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57

       어떤 실험이든 여러 번 해 봐야 신뢰성이 생기는 법이다.

         

       일주일간 개씹노가다를 진행했다. 스크롤로 모기향을 만든 뒤 그 살상력을 확인하는 데에만 한 주를 날려먹었다.

         

       그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다. 조례시간마다 황자가 나한테 시비를 걸어오질 않나, 그때마다 이르카가 빙창을 들고 내쫓질 않나, 프레이는 하교할 때마다 보드카 빨자고 독촉하질 않나…. 그나마 로테에게 과외를 해주고 은화를 받는 것으로 자기위안을 삼는 일상.

         

       그런 일상이 날마다 반복됐다. 하스펠트 교수가 없는 교실은 그럭저럭 평온하다.

         

       “으.”

         

       요새 무리를 했나. 하스펠트와 기싸움하던 동안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리니 죽을 맛이다.

         

       머리를 감싸쥐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맡에선 수제 모기향이 잘 작동하고 있다. 바닥에는 날벌레 몇 마리가 EMP를 맞아 죽어있었다.

         

       모처럼의 주말이다. 이틀을 알뜰하게 보내야지.

         

       주말 루틴은 단순하다. 공부, 연구, 과외, 그리고 다시 공부.

         

       “아.”

         

       쉬는 건 저승 가서 해야겠다.

         

       새벽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에 도서관으로 나선다. 일정상 오늘은 수계마도 서너 개를 습득하는 게 목표였다.

         

       마왕이 부활했을 때를 대비해 핵융합 장치를 만들어두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본분은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벗어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선 양장본에 총망라된 마도 목록을 하나씩 보고 이해해야 한다.

         

       수계마도에 관한 책 몇 권을 책장에서 뽑아와 자리에 앉았다.

         

       [중급수계마도학총론]

         

       읽기 싫게 생긴 제목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꼬우면 처음부터 논문 심사를 하지 말았어야지.

         

       나는 책장을 하나씩 넘기며 키워드가 될 법한 문장들만 빠르게 훑었다.

         

       [수계(水界)란 물에 관한 마도를 뜻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수계의 범위가 확장되어, 흐르는 모든 것에 관한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유체에 관한 역학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상온에서 물처럼 흐르는 금속이 있다고 하자. 이 철은 지계마도에 속하는가, 아니면 수계마도에 속하는가?]

         

       [수계마도사들은 이것이 액체의 성질을 지니므로 수계마도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한다.]

         

       진짜 재미없네. 나는 수십 페이지를 뭉텅이로 뛰어넘겼다.

         

       […같은 맥락으로, 빙계 또한 수계의 일종으로 포함한다.]

         

       [이 장에서 배울 건 빙계마도 전반이다. 여러분에게 중급 수준에 달하는 빙계마도를 설명하고, 그 메커니즘과 격발법이 담긴 스크롤을 제공할 것이다.]

         

       빙계마법이라.

         

       이르카의 특기분야가 빙계였다. 이르카는 빙창을 사용하고, 질량이 있는 모든 걸 얼려버리는 재능을 가졌다. 생각해보니 걔가 흐르는 물을 다루는 걸 못 봤는데.

         

       당장 빙창을 사용하고, 화재가 있다면 그 부분을 얼려버릴 정도로. 이르카가 흐르는 물 자체를 쓰는 적은 본 적이 없다.

         

       빙계마법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이시클 애로우,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어쩌구 저쩌구.

         

       이쪽은 구미가 안 당긴다. 대신 흥미로운 게 거의 끝자락에서 나왔다.

         

       [상급 수계마도 ─ 프로즌(Frozen)]

         

       [액체 상태의 물을 얼리는 기술. 급속 냉각이라고도 한다.]

         

       [살균 기능을 포함하고 있어 화계마도와 함께 사용하면 방역에 사용할 수 있다.]

         

       방역이라….

         

       이거 재미있네. 한 번 배워볼까?

         

       [□ 이 마도를 익히는데 필요한 선결조건 (마법계열)]

         

       [아이시클 애로우(미습득)]

       [아이스 스피어(미습득)]

       […….]

         

       아, 진짜 재미없네.

         

         

       **

         

         

       불편하다.

         

       황성에 들어올 때마다 구역감이 치민다. 지금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 뒤섞인 듯한, 그런 느낌. 그 부조화가 오장육부를 찔러온다.

         

       그래봤자 클리온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최상급 고유마도 ─ 불복종(Disobedience)]

         

       단지, 엘프에게서 받은 스크롤을 사용한 채 앞으로 나아갈 뿐.

         

       “어이쿠, 오셨습니까? 클리온 전하.”

         

       침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맞은편 의자에 블랜튼 공작이 앉아있었다.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한 클리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황자의 침실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정상이 아니군.’

         

       잭 블랜튼 공작, 필리우트 제국을 떠받치는 네 기둥 중 하나가 그였다.

         

       물을 다스리며, 제국 수계마도의 정점이라 불리는 존재. 정작 클리온은 그가 마도를 다루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녀석이 마수란 말이지.’

         

       카우렐리아에서 유학 온 엘프 남학생은 이 자가 자신을 세뇌하고 있던 마수라고 알려주었다.

         

       처음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제국의 사대공작이 재앙급 이상의 마수라니. 그랬다면 이 나라는 진작 망해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맨정신’으로 한달가량 블랜튼을 지켜보았던 클리온이 내린 판단은 하나였다.

         

       ‘망했군.’

         

       제국은 실시간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위계가, 기강이 사라지고 있다. 당장 이 자가 황자의 침실에 무단침입한 것만 해도 그렇다. 이건 제국의 율법을 위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연기해야만 한다.

         

       ‘느자구없는 놈.’

         

       본심을 숨긴 채, 그저 이만을 갈고 있어야 한다.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식은땀까지 흘리시고. 감기라도 걸리신 건지요?”

       “별 일 아니다. 그냥 피곤할 뿐이야.”

       “혹시 그 금안족 계집애가 전하에게 또 대들기라도 했습니까?”

       “아니…….”

         

       멈칫.

         

       “…그래! 그 천한 년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말끝마다 토를 달더군!”

       “그러면 그에 상응한 조치를 내리셔야지요. 일전에 황자 전하의 옥체에 흠집을 낸 것도 그 계집애이니 말이죠, 이번 기회에 죄를 한 번에 물어 법적으로 처리합시다.”

         

       무력도, 틸레트의 예외적인 규율도 통하지 않으니 사법기관을 압박하여 ‘합법적으로’ 보내버린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제2황자가 세뇌에 걸려 있는 상태라면, 말이다.

         

       “아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일을 잘못 벌였다가 내 위신이 추락하기라도 하면 블랜튼 공작이 책임지기라도 할 건가?”

       “허허.”

         

       블랜튼은 쓰게 웃으며 클리온을 노려보았다.

         

       “법 위에 전하가 계십니다. 무릇 황제가 있어야 가신이 있고 국민이 있는 법인데, 어찌 그런 사사로운 규율에 얽메이실 생각이신지요?”

       “…….”

         

       읽었다. 블랜튼은 자신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자, 스트레스가 쌓이신 듯하니 이 얘기는 뒷전으로 미뤄둡시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제가 여는 연회에 참석하시는 게 어떠신지?”

       “연회라고? 이런 시국에 말인가?”

       “참 좋은 때 아닙니까. 역병이랄 것도 하나 없고, 경제는 날이 갈수록 호전되고 있습니다. 자금은 또 어떻습니까? 재상께서 열심히 일해주신 덕에 제국의 국고가 마를 날이 없습니다! 연회 한 번의 사치 정도는 값싸게 먹히는 것이지요.”

         

       미친 새끼.

         

       ‘엘프 군, 자네 말이 맞았어. 물증은 부족하지만 이 자가 틀림없는 마수다.’

         

       기계로 됐는지,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는 상관없다. 제국을 좀먹는 부패 관료는 한 명도 빠짐없이 숙청 대상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인질로 잡힌 상태였다. 여기서 친족을 구하겠답시고 움직였다가 블랜튼이 알아차리면 큰일이었으니. 클리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어떤 파티인가?”

       “실은 오늘이 제 딸의 생일입니다. 한 번 만나 뵈러 가시겠습니까?”

       “안내하게.”

         

       블랜튼 공작은 황자를 황성 내 별궁으로 초대했다.

         

       황성은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황족이 기거하는 중앙의 큰 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별채가 존재한다. 북쪽부터 시작해서 시계 방향으로 화계, 수계, 지계, 그리고 공계다.

         

       네 별채는 황제가 사용을 허가했다. 원칙상 사대공작이 별채를 하나씩 소유한다.

         

       별궁을 어떻게 쓸지는 자유다. 거주지로 써도 되고, 접객실로만 써도 된다. 북방 원정에 눈이 돌아간 하스펠트 가문은 별채를 창고로 써먹었다.

         

       “여기가 연회장입니다. 술도 여자도 있으니 마음껏 즐겨주시길.”

         

       초저녁부터 휘황찬란한 파티가 벌어졌다. 불야성. 창문 너머로 폭죽이 올라온다.

         

       “모두 제 딸의 생일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차린 건 얼마 없지만 마음 편히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블랜튼 공작 파벌에 속한 이들이다. 원래라면 이들 모두 제2황자 파벌이기도 하겠지만, 어째서인지 정치적으로 고립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게 식은 술을 홀짝거리며 소파 한쪽에 앉았다.

         

       바싹 타들어가는 속에서부터 텁텁한 기운이 올라왔다. 독배를 내려놓은 클리온은 멀리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측면을 흘끔거렸다.

         

       아름다운 선율이 귀를 파고든다. 클리온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했다.

         

       푸른 빛이 감도는 보라색 계통의 머리카락. 아쿠아마린과도 같은 벽청색 눈동자. 치장이 달린 드레스에선 고풍이 묻어나온다. 그런 외양의 소녀가 드높은 무대 위에서 말총으로 된 현을 울린다.

         

       가사는 없었다. 그러나 사이렌이 내는 음색처럼 사람을 홀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경쾌하면서도 애절함이 묻어나오는 곡조에 심장이 뭉클거린다. 그 노래는 가상의 악보에 맞춰 4분에서 5분가량 이어졌다.

         

       “따님의 연주솜씨가 훌륭하군요. 혹여 무슨 곡인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서방의 세라파냐라는 사람이 작곡한 ‘타르케닐 위령곡’입니다.”

       “위령곡이라… 누굴 위령한다는 말이십니까?”

       “그녀가 속했던 나라의 백성들이지요. 세라파냐는 중세에 존재했던 타르케닐 왕국의 마지막 남은 왕족이었습니다. 그녀는 왕국이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지기 직전, 바이올린으로 이 곡을 연주하며 적군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호오….”

         

       어린애 생일파티에 연주할 곡으로는 영 아니었다. 차라리 애들 듣는 것으로 준비했다면 나았을 것을.

         

       “우리 로즈마리가 가장 잘 켜는 곡입니다. 딸애가 세라파냐의 곡을 좋아하거든요.”

         

       그 곡조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갈채를 쏟아냈다. 그 기세에 힘입은 블랜튼 공작의 딸이 비슷한 곡조의 음악을 몇 개 더 연주했다. 전부 위령곡이라고 한다.

         

       ‘공작 부인도 고생이군. 음악에 재주 있는 딸을 마수가 채갔을 줄이야.’

         

       아니, 딸도 마수려나….

         

       거기까진 모르겠다.

         

       저 순진한 물빛 눈동자를 보면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 저런 순진무구하고, 어른들의 칭찬에 방긋 웃는 소녀가 마수란 말인가.

         

       물론 마수가 약아빠졌다는 구전은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클리온은 불편한 마음을 달래고자 술을 넘겼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빌며.

         

         

       **

         

         

       연회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파티는 다음 날까지 진행된다. 지금은 잠시 숙취를 푸는 시간대였다.

         

       모두가 잠든 새벽, 파티 참석자들에게 잘 곳을 마련하고 온 블랜튼 공작은 별채의 어느 방으로 향했다. 이곳은 블랜튼 공작이 허락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다.

         

       끼이익, 방문이 을씨년스런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 내부에는 소파가 있다.

         

       그 소파에 로즈마리가 앉아있다.

         

       “아빠!”

       “…….”

         

       거북 인형을 가지고 놀던 로즈마리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블랜튼에게로 달려왔다.

         

       “아빠, 저 오늘 연주 잘했죠?”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4석님.”

       “헤에….”

         

       로즈마리의 미소는 미묘한 쪽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털어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사과맛 사탕.

         

       사탕에는 사과향뿐만 아니라 마력도 첨가되어 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어린애가 마력을 보충할 수단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7석은 분위기를 맞출 줄 모른단 말이야. 이럴 땐 ‘구래 우리 딸~’하며 안아줘야 한다고.”

       “…….”

         

       아드득, 까드득. 로즈마리는 사탕을 씹어대며 발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는 마법진 하나가 구축되어 있었다.

         

       공간이동진. 물체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최상급 마도진이다.

         

       로즈마리가 사탕을 씹어댄 뒤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마법진이 발동됐다. 방안이 환히 빛나며 두 사람을 어딘가로 인도했다.

         

       둘은 눈 깜짝할 새에 드높은 철탑 입구에 도착했다.

         

       “아오, 추워라. 혹시 부동액 남은 거 있어?”

       “없습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탑 안까지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주변은 온통 빙하뿐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을 넘겼다. 분명 위도만 바꾸는 공간진이었기에 바깥 풍경은 시커메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밤하늘은 새하얗다.

         

       “들어가자. 다른 군단장들이 기다려.”

       “…예.”

         

       그야 그럴 수밖에.

         

       이들이 워프한 곳은 북쪽 땅의 끝자락, 또한 제국에서 ‘제3차 저지선’이라고 불리는….

         

       마대륙의 중심이었으니까.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