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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너를 원망해, 루터스.”

         

       너를 사랑해, 루터스.

       하지 않을 짓을 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을 정도로.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고, 끝내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라도.

         

       “너를 죽일 만큼 원망해.”

         

       나 스스로를 죽이고, 모두를 속일 만큼 사랑해.

       당신이 메고 있는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갈 정도로 사랑해.

         

       이제 샬롯 에버그린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대로 검증도 채 되지 않은 시험기체를 타고 동료들을 돕기 위해 전장에 출격했다가 격추당해 가까스로 살아남았을 때.

         

       루터스 에단은 단신으로 포위망을 꿰뚫고 기어코 그녀를 구해냈다.

         

       언젠가는 티탄에게 생포당했던 적도 있었다.

         

       함께 사로잡힌 동료들이 온갖 끔찍한 생체 실험에 동원되었다가 끝내는 티탄의 먹이가 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방어선 전체가 붕괴하며 제국의 수도가 무너지는 그 순간에도 루터스 에단은 기어코 그녀를 구하러 왔었다.

         

       모든 인연이 시작되었던 맨 처음의 회차에서, 두 사람이 맺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언제가 되었던… 내가 죽는다면, 루터스. 네 품에 안겨 죽었으면 좋겠어.

         

       그 어떤 회차에서도, 루터스 에단은 그녀를 결코 홀로 두지 않았다.

         

       아르헨 오르카와 레아 길리아드라는 다른 연인이 있었음에도, 루터스 에단은 항상 그 약속만큼은 지켜주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그 길고 질겼던 인연을 끊어낼 때가 된 것이다.

         

       ‘발목을 잡고 있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야.’

         

       분명 더 좋은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루터스 에단은 기어코 고집을 부렸다.

         

       자신이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이들을 죽을 것이 분명한 작전에 밀어넣을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루터스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러 사라지면, 기다리다 못한 이들이 그 뒤를 쫓아 따라가곤 했다.

         

       그것이야말로 민폐였다.

         

       실력도, 자격도 없으면서 루터스 에단의 곁을 지키겠다는 욕망 하나만으로 행했던 모든 일들.

         

       희생?

       무슨 희생을 한단 말인가.

         

       결국 희생당하는 건 루터스 에단이었다.

         

       이번 회차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녀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자마자, 루터스 에단은 보란 듯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가 마흔 번씩이나 죽음을 맞이하고.

       마흔 번이나 되는 상실을 경험하고.

       마흔 번이나 되는 좌절을 겪은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샬롯 에버그린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의 책임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번 회차에는 루터스 에단에게 온갖 음해를 쏟아내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제까지 그저 루터스 에단의 희생에 무임승차를 한 주제에.

         

       자신들을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옛 연인을 폄하하고 깎아내렸다.

         

       게다가 아르헨이 전쟁영웅 루터스 에단을 고발하고, 그 모든 명예를 나락에 처박은 데에는 샬롯 본인의 책임도 컸다.

         

       그녀가 모든 비리를 넘기지 않았다면.

         

       뒤늦게나마 장부에 남아있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더라면.

         

       군수비리라고 호도하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그레이브야드의 모두를 살리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적어도 제 손으로 연인의 명예를 진흙탕에 박아버리는 끔찍한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르헨도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을 수도 있겠지.

         

       안타깝게도 샬롯 에버그린에겐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능력은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으니.

         

       그녀는 루터스와 같은 초인이 아닐뿐더러 ‘회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샬롯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예견된 운명을 비트는 것 뿐.

         

       그것이 루터스를 총으로 쏠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더 이상, 그가 책임을 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상, 루터스 에단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홀로 고독한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것이 루터스 에단이니까.

         

       제국의 파수꾼이자 그레이브야드의 수호자.

         

       무패의 영웅이라 칭송받지만, 그 아래에 깔린 수많은 패배의 고통을 떠안고 나아가는ㅡ.

         

       불쌍하고, 안타까운 남자.

         

       그런 루터스에게 진정한 구원을 선물해줄 수 있는 이는 오직 샬롯 에버그린 뿐이다.

         

       미래군사기술연구소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오라클’의 유일한 책임자.

         

       그레이브야드의 유지는 루터스가 아니라 그녀가 이어야만 했다.

         

       저 미치광이 총통에게 사랑하는 연인이 패배하는 것은 결코 볼 수 없었다.

         

       무기력하게.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고통속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훤했다.

         

       아아, 루터스.

       차라리 이것으로 나를 원망해줘.

         

       어쩌면, 당신을 제대로 마주보는 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이제까지 당신에게 저질렀던 모든 잘못들과 실수들은 나의 마지막 희생으로 속죄할 게.

         

       그때였다.

         

       루터스 에단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미안, 해….”

         

       루터스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내뱉은 말은 자신에게 총을 쏜 샬롯에 대한 원망도, 의문도 아니었다.

         

       그저.

       겸허하게.

         

       이 모든 것이 어김없이 자신의 책임이라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애써 붙잡고 있던 샬롯 에버그린은 애써 억눌러왔던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눈동자에서 쉴새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샬롯은 정신을 잃은 연인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들고는, 그 품속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아냐 루터스… 네가 사과할 이유는 없어. 결국 우리가… 다 무력해서. 역겨울 정도로 무력해서 그런 거니까.”

         

       동시에 품고 있던 총상용 지혈 스프레이를 어깨의 상처에 흩뿌렸다.

         

       울컥울컥 붉은 피를 쏟아내던 상처 위에 흰색 가루가 도포되고, 빠르게 응고되며 상처를 지혈한다.

         

       그녀는 출혈이 완전히 멎은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껴안고 있던 연인의 몸을 들고 아카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침묵하고 있던 요새의 거대한 양자컴퓨터가 붉은 빛을 흩뿌리며 응답한다.

         

       [그레이브야드의 최우선 명령권자, 루터스 에단의 신원이 최고사령부 DB에 재등록되었음을 확인.]

         

       [또한 현재 최우선 명령권자가 중상을 입어 인해 신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미싱 프로토콜의 시행과 더불어 세계의 운명에 중대한 위협이 발생했음을 감지.]

         

       [현재 통신 반경 내에 위치한 유일한 인원인, 3차 명령권자 샬롯 에버그린에게 그레이브야드 아카샤의 접속 권한을 임시 양도합니다.]

         

       [승인 요청을 전송.]

         

       샬롯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요청 승인.”

         

         

         

       ***

         

         

         

       카린 메이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최심부로 향하는 입구를 서성거렸다.

         

       베르너 그라임이 홀로 내부로 향한지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난 상태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가 뭔지 하나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때였다.

         

       터벅터벅.

         

       국장님일까,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려던 그녀 앞에 후드를 뒤집어쓴 한 사람이 나타났다.

         

       베르너가 아니다.

         

       누가봐도 수상하게 풍겨오는 분위기에 카린이 곧장 경계태세를 취했다.

         

       “누, 누구세요.”

         

       “아… 네가 그 아이구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오던 사람이 한껏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성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오른쪽 눈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대와 푸른 눈동자가 나타난다.

         

       순간적으로 베르너를 떠올릴 정도.

         

       “그이 곁을 잘 보좌해줘. 우리는 하지 못했던 걸, 너는 해낼 테니까.”

         

       샬롯은 그렇게 말하며 카린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줘. 네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면.”

         

       “그게 무슨 소리….”

         

       “루터스를 부탁할게. 그 사람은 안에 있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에 카린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이는, 총상을 입은 체 엎드려진 베르너 그라임이었다.

         

       “구, 국장님!!!!”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지르며 카린 메이븐이 다급하게 뛰어갔다.

         

       “괘, 괜찮아요!? 국장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다행히도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다.

         

       응급처치도 되어 있었다.

         

       카린 메이븐은 조금 전에 자신을 스쳐지나간 여자가 베르너를 이렇게 만들었음을 직감했다.

         

       “도대체 무슨…?”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카린은 다급하게 정신을 잃은 베르너를 안아들고 요새를 빠져나갔다.

         

         

         

       ***

         

         

         

       휘이이이이ㅡ.

         

       “하으… 춥다아….”

         

       귀를 애는 추위에 레아 길리아드는 옷섬을 더욱 여맸다.

         

       겨울이 다가왔지만, 북반구라 그러한지 느껴지는 추위가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자켓 안으로 몸을 욱여넣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내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거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구부러진 가로등.

       방치된 자동차.

         

       한때는 여러 사람의 삶의 터전이었을 건물들과 상가들은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어째서인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세상의 끝에 다가간 기분.

         

       그 모습에 레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와아….”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가, 이내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그 길의 끝에 우뚝 세워진.

         

       이제는 무인지대로 방치되어버린 제국군 북부사령부 건물을 향하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감사합니다.
    주 5일 연재는 이번주부터 시행할 예정이에요.

    목, 금은 휴재일입니다.

    다음화 보기


           


A War Hero With No Regrets

A War Hero With No Regrets

후회 안 하는 전쟁영웅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victory earned after forty regressions.

It was now my turn to leave their side.

Not by anyone else’s will, but by my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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