싶어.」

     

   믿고 싶지 않았지만, 소녀는 깨달았다.

   자기 주인은 이제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것이란 걸.

     

   그리고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말이다.

   백골의 시체가 무너진 그 날, 소녀의 마음도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이별을 모르던 정령에게 생긴 첫 번째 이별은 정령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다.

   소년이 없는 세계에 소녀가 있을 곳은 없다.

     

   「아, 그니.」

     

   소녀는 마지막까지 소년을 그리워한 채 그렇게 혼돈에 집어삼켜졌다.

     

   번쩍-

     

   크라슈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새하얗게 변한 구체였다.

     

   어둠 한줄기 없이 깨끗한 그 구체를 바라보던 크라슈의 눈앞에 소녀 한 명이 비추었다.

   에메랄드빛의 머리카락은 색이 다 바래 남지 않았고, 소녀의 얼굴도 절반 이상이 무너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 담긴 감정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체념과 받아들임, 혼합된 감정 속.

     

   소녀는 크라슈와 그의 옆에 다가선 크림슨가든을 바라보며 천천히 웃었다.

   크림슨가든이 얼굴에 차고 있던 호흡기를 떼어내고는 걸어왔다.

     

   “……미안하구나. 나는 너희 두 사람의 이별이니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이별을 달래줄 이도 필요한 법이었는데.”

   

   

   

   

     

   그러곤 그대로 소녀에게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그녀는 소녀가 분명 이별을 깨닫고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종이 죽은 시점에서 크림슨가든은 세계를 볼 수 없게 되니까.

     

   그러나 그녀가 아그니에게 품었던 감정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그것이 곧 소녀를 파멸로 이끌었다.

     

   아그니가 떠나고, 그녀를 돌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몫이었을 텐데.

   크림슨가든은 그녀를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한 것이 사무치게 미안했다.

     

   그 속에서 소녀는 천천히 사라져 갔다.

     

   아그니와 같은 기운을 풍기는 크림슨가든의 품 안에서 조용히 빛 가루가 되어 하늘 높이 날았다.

   크라슈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빛 가루를 올려다보았다.

     

   적어도 저 빛 가루 정도는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에게 닿기를 바란 채로 말이다.

     

     

   * * *

     

     

   구체를 주머니에 잘 넣어 둔 이후, 크라슈와 크림슨가든은 정령왕의 숲을 이만 나왔다.

   병사들은 그녀에게 경례를 올리며 수고하셨다는 말을 했고, 크림슨가든도 적당히 응대했다.

     

   그런 크림슨가든의 곁을 따라 걷던 크라슈가 그녀를 힐끗 보며 물었다.

     

   “괜찮냐.”

     

   크라슈는 세계 침식을 흡수하며 단편적으로 정령인 에리의 기억을 엿봤을 뿐이다.

   그렇지만 크림슨가든은 달랐다.

   그녀는 직접 아그니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고, 경험했을 테니까.

     

   그러니 차마 에리를 제 손으로 끝낼 수 있음에도 그녀를 끝맺음하지 못한 것일 거다.

     

   “괜찮다.”

     

   크림슨가든은 그렇게 말하며 한차례 숨을 내쉬었다.

     

   “불사란 그런 법이니까.”

     

   크림슨가든은 에리보다도 오랜 삶을 살아온 불사다.

   크라슈는 그녀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긴지 헤아리지 못한다.

     

   단지, 그게 길어도 너무 길었다는 것을 알 뿐.

     

   그녀는 수많은 이별을 겪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어여뻐 하던 종들의 죽음을 보고, 한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또 다른 종을 만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무한한 삶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이들과 끝없는 이별을 반복한다.

   크림슨가든이 불사를 그토록 지우고 싶어 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러한 이별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네 불사는 내가 뺏어.”

     

   그러니 크라슈는 크림슨가든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것을 보고, 잠시동안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 크림슨가든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날아온 까마귀가 그녀의 손에 앉았다.

     

   “그래, 그걸 위해서라도 널 강하게 만들어야겠지.”

     

   불사의 족쇄를 끊기 위해서라도 크림슨가든은 크라슈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것만이 불사를 끊을 방법이었으니까.

     

   크라슈의 어깨에 까마귀를 올려준 미르시스가 고개를 숙인 뒤 떠나갔다.

     

   [ 이제 어서 그 도로시라는 정령이나 되살려 보거라. ]

   “그래야지.”

     

   크라슈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구체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령왕의 알이었다.

   정령이 파괴되어 죽을 때 나오는 핵.

     

   그게 바로 정령왕의 알이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슈가 세계 침식의 힘을 전부 흡수한 덕택에 정령왕의 알은 깨끗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도로시를 되살리기 위해 도로시의 핵을 찾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그 핵이 있는 장소다.

     

   ‘……염주.’

     

   아슬란의 어머니이자 이그리트 가문의 부가주.

   그녀가 도로시의 핵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크라슈는 그에게서 도로시의 핵을 훔쳐 와야만 했다.

   하지만 크라슈 혼자서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염주의 방에 침입하기도 전에 걸릴 게 뻔하니 말이다.

     

   ‘내가 꼭 훔칠 필요는 없지.’

     

   이런 건 핵을 훔쳐다 줄 동료를 만들면 그만이다.

   그리고 크라슈는 그 동료를 소개해줄 이와 이미 면식을 다져 두었다.

     

   “리리나를 만나러 간다.”

     

   아슬란 녀석을 소개받을 시간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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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Became a Munchkin skill thief meonchikin seukil dodug-i doeeossda 먼치킨 스킬 도둑이 되었다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used to think that my stealing skill only worked on what was worthless to a person.

But just before I died, I realized that I could also steal the skills.

So I stole the 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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