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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거짓 하나 없는 솔직한 감사 인사. 예상치도 못하게 훅 들어와서 그런 걸까? 뭔가 낯간지럽다. 오글거리기도 하고.

         

       “어, 어, 예.”

         

       어찌 말해야 할지 몰라 얼빠진 대답을 해버렸다. 뭔가 부끄럽잖아. 프란체는 이런 내 반응을 보더니 쿡쿡거리며 웃었다.

         

       “이상한 데에서 부끄러워하는구나.”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시니까요.”

       “고맙다고 한 것뿐인데?”

         

       프란체는 이런 내 심정도 모르는 듯, 능글 맞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공녀님께서 이런 건 어디서 배우셨는지.

       

       “부끄러운 거니?”

       “아닙니다.”

       “잔뜩 긴장했는데?”

       “…….”

       

       고마운 마음은 알겠다마는, 직접 들으니 좀 그래. 목덜미에서 쭉 내려가 등골이 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기분이다.

         

       “크흠. 목적은 끝났고, 할 일도 끝났으니 파티를 즐기시죠.”

       “그래, 모처럼의 황실 파티인데 즐겨야지. 같이 춤이라도 출까?”

       “어, 아니요. 공녀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프란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야 할 일?”

       “예. 성녀의 뒷조사입니다.”

       “아.”

         

       소미레의 정체나 목적에 관해서는 더 조사하기 어렵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알아볼 수 있을 터.

         

       ‘뭔가 꾸미고 있는지 확인해야 해.’

         

       황제가 오기 전까지 파티를 주도해야 하는 황태자가 늦게 입장한 것도 그렇고, 소미레가 황제와 같이 들어온 것도 이상하다. 소미레의 의도를 알았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

       

       절대 부끄럽고 낯간지러워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정말이다.

         

       “그런데 혼자 조사할 생각이니?”

       “예. 공녀님은 파티를 즐겨주시길.”

       “나만 노는 거 같아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프란체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춤을 못추는 건 아쉽지만 잘 부탁할게.”

       “예, 재밌게 즐기다 오시길.”

         

       그렇게 프란체는 다른 귀족들을 만나러 가고, 나는 곧장 소미레의 뒤에 붙었다. 역시나 황태자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황제랑은 뭐 없었나?’

         

       황태자는 무능 그 자체라 견제하거나 감시할 필요가 없지만, 프란체와 소미레의 관계에 황제가 엮이면 일이 많이 꼬일 거다. 프란체의 권력은 이제 막 성장 중이니.

         

       ‘자리를 옮기는군.’

         

       황태자와 소미레의 행보는 어제와 다른 바 없었다. 귀족들은 열심히 성녀인 소미레를 찬양하고, 황태자가 콧대를 올리며 기뻐하고. 무한 반복.

         

       ‘뭔가 없는 건가?’

         

       내 기우였던 건가? 부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러던 그때 들려온 소식.

         

       ―성녀님과 태자 전하의 혼인이 결정되셨다고요?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평민에 불과한 제가 태자 전하와 혼인을 할 수 있다니,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하하, 소미레도 참! 성녀와 혼인을 하는 내가 영광이지!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지 말도록!

         

       ‘소미레와 황태자가 혼인을 진행한다고?’

         

       황제가 늦게 입장한 이유는 혼인에 관해서 대화를 나눴기 때문인가. 이걸로 가장 큰 궁금증은 풀렸다마는.

       

       소미레가 이 시점에서 황태자와 혼인을 진행한다니?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로판소’의 모든 루트는 역하렘이다.

         

       소미레의 정실이 정해지는 건 예정된 결과지만, 이것도 마지막 시점에서 나오는 얘기.

         

       호감도 작업이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정실이 정해진다니. 이렇게 빠른 속도로 정실이 정해지면 소미레의 최종 목표인 역하렘은 이룰 수 없게 된다.

         

       ‘빨라도 너무 빨라. 다른 남주들과는 인연이 없었나?’

         

       그럴 리가. 당장 카서스만 해도 막대한 손해를 보면서까지 프란체에게 일방적인 파혼을 요구했다.

         

       카서스의 캐릭터 특성은 소시오패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특성.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파혼 사유를 갖다 붙였지만, 결국에는 소미레 때문이다.

         

       ‘카서스와 만난 건 확실하다. 다른 남주와 엮이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돼.’

         

       소미레의 행보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예측이 불가능한 수준.

         

       ‘카서스, 카서스는 어디에 있지?’

         

       걔도 이 소식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파티장을 살폈다.

         

       ‘없다.’

         

       어제는 분명 파티에 참여했다. 여러 귀족과 교류를 하는 것도 목격했고. 그런데 가장 중요한 오늘 참여하지 않았다니.

         

       ‘무조건 관계가 있겠군.’

         

       일단 카서스를 찾아봐야 한다. 그의 반응을 봐야 단서라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당장 파티장의 테라스로 나가 오러를 활성화했다.

         

       “후우.”

         

       아래로 뛰어내려 바깥으로 나왔다. 전신의 오러가 활성화한 걸 이용해서 빠른 속도로 황실 파티장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서스를 찾을 수 있었다. 미로와도 같은 정원의 외곽.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벤치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소미레한테 까였나?’

         

       이 게임은 죽고 죽으면서 남주들을 모으는 역하렘 게임. 핵심은 어장관리다. 아무리 이 게임 속 세계가 현실로 바뀌었다고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법.

         

       ‘애초에 소미레가 성녀로 발탁된 다음, 처음 목표로 잡은 게 역하렘이었어.’

         

       그런데 그 소미레가 목표였던 역하렘을 포기하고 빠른 혼인을 진행한다고?

         

       ‘말이 안 되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에 지금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회귀자, 플레이어. 그리고 저번에 생각난 또 하나의 가능성.

         

       이 세계에서 주요가 되는 인물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알지 못하며, 그에 따라 행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숨겨진 루트에만 존재하는 소미레.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확률은 이게 가장 높다.

         

       ‘그런데 카서스가 여기서 소미레를 포기할까?’

         

       10개가 넘은 루트 중에서 이런 전개는 처음인지라, 모든 엔딩을 본 나조차도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가 없다.

         

       ‘카서스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무조건 납치인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시오패스. 황태자와 척을 져 황실과 대립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자신의 가문을 버리면서까지 소미레를 가지려 들겠지. 카서스 하나 때문에 장르가 역하렘물에서 피폐물로 바뀌었다.

         

       ‘뭐, 이건 걔가 알아서 할 일이니 됐고.’

         

       지금까지의 정보를 얻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왜 황제와 입장했는지도 알았고, 소미레의 정체도 점점 알 것 같으니 엄청난 수확이지.

         

       나는 넋이 나간 카서스를 잠깐 바라보다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 * *

         

         

       파티장으로 돌아오니 프란체는 의자에 앉아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왔구나. 어딜 다녀왔니?”

       “잠깐 밖에서 바람 좀 쐬다 왔습니다.”

       “왜?”

       “어…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내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이 어이가 없었는지 프란체가 푸훗, 하고 웃었다.

         

       “너도 참 특이할 때가 있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덕분에 기운이 좀 생겼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물었지만, 프란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큰일은 없었어. 그냥 사업 얘기로 귀족들 상대하다 보니까 좀 지쳤을 뿐이야.”

         

       다행히 별일 아니었군.

         

       “어차피 목적도 이뤘겠다, 피곤하시면 일찍 돌아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건 안 돼. 공녀라는 위치 때문에 파티가 끝날 때까진 있어야 하거든.”

         

       그건 좀 불편하네.

         

       “그럼 바람이라도 쐬시겠습니까?”

       “그러자. 그게 낫겠다.”

         

       그렇게 북적이는 파티장을 나와 테라스로 향하고. 프란체는 난간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젖혔다.

         

       “그러고 계시면 위험합니다.”

       “어차피 네가 구해줄 거잖아?”

       “그건 맞지만요…….”

         

       나를 믿어주는 건 좋다만, 그렇다고 안전 불감증이 걸리면 어떡하니.

         

       “날씨가 참 좋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프란체의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처음 프란체에게 비수를 꽂았던 카서스에겐 겨울이 왔고, 상처를 딛고 일어난 프란체에겐 봄이 왔다.

         

       ‘원래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꼴 좋다, 개 같은 놈. 프란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더니 지금은 자기가 버려졌구나.

         

       “그래, 이제 얘기를 해보자.”

       “무슨 얘기 말입니까?”

       “성녀를 뒷조사했잖아? 뭐 건진 건 없니?”

         

       음. 핵심적인 내용은 말해줄 수 없는데.

         

       “몇 가지 알아낸 점은 있습니다.”

       “어떤 거니?”

       “성녀는 태자 전하와 혼인한다고 합니다.”

       “아, 그건 알고 있어. 지금 파티장에 소문이 자자하거든.”

         

       그럼 네가 기분 좋아질 만한 소식을 알려주지.

         

       “페르시아 소 공작이 실연당했습니다.”

       “…응?”

         

       프란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니?”

       “그, 이건 얘기하자면 긴 얘기입니다만…….”

         

       나는 프란체에게 카서스가 소미레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거기에 황태자, 소미레, 카서스가 삼각관계라는 것까지…….

         

       “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프란체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나왔다.

         

       “그럼, 그 성녀 때문에 나와 파혼한 거야?”

       “그렇습니다.”

       “그 손해를 보면서까지?”

       “맞습니다.”

         

       허, 프란체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미친 남자였네.”

         

       정확하게 봤다. 여자 하나 때문에 거액의 금액을 뺏기고 가문의 위신까지 떨어트렸다. 그것도 차기 공작이라는 새끼가. 이게 미친놈이 아니면 뭐겠나.

         

       “그렇게까지 하면서 파혼하고 성녀에게 마음을 전했는데, 정작 성녀는 황태자를 선택했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프란체는 실소를 터트리더니 결국, 푸하하거리며 폭소까지 했다.

         

       “웃긴 남자네. 사실 내게 웃음을 안겨주려고 계획한 건가? 그럼 정말 고단수네.”

       “페르시아 공작가에서 행하는 후계자 교육에는 유머도 포함되어 있나 봅니다.”

       “그러게나 말이야. 이렇게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정도면 배운 거지. 아니, 재능일 수도?”

         

       프란체는 아직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계속 실소를 흘렸다.

         

       “아무튼. 모처럼의 좋은 소식이었네. 그때 들었던 말을 아직도 잊지 않았는데.”

         

       나도 아직도 그때 카서스가 했던 말이 생생하게 들린다. 공작가의 수치, 데카르트의 쓰레기, 저주와도 같은 취급.

         

       그놈이 소미레에게 어떤 말을 들으며 까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부디 가슴속에 깊은 상처가 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수지타산이 맞을 테니까.

         

       “이제 공녀님은 꽃길만 걸으실 겁니다. 그런 남자는 잊으시죠. 유머 감각 말고는 장점이 없습니다.”

         

       내 말에 프란체는 피식 웃었다.

         

       “그래, 이제 후련하게 날릴 수 있겠어. 나도 내 삶을 살아야지. 네가 말했지? 과거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나는 이제 앞으로 나아갈 차례구나.”

         

       좋은 마음가짐이다.

         

       “맞습니다. 과거는 그저 자신을 성찰하는 용도로만 사용하면 됩니다. 앞으로 일어날 미래가 더 중요하니까요.”

         

       사람이란 대개 지나간 날을 후회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후회를 통해 무언가를 배워간다.

         

       과거는 이 정도로만 이용하면 적당하다. 괜히 여기서 더 파고들었다간 자신을 미워하고, 상처 주기 마련이니까.

         

       “과거는 자신을 성찰하는 용도로 사용해라, 좋은 말이네. 예전부터 느꼈는데, 너랑 말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 마치 종교인이랑 대화하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칭찬이겠지?

         

       “아무튼. 이제 들어가자. 남은 파티를 마무리해야지.”

         

       나는 예, 라고 대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체는 걸터앉은 난간에서 내려와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왔건만…….

         

       ‘응?’

         

       파티장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귀족들은 술렁거리며 눈치를 보기 바빴고, 페르시아 공작은 열불을 토해내고 있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뭔 일이래?”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 귀족들이 술렁거리는 걸 엿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충격을 좀 받았다.

         

       “아…….”

       “왜, 무슨 일인데?”

       “공녀님, 복수가 제대로 통한 거 같습니다.”

       “뭐? 복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이 파티장의 대화 주제는 카서스가 동성애자라는 내용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페르시아 공작가의 일원들이 그를 추문하고 있다. 더이상 가벼운 소문이 아니게 된 셈이다.

         

       ‘드디어 이때가 왔군.’

         

       내 오랜 주식의 그래프가 드디어 치솟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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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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