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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며칠 뒤, 클라이스는 다시 아버지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래, 결정했느냐?”

       “네.”

         

       옷깃을 가다듬은 클라이스가 말을 이었다.

         

       “전쟁터에 복귀하겠습니다.”

         

       가문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가 클라이스에게 내린 선택지는 두 개. 그중에서 클라이스가 고른 건 후자였다.

         

       ─ 공적을 세워서 네 죄를 만회해라.

         

       공적. 흔히 돈과 명예로 대표되는 것들. 더 쉽게 말하자면, 귀족이나 기사가 군주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는 것이 바로 공적이었다.

         

       “아비 말을 아예 못 알아듣는 건 아니구나. 그래, 죽지 말고 잘 살아 돌아와라.”

         

       세상에 딸내미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마는, 집안 인물들이 전부 군인인 하스펠트 가문에서는 예외였다. 가문의 모두가 전쟁터에서 마수를 도륙하는 걸 일생일대의 업적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클라이스는 수많은 형제자매를 제치고 가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녀가 가장 많은 마수를 잡아죽였고, 또 가장 많은 아군을 살려냈다. 거기까지만 해도 대단한데, 심지어 종군마도사로 있던 시절엔 동료들과 함께 제1차 저지선을 돌파했다. 그 공적 하나만으로 황제에게 포상을 받았다.

         

       웬만한 마도사도 뚫지 못하는 것이 1차 저지선이다. 1차 저지선을 넘어선 뒤로는 재앙급 마수의 비율이 늘어나고, 운이 좋지 않다면 이때부터 절멸급이 야전에 나오기도 한다.

       

       본래라면 인류는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방어만 줄창 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3차 저지선을 뚫고 오겠습니다.”

          

       2차도 아니고, 제3차 저지선을 돌파한다. 클라이스에겐 그런 원대한 꿈이 생겨났다.

          

       현실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낮았다. 그 말은 곧 마대륙의 심장부를 정통으로 족쳐버리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사실을 클라이스 자신은 물론이요,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3차?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괜찮습니다. 플레어가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미간이 좁아졌다. 클라이스와 정확히 같은 버릇으로 심경 표현을 하고 있다.

         

       “플레어 특허를 잃어버린 건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특허를 모두에게 풀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클라이스는 책상 앞에 두툼한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가방에서 무언가를 잔뜩 꺼내 올려놓았다.

       

       마전지였다. 식각과 코팅 과정을 거친 최상급 스크롤이 담긴 마전지가 한가득이었다.

         

       그 수량을 눈대중으로 어림하자면, 최소 1천 장 이상. 압도적인 물량에 클라이스의 아버지는 물고 있던 마력초를 재떨이 아래로 떨어뜨렸다.

         

       “전부 플레어인 게냐?”

       “네. 며칠 동안 이것만 만들었어요.”

         

       말도 안 되는 양이었다. 도저히 한 사람이 일주일 안에 만들 수 있는 개수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여전히 믿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비슷한 시기에 플레어를 완성했던 사람으로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음.”

       “가문에서 플레어를 개발하는데 쏟아부었던 돈은…. 전선에서 벌어들이는 재앙급 마수의 마석으로 어떻게든 조달할게요.”

         

       본가에서 묵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의 멘탈을 실시간으로 터뜨린 플레어의 구축식을 그대로 베껴서 사용해도 될지, 억울하게 표절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에테르의 논문에 적힌 대로 모든 걸 따라야 할지. 모든 게 금안족 소녀 하나와 이어진 고민이었다.

         

       시기에 사로잡히느냐, 사사로운 감정을 털고 효율에 집중하느냐.

         

       그리고 클라이스는 본분에 충실했다. 무료로 배포된 설계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플레어 스크롤을 작성한 탓에 지금에 이르렀다.

         

       ‘이거면 된 거예요.’

         

       다른 생각 않고 마대륙을 확실하게 밀어버린다. 재앙급 숫자를 크게 줄이고, 가능하다면 절멸급도 하나 잡는다. 플레어가 없었을 시절엔 꿈도 못 꾸었을 계획이다.

         

       “특허를 빼앗겼으니 전투에 사용해서 공적을 올린다… 바라 마지않던 판단이다.”

         

       원로의 재가를 받은 클라이스는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집무실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클라이스의 아버지, 레너윌 하스펠트는 재떨이에 얹혀 있던 시가를 툭툭 털어내고는 수심에 잠겼다.

         

       ─ 애애앵.

         

       “음, 벌써 모기가 기승이군.”

         

       레너윌은 손을 튕겨 자그마한 불꽃 상자를 만들어 눈앞을 날아다니던 모기를 가뒀다. 철로 된 모기는 그 안에서 불긋하게 구워지다가, 이내 잿더미 하자 남기지 못한 채 절명했다.

         

       잿가루가 떨어지며 쇳내음을 풍겼다. 전쟁터에서 수백 수천 번이고 맡아본 적 있는 고토의 냄새였다.

       

       그만큼 익숙한 내음.

        

       그러나, 아주 조금.

         

       “…….”

         

       아주 조금. 폐를 적시는 탄내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

         

         

       달무리가 설산 아래로 구붓하게 떨어진다.

       

       그 앞으로는 성인 남성 두 명에 달하는 높이의 담벼락이 있었는데, 이 담벼락은 하스펠트 본가와 외부를 단절하는 장치였다.

         

       보름이 달아오른 샛노란 달이 하나, 그 너머로 총총히 박혀 있는 은하수가 서너 무더기. 은하수를 이루는 별빛은 문득 자신을 떠난 조수의 눈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보기 꺼려졌지만, 아름다운 것에는 자꾸만 눈이 가기 마련이다. 앞으로 땅바닥만 보고 구를 걸 생각하면 하늘을 실컷 봐 둬야만 했다.

         

       그러다가 하늘 사이에서 은은히 빛나는 유황빛 구슬이 한 쌍을 마주쳤다. 위화감이 든 클라이스가 눈을 크게 치떴다.

         

       “뭐 어디 산책하시나 봐요?”

         

       눈앞에서 그런 목소리가 불현듯 들려왔다. 예기치 못한 말소리에 전신의 털이 곤두세워졌다.

         

       “……조수?”

         

       그리고 클라이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의외였다. 자신이 내뱉고도 의아해 할 정도로.

         

       공작가 사저의 담벼락에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소녀는 보름달을 채워 넣은 듯한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런 소녀의 인상은 에테르와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았다.

         

       단 하나, 머리칼이 백색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허, 조수라뇨. 제가 아는 조수는 조수간만의 차이 할 때 그 조수밖에 없는데.”

       “…여긴 공작가의 땅이에요. 누가 겁도 없이 담벼락 위에 올라가 있는 거죠?”

       “아…. 그래요. 이런 높은 곳에 있으면 위험하긴 하죠. 그래도 월담 행위는 재미있지 않나요?”

         

       방금의 대화만 하더라도 무례한 발언 투성이였다. 클라이스는 상대방을 칼로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자 소녀도 고개를 쳐들고는 클라이스를 내려다봤다.

         

       백발 금안의 소녀는 보름달을 등진 채 담벼락 위에서 풍류를 즐겼다. 한쪽 다리를 꼰 채 입에 마력초를 물고는 능청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클라이스는 한 발자국 물러나 상황을 관조했다.

         

       “금안족인가요?”

       “보면 몰라요?”

         

       소녀가 크큭거리며 마력초를 길게 물었다.

         

       홀몸으로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금안족이 마력초를 피운다는 건, 곧 어떤 마법을 시전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오랜 시간을 에테르와 보낸 클라이스에겐 익숙한 상식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 경계해야 한다.

         

       클라이스는 손에 화계의 원소를 응축시켰다. 이상징후가 보인다면 언제라도 스태프를 꺼내 머리를 깨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소녀는 클라이스를 향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입이 심심해서 담배를 하는 듯 보였다.

         

       “당신 누구죠?”

         

       클라이스는 질문과 동시에 수수께끼 소녀의 인상착의를 훑었다.

         

       일단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세 가지.

         

       첫 번째는 금안족이라는 것, 두 번째는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백발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제국이나 엘프에서 볼 수 없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브는 소녀의 머릿결과 닮은 하얀 색이었으나, 정작 모자처럼 벗고 쓸 수 있는 후드 부분이 없었다. 또한 두께도 일반 로브와는 달리 얇은 편에 속했다. 제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이곳은 북방, 한랭기후가 지배적인 곳이다. 저런 식으로 입었다간 감기에 걸리기 딱 좋았다.

         

       그럼에도 소녀는 춥다는 기색 하나 없이 주류연을 내뿜었다. 잠시간 담배를 틱틱거리던 소녀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짓더니, 클라이스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누구냐니…. 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시네요. 인간이 가장 감정적으로 변하는 시간대라서 깊은 사유를 하길 바라는 걸까요?”

       “무슨 소리를….”

       “그냥 알려드리면 재미없죠. 제가 누구일까요? 한 번 맞춰 보세요.”

         

       이름도, 출신지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금안족이라는 큰 정보가 있었지만 에테르와는 외모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달라 보였다.

         

       “혹시 엘랑카야 산맥에서 넘어온 건가요?”

       “스무고개! 그런 전략도 나쁘지 않아요. 맞아요, 일단 태생은 엘랑카야 대산맥이죠. 그리고요?”

       “노예상에게 잡히지도 않았고.”

       “정답.”

       “설화에 나온 금안족과는 달리 무례하네요.”

       “…무례?”

         

       소녀가 클라이스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그 시점에서 날카로워졌다. 담벼락 아래로 폴짝 뛰어내린 백발의 금안족은 클라이스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무례한 건 우리 동포를 잡아다가 마구 쳐부리는 느그들 얘기고요.”

         

       그 말에는 묘하게나마 살기가 담겨 있다. 수백 차례의 전투를 겪으며 살아남은 클라이스라면 그 살기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거 무단 침입인 건 알죠? 당장 나가지 않으면 제재하겠어요.”

       “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뭔….”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어이를 상실했다.

         

       구전에 따르면 금안족 절대다수는 순종적이며 착하다. 그런데 지금 이 현상은 무엇인가. 이런 금안족이 정말 숙맥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보면 그 설화에는 허점이 많았다. 인간조차도 백 명이 있으면 백 가지의 성격이 있기 마련인데, 어찌 금안족이라고 해서 종족 전체가 같은 성격을 공유한단 말인가?

       

       클라이스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에테르가 순종적이었던 건 그녀가 금안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노예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지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종족이라서 자신의 처지를 다른 종족의 노예들보다 빨리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절 여기서 불덩이로 만들건, 시종이나 집주인을 불러서 뭇매를 치든 해 보세요. 그런데 만약 그러려고 하시잖아요?”

         

       반대로 말하자면, 노예로 전락하지 않고 이곳에서 자유롭게 쏘다니는 자연계의 금안족은…….

       

        “대가를 치를 거야.”

         

       훨씬 위험하다.

         

       불을 휘감은 스태프를 아공간에서 꺼냈다. 그런데도 소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클라이스를 응시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까딱거리는 등 귀족의 눈에 거슬릴 만한 행동을 일삼았다.

         

       “아이고, 그렇다고 진짜 하시려고 하네. 됐어요, 경계하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오늘은 그냥 인사만 하러 나왔을 뿐이니까요.”

       “인사…?”

       “맞아요. 인사.”

         

       소녀는 클라이스의 앞을 태연하게 돌아다녔다.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 걸음걸이는 플레어 발표회에서 에테르가 보여줬던 걸음걸이와 거의 똑같았다.

       

       “여기서 오래 지내실 거잖아요? 그러면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제 고향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요.”

       “그게 뭔….”

       “아, 겸사겸사 주의사항도 하나 알려드리고요.”

         

       그 말에 온점이 찍히자마자 정신 사납게 앞마당을 밟아대던 발걸음도 우뚝 멈춰섰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와, 은은한 우라늄빛 눈동자가 맞닿았다.

         

       백발 금안의 소녀는 단 한 마디만을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3차 저지선은 넘지 마시길.”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조금 있으면 개강이군요… 으악!

    지금 스케쥴대로라면 월요일과 수요일은 학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단.. 글을 쓸 시간이 생기나 보고 9월 일정을 조절해봐야겠어요..!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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