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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

    핥짝.

    푸드 코트 옥상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녹여 먹었다.

    높은 곳에 앉아서 바라보니, 장관이었다.

    황금의 물결.

    작은 발로 뛰는 황금 사신들이 마구 뒤엉키며 나아가는 해일이었다.

    검은 접객 복을 입은 마네킹들도 오와 열을 맞추고 질서 정연하게 맞섰다.

    검은 성채와 황금 파도의 충돌!

    하지만 검은 성채는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가루가 돼서 흩어졌다.

    짝짝짝.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박수를 치고 있으니, 황금 사신 하나가 꾸물꾸물 기어서 허벅지 위에 올라섰다.

    편안하게 내 배 위에 기대어 앉은 황금 사신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스탬프!

    황금사신의 표정이 왠지 칭찬을 바라는 표정이라서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니 좋아했다.

    황금 사신이 가져온 스탬프를 종이 위에 찍자, 역할을 다한 스탬프는 스르륵 사라졌다.

    이제 4개! 

    스탬프는 앞으로 5개만 모으면 끝이었다.

    다시 황금 사신들을 내려다보니 상황이 꽤 흥미롭게 변해있었다.

    도망치기 급급한 마네킹들.

    뛰고, 점프하고, 구르고, 달려드는 황금사신들.

    마네킹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자, 이 공간 자체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망가진 채널처럼 노이즈가 꼈다.

    처음 보는 놀이기구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쫓아가던 황금 사신이 공간 너머로 사라지기도 했다.

    하늘이 유리처럼 깨어지고, 땅도 지진이 난 것처럼 쩍쩍 갈라졌다.

    테마파크의 종말!

    꼬물꼬물. 

    스탬프를 찾은 황금 사신들이 하나둘 내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왠지 스탬프를 찾은 사신만 붙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긴듯했다.

    ***

    하나 남은 에너지바를 씹으며 걸었다.

    해결한 어트랙션은 총 3개.

    지우개로 보라색을 지워야 했던 ‘객실’.

    그리고 간단한 그림 덧셈 퀴즈였던 ‘드롭 타워’.

    지우개로 한 종류 이상 섭취를 지워야 했던 ‘푸드 코트’.

    여기서 제일 짜증나는 건 ‘푸드 코트’였다.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하니, 뭐라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들어간 ‘푸드 코트’.

    하지만 결국 푸드 코트에서 제공하는 것은 독이 든 음식들뿐이었다.

    그것도 한참 배가 고플 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객실로 돌아가 봐도, 객실 문은 굳게 닫혀서 열 수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객실을 나서기 전에 에너지바를 조금 더 챙겨 왔을 텐데.

    이제 다음 어트랙션으로 뭘 선택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지진이 테마파크를 덮쳤다.

    TV 화면이 혼선되는 것처럼 여러 장면들이 환상처럼 마구 겹쳐서 흔들렸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환상은 황금색 물결이었다.

    황금색의 작은 무언가가 꼬물꼬물 돌아다니는 환영.

    그 환영이 비춰질 때마다 지진이 발생했다.

    마치 테마파크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군요.”

    그 지진 사이로 당혹스러운 감정을 담은 마네킹의 혼잣말이 들렸다.

    그때 자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마네킹이 말을 걸어왔다.

    “손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겼다.

    평소와는 달리 억양이나 감정이 현격하게 풍부해진 느낌이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마네킹이 멋대로 혼자서 뛰어 간 곳은 ‘스마일 바이킹 매표소’였다.

    원래 매표소에는 그 담당 마네킹이 있어야 했는데,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마네킹은 매표소를 뒤지더니, 스탬프 하나를 찾아냈다.

    “손님, 빨리 오시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뭐, 뭐야? 이것도 뭔가의 함정인건가?”

    “함정 따위가 아닙니다. 테마파크가 망가졌을 뿐이죠. 이렇게 스탬프를 수집할 수 있는 건 지금뿐. 말씨름할 틈이 없습니다.”

    이곳은 사람을 속이려는 의도로 가득한 테마파크라서 그런지, 마네킹의 저 발언도 수상쩍게 들려왔다.

    확실히 심상치 않은 진동과 분위기를 보면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서, 저 마네킹이 나를 돕는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도무지 신용이 가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 나를 도울 이유가 없는 녀석이 돕겠다고 나서는 건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

    “흐음, 평소에는 성급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땐 의심을 하시는군요. 굳이 설득할 필요는 없지만, 몇 가지 이유정도는 들 수 있습니다.”

    마네킹은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우선, 저에게는 당신을 돕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꼴이 되어버리긴 했어도, 저도 원래는 인간. 이 테마파크의 희생자였습니다. 저는 이런 꼴이 돼서 붙잡혔지만, 손님마저 그럴 필요는 없겠죠.”

    확실히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투이기는 했지만,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시죠. 이 테마파크의 붕괴가 셔틀버스까지 이어지면 끝입니다. 돌아갈 수단이 없어지니까요. 선택하시죠. 판단은 손님 몫입니다.

    마네킹은 스탬프를 넘겨주고는, 내게 선택을 종용했다.

    마네킹이 뭔가 바뀐 건 분명했다. 

    감정이 좀 더 풍부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테마파크가 무너지고, 마네킹들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테마파크의 함정일지 아닐지 어떻게 알겠는가?

    역시 판단을 하기 힘들 땐, 이제까지 내 인생을 지탱해온 좌우명을 따르는 게 좋겠지.

    ‘선택이 고민 될 때는 우선 한다!’ 

    “좋아! 하자! 안내해. 마네킹.”

    그 후로 나는 테마파크 안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이따금 황금색 무언가가 지나갈 때마다, 건물이나 기둥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쇠가 짓이겨지면서 쓰러지는 소리,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테마파크 안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흐음, 생각보다 큰 붕괴가 일어나고 있네요. 도대체 저런 강대한 존재가 어떻게 공원 안으로 들어온 건지 모르겠군요.”

    “그냥 아무나 초대장을 주던데, 그래서 그런 거 아냐?”

    “아뇨. 접객원은 테마파크가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만 초대장을 줍니다. 하여튼,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셔틀버스가 망가지면 스탬프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요.”

    ***

    오랜 시간 머리 대신 착용하고 있어서 익숙해진 인형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문신투성이의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대리석 벽에 기댄 채 서있었다.

    이제까지 계속 뛰어다녔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마네킹, 우리가 성공한 건가?”

    “네, 이제 셔틀버스를 타고 떠나기만 하면 끝입니다.”

    “하, 드디어 끝났네.”

    주르륵 주르륵.

    힘없는 걸음걸이로 질척질척한 진흙을 발로 끌면서 대리석 건물로 들어서는 여자.

    뒤를 돌아보니, 스마일 테마파크는 그 끝을 맞이했다.

    손님들처럼 표현하자면 스마일 테마파크는 ‘서비스 종료’였다.

    테마파크는 그 힘을 잃고 허공 속으로 스며들듯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누군가가 테마파크의 숨겨진 엔딩을 발견한 것이다.

    이름 모를 강대한 존재가 난동만 부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숨겨진 비밀까지 밝혀내서 테마파크의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은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분점을 내겠다는 테마파크의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테마파크가 완전히 붕괴하기 전에 스탬프를 다 모아서 다행이야.

    ***

    가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었다.

    아 배고프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다.

    제대로 걷는 것도 귀찮아서 신발을 끌며 걸었다.

    질척거리는 검은 진흙. 

    두통이 생길 정도로 지독한 석유 냄새.

    쓸데없이 멀리 있는 셔틀버스 정류장에 드디어 도착했다.

    편법이라도 스탬프를 전부 모았으니까.

    이제 오브젝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대리석 건물로 들어서자, 비치되어 있는 머리통들이 보였다.

    새로 추가된 7개의 대가리들.

    ‘병신들 결국 통과를 못했구만.’

    같이 투입된 사형수 동료들은 모두 대가리만 남아서 전시 중이었다.

    나처럼 편법을 쓰지도 못한걸 보면, 몇 번 통과 못하고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후, 이제 끝이다.

    무죄 방면.

    그 결말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 살인 오브젝트 속에서 뒹굴던 일도 밖에서는 괜찮은 추억이 되겠지.

    굳게 닫혀있던 셔틀버스의 문은 나를 환영하는 것처럼 활짝 열려있었다.

    셔틀버스의 계단을 한칸 한칸 올라서다가, 뒤를 돌아보니 마네킹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마워. 넌 생명의 은인이야.”

    “흐음,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요.”

    표정을 읽기 어려운 인형 머리통이지만, 지금은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마네킹은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아무리 테마파크의 희생자라도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렴 어때.

    클리어했는데!

    버스 위로 올라서서 좌석에 앉자, 마네킹은 운전석에 앉아서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피곤해서 그런지,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마네킹은 즐거운 듯이 콧노래를 하면서 버스를 몰고 테마파크를 빠져나갔다.

    잠결에 마네킹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손님 한숨 푹 주무십시오. 버스 이용에 필요한 것은 충분하시니 금방 도착할 겁니다. 궁금한 사항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이, 없어.”

    “없으시면 동의하신 걸로 알고 출발하겠습니다.”

    마네킹의 의미심장한 말에 예전에 가졌던 의문이 문득 떠올랐다.

    스탬프는 9개인데, 코인은 왜 10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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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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