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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처음 뵙겠습니다. 유진현입니다. 일단 앉으실래요…?”

         

       “네, 네헷.”

         

       여자가 다시 한번 혀를 깨문 듯 발음을 절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려 했지만 귓불만은 여전히 새빨간 그대로였다.

         

       나는 맞은편의 소파에 앉으며 여자가 두 손으로 건넨 명함을 힐끗 살폈다. 어두운 바탕에 금으로 글씨가 음각되어 내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S&C VIP 전담실 팀장 묘상아

         

       “…저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시는데, 그냥 편하게 부르셔도…”

       

       “아뇨, 아뇨!!”

       

       조심스러운 내 제안은, 일 초에 수십 번씩 좌우를 오가는 맹렬한 도리질에 그대로 막혀버렸다.

         

         

       “어떻게 제가 감히…큰 도련님께서 저에게 작은 도련님 전담 업무를 지시하셨으니,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시면…!”

         

       순간 절로 탄식이 새 나오려 해 간신히 삼켰다. 하긴 가면을 보고도 태연하게 응대할 때부터 낌새가 있기는 있었다. 역시 단장에게 사전에 언질이라도 받은 모양인 거 같은데.

         

         

       -이놈은 무슨 불만이 이렇게 많아? 임마, 주제에 왕자님 대접받으면 호강하는 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문득 예전에 단장이 했던 일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덩달아 꿀밤을 먹었던 이마에 절로 아릿한 감각이 올라온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런 대우와 나를 부르는 칭호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하나하나가 몹시 부담스럽기만 할 뿐.

         

       내 출신이 변방의 촌놈이란 걸 알아도 다른 이들이 여전히 나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봐 줄까…

         

       “…”

         

       어쨌든 지금 내 불편함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연민하의 취침 시간 전에 돌아가려면 여유가 그리 많지도 않고.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외부의뢰에서 사용할 장비를 좀 맞추려고요. 부대에서 쓰던 건 명목상 보급품이라고 해서 다 두고 왔고, 요람 기성품은 아무래도 몸에 잘 익지를 않아서…”

         

       요람의 공인 장비는 세화 누나와 승헌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다인중공업의 것만을 사용해야 했지만, 외부의뢰나 축제 토너먼트처럼 바깥에 노출되는 경우는 개인 스폰서의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규정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다행이라고 느꼈는지 모른다.

         

       다인 쪽의 장비도 결코 나쁘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보급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장비들이라 그런지 군에서 사용하던 것들과는 차이가 상당했으니.

         

       더듬이뱀을 잡을 때도 날을 몇 번이나 부러트려 먹었고, 그들의 방입자복은 영 둔탁한 게 역시 내 전투 스타일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음, 다인 중공업 쪽 물건도 뭐 나쁘지 않기는 한데, 그래도 우리 S&C와 비교하기는 좀 부족한 점이 많죠. 역시 작은 도련님, 안목이 아주 훌륭하십니다…!”

       

       겨우 표정을 수습한 묘상아 팀장이 연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들은 잡스러운 기업의 후원은 받지 말라고 했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다.

         

       S&C의 오너 가문은 단장의 본가인 흑련 사씨다. 부대에 있을 때부터 그들 회사의 장비를 써왔으니 별달리 바꿀 이유를 느끼지도 못했고.

         

         

       “다른 건 괜찮은데, 우선 방입자복이랑 블레이드를 맞추고 싶어요. 며칠 내로 의뢰에 나서야 하는데 혹시 그 전에 가능할까요?”

         

       “후후, 그 점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며칠이 아니라, 이틀 내로 즉각 수령하실 수 있게 해드리죠. 자, 그럼…”

         

       묘상아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가방에서 카탈로그를 꺼내 쫙-펼친다. 그러고는 곧 열정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럼 우선 방입자복부터 볼까요? S&C의 플래그십 라인이라고 하면 역시 오딘 시리즈죠. 제가 알기로 큰 도련님도 오딘을 사용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딘은 저한테는 너무 무겁더라고요. 군에서는 헤임달을 사용했는데, 관절부 가동률이 조금 안 좋다고 느껴져서…”

         

       “아하, 그렇다면…”

         

       그녀가 카탈로그의 여기저기를 손으로 짚는다. 몇 장의 종이를 더 넘기니 이윽고 무언가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다.

         

         

       “이거는 어떤가요?”

         

       “DA-1 나이트스토커네요. 마법 방호력은 좀 떨어지지만, 물리 방호력과 기동성이 뛰어나서 보통 일반인 범죄자나 돌연변이들을 상대하는 치안국 요원들이 입는 모델입니다. 도련님이 사용하시기에 썩 좋은 물건은 아니니, 그보다…”

         

       “이걸로 할래요.”

         

       “네?”

         

       정확히 내 요구와 부합하는 스펙의 방입자복이다. 애초에 마법 방호력은 내가 고려할 기능이 아니고, 그보다는 예측안과 딱 맞는 기동성에 혹시 모를 물리 방호력이 더욱 중요하다.

         

         

       “안 돼요! 절대! 작은 도련님께 이런 싸구려를 드리게 되면 나중에 제 목이…!”

         

       “저한테 딱 맞는 모델이에요. 절대 비밀로 할 테니 무조건 이걸로 해주세요.”

       

       묘상아 팀장이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결정은 사용하는 사람의 몫이다. 내 집요한 요구에 그녀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히잉…”

       

       “감사합니다. 그리고 블레이드는 K-3 마벨러스로 부탁드릴게요.”

       

       나는 이어 원래 사용하던 모델의 블레이드를 추가로 주문했다.

         

       원래 단장이 사용하다 처치 곤란으로 창고에 놓아둔 물건이었지만, 뜻밖에도 나와 딱 맞는 장비라 계속 애용했었다.

         

       단장의 말로는 스텔라이트 합금 비율을 50%까지 늘려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높은 입력을 필요로 해서 전환율이 뒷받침되지 않는 마법사는 애초에 사용할 수가 없는 모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환율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니…

         

         

       “마벨러스요? 역시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제가 알기로 현역 중에도 마벨러스의 잠재력을 전부 끌어낼 수 있는 마법사는 채 열 명도 안 되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혹시 약물도 좀 구매할 수 있을까요?”

         

       “S&C에서 제약은 취급하지 않지만,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당연히 구해드릴 수 있죠. 뭐가 필요하신데요?”

         

       “각성제랑 가속제. 둘 다 초고용량으로 필요해요. 군에 있을 때 에리틴이랑 레크사를 써봤는데 나쁘지 않더라고요. 될 수 있으면 그 제품들로…”

         

       “네? 안 돼요! 절대!”

         

       방금의 말과 달리,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완강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요! 에리틴이랑 레크사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만 쓰는 비상용 약들이잖아요! 둘 다 부작용이 말도 못 하는데…그런 걸 드렸다간 저는 그대로…”

         

       입에서 거품이라도 나올 듯 기세가 맹렬하다. 하지만 나도 별다른 도리가 없다. 마법사의 신체에 맞게 제조된 약을 무감응자인 내가 효과를 보려면 용량이라도 높아야 하니.

         

       그리고 나도 딱히 쓸 생각은 없다. 단 한 번 복용해 봤지만 그때도 며칠 내내 앓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누나들한테 심하게 혼난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어디까지나 비상시를 대비할 뿐이다.

         

         

       “무슨 일이든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이것도 꼭 비밀로 해드릴게요. 그리고 단장한테도 팀장님에 대해 좋게 말씀드릴게요.”

         

       “그, 그런 거라면…?”

       

       어쩐지 속물적인 기질이 있는 거 같아 가볍게 찔러봤는데 다행히 효과를 본 거 같다.

         

         

       “참, 고집은 큰 도련님보다도 더 하시네요…”

         

       결국 내 요구를 모두 수락한 팀장이 한숨을 푹-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후 가벼운 대화를 몇 번 주고받고 해가 떨어질 때쯤이 되어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럼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그런데 적화의 아가씨랑은 대체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제가 봐도 그분은 참…어렵던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요즘 사정이 많이 안 좋은 건가요?”

         

       “말도 마세요. 패천의 돼지 놈들 때문에 비상이에요, 비상.”

       

       묘상아 팀장이 머리가 아픈 듯 표정을 찌푸렸다.

         

         

       “지난달에 그놈들 주체로 의회에서 25조 규제가 통과됐는데, 사실상 고급 방입자복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우리를 저격한 법안이나 마찬가지예요. 참, 이럴 때 큰 도련님이 최고회의에서 우리를 대변해 주셔야 하는데…그분은 그런 일엔 관심도 없으시니…”

         

       그녀가 한탄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래도 작은 도련님이라도 요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주고 계셔서 다행이에요. 대외활동 실적도 좋으시고요. 백가의 그 아가씨한테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서도, 그래도 도련님 덕분에 그 영향력이…”

         

       “…”

         

       교장에게 처음 단장과 누나들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제대로 실감은 하지 못했다. 그저 일말의 가능성조차 거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래도 피부로 더 와닿을 수밖에 없다.

         

       어깨가 조금 더 무거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한편으로는 어찌 되었든 교장의 의뢰가 그럭저럭 잘 진행 중인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 그런데 혹시 S&C에서도 후원해 줄 만한 학생들을 찾고 있는 건가요?”

         

       “당연하죠. 저희는 개인뿐만 아니라 요람에도 후원하는 기업이에요. 누적된 후원 액수로만 따져도 탑 3 안에는 무조건 들어갈걸요.”

         

       “그럼 하예나랑 신무영이라는 학생들을 한번 확인해보고, 괜찮으면 그 둘에도 후원 제안을 해주실 수 있나요? 둘 다 첫 실습 때 상위 10% 안에 들어서 실력은 확실할 거예요.”

         

       “도련님의 추천이면 확실하겠죠!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 해볼게요.”

       

       묘상아 팀장이 당당하게 가슴팍을 내밀며 호언장담했다. 예나는 나보다 아는 게 없고, 무영은 특유의 곤란한 성격 탓에 조금 걱정스러운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결제 대금은 청구서를 보내주시면…”

         

       “농담이시죠? 얼른 들어가셔요.”

         

       묘상아 팀장이 손을 저으며 나를 카페 바깥으로 쫓아냈다.

         

         

       ***

         

         

       요람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어둑어둑하게 저문 뒤였다. 그래도 예정한 시간보다 그리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도밤나무 기숙사로 돌아온 내 앞에는 또다시 무언가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현관에서 들어가지 않고 서성거리는 연민하의 뒷모습.

         

       그리고 그 발치에 배를 깔고 앉아 있는 땅콩이…

         

         

       “뭐 하십니까?”

         

       “흐, 흐읏…”

         

       질문을 던지니, 연민하가 깜짝 놀란 듯 부르르 떨며 몸을 내 쪽으로 돌린다.

         

         

       “왜,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건데…”

         

       “…말씀드린 거보다 일찍 왔는데요. 혹시 다시 이상한 게 보이는 겁니까?”

         

       “그, 그건 아니긴 한데…그래도…”

         

       여전히 연민하는 증상의 재발을 몹시 두려워하는 듯하다.

         

       기숙사의 문을 여니, 내 뒤를 이어 졸졸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사람의 것이 하나, 그리고 네발짐승의 것이 하나…

         

       발치를 살피니, 너무나 당연하게 기숙사 안으로 종종걸음을 옮기는 땅콩이의 등이 보인다.

         

         

       “…진짜 네 고양이 아니야?”

         

       연민하가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먀앙!

       

       즉각 부인하니,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가볍게 발목을 깨무는 이빨이 느껴진다.

         

       연민하는 곧 침실로 향했고, 나도 그 옆의 내 방으로 향했다.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온 땅콩이를 보고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이제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무릎 위에 올리고 한 손으로 가볍게 털을 긁어주었다.

         

       기분 좋게 골골대는 땅콩이의 소리를 들으며, 익숙한 편지지를 찾아 누나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단장과 누나들은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며칠 전 받은 편지가 그들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휴식을 취하고 동부로 이동했고, 지루할 정도로 심심한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는 항상 조심하라는 내용이 길게 풀어서 적힌 편지가 각 세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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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아카데미 악당영애 교정하기
Score 3.8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reunited with the girl who left me when I lost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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