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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검은 마도사라는 그의 이명은 게임에서도 지겹게 나왔다.

         

       -상대는 그 검은 마도사요.

       -당신들은 검은 마도사를 한 번 물리쳤다고 들었소.

       -포기하십시오. 검은 마도사의 힘에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게임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모두 그 별명을 알고 있었다.

       그때는 그만큼 놈이 쌓은 악명이 엄청나구나 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별명에 기원이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던 거다.

         

       지난 서커스 그랑프리를 습격했던 정체불명의 인물.

         

       브왈레는 그 이름을 짧게 언급하고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잡히지도 않은 범인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은 추도식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히 그 이름이 한 번 나온 것으로 테라스 석에 앉아 있는 곡예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슬픔, 증오가 번갈아 나타났다.

         

       브왈레도 분위기가 가라앉는 걸 느꼈는지 추도식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럼 저희 측에서 준비한 축하 공연이 있겠습니다!”

         

       그가 신호를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관현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장미 풍차 카바레의 명물, 캉캉(Cancan).

         

       하이힐을 신은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 올라와 경쾌한 음악에 맞춰 치마를 흔들며 다리를 쭉쭉 뻗었다.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수십 개의 새하얀 다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날갯짓하는 백조 떼를 연상케 했다.

         

       무용수들의 다리가 드러날 때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와 휘파람이 쏟아져 나왔다.

         

       -아가씨 다리 놀림 대단한데!

       -휘익, 여기도 좀 돌아봐 주세요!

       -오늘 밤 나와도 합을 맞춰보는 건 어떻소?

         

       정갈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신사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저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들이 내뱉는 말보다는 건전한 것이었다.

       듣는 무희들의 표정에도 불쾌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밖에서는 몰라도 여기서 이 정도 말은 성희롱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소리로 호응을 해주는 게 예의였다.

       무희들이 춤을 추는 데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즐길 줄 모르는 놈으로 취급받았고, 무희들이 개인적으로 눈을 마주쳤는데도 웃지 않거나 추파를 던지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다.

         

       엘라가 카바레의 예절이라고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발코니석은 다행히 박자에 맞춰 간단히 손뼉을 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다들 아름답네요, 그렇지 않나요?”

         

       아나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다.

       이런 패턴으로 그녀에게 여러 번 당했었다.

       만약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긍정했다간 대번에 이런 대꾸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럼 단장님은 왜 추파를 안 던지세요? 혹시 휘파람 부는 법을 모르시나요?

         

       그러나 잠시 기다렸는데도 예상했던 빈정거림은 날아오지 않았다.

       돌아보니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왜요? 좋은 공연이잖아요. 즐겨요.”

         

       이건 이것대로 고역이군.

         

       그녀가 눈웃음치는 광경은 두렵기까지 했다.

       차라리 예전이 나았던 것 같다.

         

       그때, 브왈레가 다시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가 위로 손을 뻗자, 무희들이 제자리에 멈춰서고 음악이 잦아들고 조명이 어두워졌다.

       밑에서 쏘아 올린 스포트라이트가 천장을 비추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우리 장미 풍차의 자랑을 소개하겠습니다! 19살의 나이로 이번에 밤의 무대에 올라서게 된 가수! 루즈의 꽃! 이본느!”

         

       홀의 천장에서 한 쌍의 밧줄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그네였다.

         

       밧줄 사이에 걸쳐진 판자 위에는 풍성한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있었다.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진홍색 실크 원피스에 망사 스타킹.

       그리고 그녀의 어깨까지 덮을 것 같은 넓은 챙의 모자, 그 아래로 드러나는 새하얀 얼굴과 도발적인 붉은색 입술.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의 얼굴을 비췄을 때, 여기저기서 헉 소리가 났다.

       완벽하게 꾸민 그녀의 미모는 예전에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몇 배는 아름다웠다.

         

       -과연 루즈의 꽃이야!

       -난 3년 전부터 그녀의 팬클럽 회원이었다네!

       -크으으! 이본느! 이본느! 이본느!

         

       과연 한 극장을 대표하는 대스타의 등장.

       그 호응이 남달랐다.

       그녀의 이름이 홀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네가 홀 안을 빙글빙글 돌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무려 수십 미터나 되는 높이인데도 그녀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테라스 석의 손님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가끔 두 다리만 그네 안장에 걸친 채 몸을 아래로 내려뜨리곤 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미끄러져 떨어지는 줄 알고 비명을 질렀던 손님들도 그녀가 능숙하게 허리를 튕겨 제자리를 찾자 와 하고 함성을 내질렀다.

         

       4층을 한 바퀴 돈 그네는 줄이 점점 길어지더니 3층, 2층으로 내려갔다.

       마지막엔 테이블 석의 손님들 머리 위를 지나 무대 위에 내려섰다.

         

       이본느가 관객석 전체를 향해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열광적인 함성과 박수가 뒤따랐다.

       메인 보컬이 등장했으니 캉캉의 본격적인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다시 조명이 돌아오고 악단이 연주를 재개했다.

       피아노의 경쾌한 연주가 돋보이는 곡이었다.

         

       이본느의 노래는 과연 루즈의 꽃이라는 그 이름값을 했다.

       누구라도 그 노래를 듣는다면 가만히 앉아 있기에 좀이 쑤실 것이다.

         

       -비밀은 여자의 가장 큰 매력이죠!

       -눈물은 여자의 가장 강한 무기죠!

       -보석은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죠!

         

       1층의 손님들 대다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전혀 그런 걸 즐기지 못할 줄 알았던 나이 지긋한 외교관들도 다소 방정맞다고 할 수 있는 몸짓을 해댔다.

         

       하긴 그 나라 현지의 문화를 즐길 줄 아는 게 외교관의 덕목 중 하나겠지.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아까 아나이스에게 시비를 걸었던 도스빌 남작이었다.

       카바레 VIP라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듯 무희 한 명과 호흡을 맞추며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그 빠른 스텝과 몸놀림에 오히려 무희가 쫓아가기 버거운 듯했다.

       카바레에 한두 번 와 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래층에서는 누가 큰 목소리로 이본느의 노래에 화음을 넣었다.

       발코니를 내려다볼 필요도 없었다.

       이 목소리는 수탉 미노바의 것이었다.

         

       그는 음성 증폭 장비 없이 그에 준하는 성량을 낼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인스피라였다.

       그의 노래가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의 노래는 대단했다.

       메인 보컬의 공연에 다짜고짜 난입하는 이 무례한 행동에도 사람들은 그의 실력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본느 역시 그가 있는 발코니석을 가리키며 엄지를 척 올려세우며 그와 호흡을 맞춰주었다.

         

       옆자리를 슬쩍 훔쳐보니 아나이스의 얼굴에서 이제 우울한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부르기까지 했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쇼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1층에는 이제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무대 주위로 몰려가 열심히 몸을 흔들어댔다.

         

       관혁악단도 악기를 내던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연주의 강도를 높였고, 특히 드럼을 치는 고수는 북을 찢어버릴 기세로 신들린 듯 팔을 휘둘러댔다.

         

       이본느와 미노바는 후렴구를 반복할 때마다 점점 더 목소리가 커졌다.

       그에 맞춰 사람들의 춤도 더욱 격렬해졌다.

         

       그들의 발 구름과 목소리에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공연이 절정으로 치닫는 그때, 이 지독한 소음 속에서 아나이스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아서 몇 번이고 되물어야 했다.

         

       결국 내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바싹 갖다 대야 했다.

       서로의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닿을 때까지.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저기요……. 단장님?”

       “네?”

         

       그녀는 나를 향해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비밀은! (비밀은!)

       -여자의! (여자의!)

       -가장 큰 매력이죠! (오오, 매력!)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제가 만약 단장님에게 좀 더 상냥한 태도로 다가갔다면…….”

         

       -눈물은! (눈물은!)

       -여자의! (여자의!)

       -가장 강한 무기죠! (오오, 무기!)

         

       “좀 더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려고 했다면…….”

         

       -보석은! (보석은!)

       -여자의!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죠! (오오, 친구!)

         

       “좀 더 많은 걸 드렸다면…….”

         

       -내 마음이 드러나도!

       -비밀은 여전히 묻혀있지!

         

       “뭔가 달라졌을까요?”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질문임을.

         

       -내 미소가 지워져도!

       -눈물은 반대로 강해지지!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미소를 지으며.

         

       “아뇨.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겁니다.”

       “그런……가요……?”

         

       -내 미모가 시들어도!

       -보석은 영원히 빛나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공연이 끝났다.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가 뒤따랐다.

         

       메인 보컬인 이본느, 그 뒤의 코러스 걸들, 무용수들, 합주단 전체가 무대 앞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소란이 가라앉기까지는 몇 분이나 걸렸다.

         

       공연한 극장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땀에 범벅이 되어 헉헉댔다.

       다들 정신 줄을 놓고 춤을 춰댔으니 지칠 만했다.

       사람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 이어서……가, 각 서커스단 단장들의 선서와 후원자들의 소개가 있겠습니다…….”

         

       브왈레도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헐떡댔다.

       그는 무희들의 맨 앞에 서서 춤을 췄다.

         

       뚱뚱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발놀림을 선보였다.

       젊은 시절에는 프로 댄서였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몸매로 엉덩이와 허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것은 관객에게서 상당한 경탄과 웃음을 동시에 끌어냈다.

         

       다른 발코니석을 둘러보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내려가죠.”

         

       아나이스의 미소는 평온해 보였다.

       사실 그건 평온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거겠지만.

         

       지켜보는 나도 안타까움에 속이 쓰렸다.

         

       그러나 나는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내게 허락된 무대는 TT0의 엔딩까지였다.

         

       앞으로 2년 4개월이 내 시간의 한계였다.

       어차피 떠나야 할 공간에 마음이 묶이고 싶지 않았다.

         

       이별의 순간은 엄청 힘들고 엄청 아플 테니까.

         

       그래서 의도적으로 단원들에게 기계적인 호감도를 얻으려는 것 외에는 정을 붙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유라크네에게 한 번, 엘라에게도 한 번 그 선이 무너졌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위안 삼아 방구석에서 팔다리 없는 삶을 살 것인가.

       확실하고 철저하게 내 삶을 바꿀 수단을 가지고 돌아갈 것인가.

         

       냉정하게 나 자신을 다잡았다.

         

       “후후, 그럼 저희도 내려가 볼까요?”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문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크게 고함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포르슈 경의 것이었다.

         

       -더 접근하면 무력을 행사하겠소!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와 무언가 때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포르슈 경의 저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포르슈 경이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작님, 제 뒤로 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온 무리는 푸른색의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었다.

       그들은 손에 진압봉을 단단히 쥔 채 우리를 포위했다.

         

       그들의 앞에는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 서 있었다.

         

       루즈 기마경찰대의 젊은 부사관, 사보.

       TT2에서 괴물로 등장했던 네임드 중 한 명.

         

       그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당신을 미성년자 유인, 착취, 살해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그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카바레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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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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