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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인생은 너무 어려워어.

         

       끙끙 앓는 표정의 파스텔은 이불에 꽁꽁 감싸인 채 애벌레처럼 뒹굴었다.

         

       이리 뒹굴었다가 저리 뒹굴었다가.

         

       으아으아.

         

       괴로운 양심을 털어내듯이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악마님! 악마님! 교단과 짝짜꿍 좀 했다고 평생 감옥행은 좀 심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가신들의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심한 기분.

         

       악마가 딱하게 내려봤다.

         

       『순진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싱클레어가 상단주가 된 과정은 의심쩍은 정황이 많아. 교단과 엮인 시점에 의혹을 확신하기엔 충분하지. 단지 시일이 지난 일이라 증좌를 찾기 어려우니 적당히 다른 죄목으로 죗값을 치르게 한 건 잘한 일이다. 피해자들이 저승에서 만족스러워할 거다.』

         

       파스텔은 기분이 복잡미묘해졌다. 악마님의 든든한 위로에 양심의 고통이 살짝 가시는 게 오히려 위기감이 느껴졌다.

         

       양심이 매끈매끈해지는 위로.

         

       꺼칠꺼칠해진 양심이 가슴을 콕콕 찌르고 있었는데 악마님이 사포를 들고 오더니 슥삭슥삭 문질러서 안 아프게 해준다.

         

       슥삭슥삭.

         

       매끈매끈.

         

       진짜 악마의 속삭임 같아.

         

       “악마님, 혹시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거 모르세요? 저는 아는데!”

       『흠.』

         

       악마가 파스텔을 꽁꽁 감싼 이불을 잡더니 끌어당겼다.

         

       파스텔은 이불이 벗겨지며 그대로 침대에 뒹굴었다.

         

       “우아앗!”

       『이미 일어난 일에 이유를 붙여서 더 괴로워하지 마라.』

       “완전 악마!”

       『악마 맞다.』

         

       허윽.

         

       비난이 전혀 통하지 않아.

         

       대충 주저앉아 있으니 악마가 유리병을 가져왔다. 받아 드니 투명한 액체가 찰랑였다. 무색무취의 독약이었다.

         

       『인수합병한 프레지 상단의 솜씨를 한번 확인해 봐라. 고단하고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내게 맡기려다가 실패하고 인수한 상단이니 그만큼의 실력은 있어야겠지.』

         

       파스텔은 움찔했다.

         

       으앗.

         

       사보타주한 게 들킨 이후로 남에게 자기 할 일을 미루는 나쁜 아이로 찍힌 기분.

         

       “저 그런 애 아니에요!”

         

       할 일은 다 하고 논다고요!

         

       “그냥, 그냥!”

         

       뭐라고 말할까, 뭐라고 말할까.

         

       양손을 버둥대다가 속마음을 외쳤다.

         

       “악마님한테만 이럴 뿐이에요!”

         

       우왕.

         

       악마가 굉장히 떨떠름해했다.

         

       『더 악질이야.』

         

       흐아?

         

       듣고 보니 그렇네?

         

       파스텔은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괜히 유리병을 살펴봤다.

         

       투명한 액체가 찰랑찰랑.

         

       우와아, 신기해라아.

         

       “이게 한 방울로도 드래곤을 죽이는 맹독인가요?!”

         

       으아아.

         

       초특급 맹독이 내 손에?!

         

       죽음의 무게가 무거워!

         

       덜덜덜.

         

       『그럴 리가. 드래곤을 죽이는 독이면 천금을 주고도 못 산다. 이건 신경독을 가미한 마비독이야.』

         

       잉.

         

       살짝 실망.

         

       “냄새 맡아봐도 되죠?”

       『상관없다. 그리고 넌 어차피 독이 안 통해.』

       “마석만 먹는 먹보 신체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요.”

         

       유리병을 열고 살짝 냄새를 맡아봤다. 아무 향도 안 느껴진다. 정말 무색무취네.

         

       손을 뻗자 마석 나이프가 날아와 손에 잡혔다. 유리병을 기울여 날에 부으려다가 그건 좀 콸콸 흐를 거 같아서 머뭇거렸다.

         

       “이게 그러니까.”

         

       악마가 작은 붓을 건네줬다.

         

       아하.

         

       붓을 유리병에 조심스럽게 넣고 액체를 쿡 찔렀다. 금방 촉촉해졌다.

         

       『너무 적시진 마라. 묻힌다는 느낌으로 문질러야 해. 흐르면 곤란해지기만 한다.』

       “네.”

         

       파스텔은 혀를 가볍게 빼물고 아티스트처럼 나이프에 붓질을 했다.

         

       치덕치덕 치덕치덕.

         

       투명한 독이 날에 코팅됐다.

         

       뭔가 크게 변한 거 같진 않은 나이프를 살펴봤다.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러면 끝인가요?”

         

       완전 쉬운.

         

       『맞다.』

         

       앙.

         

       파스텔은 독 나이프를 뚫어지게 보다가 서서히 손을 떨었다.

         

       “이렇게 손쉬운 방법으로 사람을 죽여도 되는 거예요?!”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간편한 방법에 생명의 무게가 담겨도 되는가.

         

       악마님이 매끈매끈하게 사포질해 준 양심이 다시 꺼끌꺼끌해지는 기분!

         

       “다, 다른 분들은 이런 방식을 보통 안 쓰죠?”

       『그렇지.』

         

       허억.

         

       파스텔은 입이 벌어졌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을 안 쓴다는 건 분명히 일말의 양심이 선을 지켜준다는 얘기.

         

       “그럼그럼 저만 특별히 나쁜 짓을 하는 중?! 남들보다 백만 배는 양심이 부족한 상태?!”

         

       양심이 다시 꺼끌꺼끌해지고 있어!

         

       콕콕 쿡쿡.

         

       으아아.

         

       마음을 괴롭히지 마아.

         

       악마가 잠시 고민했다.

         

       『양심 때문에 안 쓰는 게 아니라 위험해서 안 쓰는 거다. 독은 손쉬운 방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

         

       악마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관리하기 까다로워 식사하다가 사고사당하기 십상이고, 피아 구분이 없으니 항상 발라둘 수 없어 생각보다 쓰기 번거롭다. 게다가 악명에 영향을 주니 동료 구하기도 쉽지 않아지지.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다.』

         

       앗, 그런 이유들이?

         

       악마님의 열정 가득한 사포질에 양심이 다시 매끈매끈해지고 있어!

         

       이것이 타락의 기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파스텔은 수긍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흐앗!

         

       자연스럽게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갔어!

         

       으아아.

         

       『흠.』

         

       악마가 몸을 숙이더니 파스텔을 유심히 살펴봤다. 붉은 눈동자가 소녀의 상태를 훑었다.

         

       『상단주를 감옥에 보낸 일이 심신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줬나 보군.』

         

       악마의 손이 소녀의 이마를 짚어 온도를 쟀다.

         

       『열은 없나.』

         

       파스텔은 멍하게 악마를 올려보다가 이마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그런가 봐요.”

       『한동안 쉬고 있어라. 내가 말해둘 테니 하늘고래 채집에선 빠지고 남은 방학 동안 푹 쉬도록 해.』

         

       악마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실내를 둘러봤다. 하늘고래 등 위에 마련된 임시 오두막이었다.

         

       『아예 아카데미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도 좋겠군.』

       “어차피 방학 곧 끝나잖아요.”

       『그러니 더욱 푹 쉬라는 거다. 기분 전환을 하면 많이 나아질 거다.』

       “기분 전환…….”

         

       파스텔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악마가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문가로 향했다.

         

       『말해놓을 테니 푹 쉬어라.』

       “기분 전환……?”

         

       기분 전환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파스텔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반색했다.

         

       헉, 맞아!

         

       깜빡한 게 있어!

         

       이 중요한 걸 깜빡하다니!

         

       나도 참 얼마나 복수에 정신이 팔렸던 걸까!

         

       악마가 오두막 문을 열며 돌아봤다. 그리곤 상냥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이불 덮고 푹 자는 것도 좋은-』

       “악마님! 악마님!”

         

       파스텔은 대뜸 달려가 악마에게 부딪혔다.

         

       퍼억-!

         

       강한 충격음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악마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휘청였다.

         

       소녀는 키 큰 악마의 허리춤을 껴안고 올려봤다. 분홍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늘고래요! 하늘고래!”

         

       기분 따라 분홍 머리가 들썩였다.

         

       “대빵 큰 고래가! 완전 큰 고래가 있는데 전 여기서 뭘 하는 거죠?! 하늘고래가, 진짜 큰 고래가 둥둥!”

         

       둥둥 딩 둥둥!

         

       『자, 잠깐만 진정해라.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악마가 당혹스러워했다.

         

       “이만~한 고래요!”

         

       파스텔은 양팔을 힘껏 벌리고 빙그르르 돌았다. 머리카락이 악마를 찰싹 때렸다.

         

       “허억! 360도 회전 고래! 완전 큰 고래다!”

         

       악마가 양 손바닥을 펼치며 진정하라는 듯이 제스처를 취했다.

         

       『일단 천천히 숨을 내쉬고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해봐라. 그래서 하늘고래가 어쨌다는 거지?』

         

       파스텔은 악마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스읍, 후우.

         

       스으읍, 후우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늘고래가요.”

         

       악마가 안도했다.

         

       『듣고 있다. 말해 봐라.』

       “하늘고래가…….”

         

       파스텔은 말하다가 스스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럴 게 아니에요!”

         

       완전 비상!

         

       비상, 비상!

         

       『뭐가 어쨌다는-』

         

       곤혹스러워하는 악마의 팔을 잡아채고 달렸다. 오두막 문을 밀치자 시야가 트이고 사람과 가축이 뒤섞인 야영지가 보였다.

         

       “대빵 큰 고래가 기다려요!”

         

       개학 전에 다 구경해야 한다.

         

       “달려요! 달려!”

         

       소녀는 악마를 끌고 야영지를 달렸다. 그 너머로 울창한 녹색 자연이 펼쳐졌다.

         

       거대한 새가 푸른 하늘을 가르고 날아갔다.

         

         

         

       #

         

         

         

       파스텔은 남에게 자기 일을 미루는 나쁜 아이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진짜임!) 레너드와 친구친구들을 만나 하늘고래 채집의 현황을 살폈다.

         

       여러 가죽 포대엔 채집한 약초나 버섯 그리고 돌아다니다가 안전하게 적당히 주운 동물 뼈들이 가득했다.

         

       “다들 열심히 해주고 있네!”

         

       뿌듯.

         

       레너드가 떨떠름해했다.

         

       “넌 또 뭘 하고 있던 거냐.”

       “프레지 상단을 인수했어! 친구친구들은 이제 쉬어도 학생회 예산을 채울 수 있을 거야! 고생했어!”

       “아니, 의외로 일을 하네?”

         

       에헴.

         

       그레이스 상단주를 만나선 프레지 상단 관련 일을 처리했다. 인수하기 좋게 만든 덕에 거의 공짜로 삼키긴 했지만 프레지 상단이 가졌던 각종 부채를 떠안는 형식이기도 해서 추가 자금 투입이 필요했다.

         

       “결국 마계에 보낸 밀무역 선단이 돌아와야 해결되겠네요.”

       “그렇지요.”

         

       밀무역을 대신 보낸 멜리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시점.

         

       내 전 재산이 남의 손에 달린 상황이라니!

         

       덜덜덜.

         

       하지만 절친으로서 난 멜리사를 믿어!

         

       멜리사는 분명 밀무역에 적성이 있을 거야!

         

       비행 생명체의 서식지 이동으로 하늘길이 여러 차례 꼬이고 해적과 빈번히 마주치는 등 험난한 여정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파스텔은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잤다.

         

       멜리사, 널 믿어!

         

       쿨쿨.

         

       Zzz.

         

       업무들을 처리한 뒤엔 하늘고래 등 위를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우와아, 고래 숨구멍!”

         

       분화구 크기는 가뿐히 넘는 숨구멍을 등반해 들여다보기도 하고.

         

       “우와아, 날개 폭풍!”

         

       날개 지느러미가 만드는 폭풍을 옷과 머릿결이 거칠게 휘날리는 거리에서 구경하기도 했다.

         

       “바람 완전 세요! 날아갈 거 같은 기분이에요! 양팔을 파닥파닥! 진짜 날아갈 수 있는, 우와아악! 악마님! 악마님!”

       『아니.』

         

       그러다 진짜 날아가서 악마님이 잡아준 건 비밀이다.

         

       그 뒤엔 아기새들과 진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등의 시간을 보냈다.

         

       ―삐약! 삐약!

       “나도 삐약! 삐약!”

       ―삐이.

       “엣, 왜 그래? 마치 내가 새 언어로 욕이라도 한 것처럼?”

       ―삐약.

       “허억, 진짜야?! 나 새 언어를 욕부터 배운 거야?!”

         

       충격.

         

       추웅격.

         

       이러쿵저러쿵.

         

       시간이 흘러 방학이 끝났다.

         

       학업의 계절이 시작됐다.

         

       으아아.

         

       학업이래……!

         

       어쩌지, 어쩌지!

         

       아 맞아!

         

       나 원래도 공부 안 했지?!

         

       휴우.

         

       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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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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