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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

       만약 시온이 이곳에 있었다면 꽤 많은 것을 도와주었을 테지만.

       

       하렌 왕국에서는 나 혼자였던 탓에, 아무래도 대부분의 것들을 나 혼자서 해결할 수밖에는 없었다. 식사 때가 지났음을 알리듯이 괘종시계의 종이 한번 울렸다.

       

       그제서야 점심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이 세계에서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이 꽤 흔한 일이니,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리저리 어질러진 원고를 정리하고 하나로 묶었다. 가장 앞 장에는 소설의 제목이 쓰여있었다.

       

       

       [1984]

       

       “1984…, 으음, 1084년으로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제목은 원래 제목인 ‘1984’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배경이 되는 ‘오세아니아’니 ‘유라시아’니 하는 지명도 그대로 놔두었고.

       

       소포클레스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소설은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 될 것 같다.

       

       일종의 SF적 요소도 있을 테고.

       

       흔히 ‘펑크’라고 부르는 SF 장르의 근본이 대체역사 소설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 시온한테도 한 부 보내놔야겠네.”

       

       

       하렌어가 아닌 제국어로 적은 ‘1984’의 원고를 종이 봉투에 넣어서 잘 포장했다.

       

       특급 송달로 보내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숙소에서 일하는 직원을 불러 우표를 사려다가, 가방에 우표가 몇 장 들어있다는 걸 떠올렸다.

       

       

       “아, 어린왕자 우표가 아직 있었구나.”

       

       

       그렇게 1984를 집으로 보내고, 겸사겸사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이 주소로 우편을 보내달라고 이야기했다.

       

       시온이 알아서 잘 하겠지.

       

       .

       .

       .

       

       [맑고 쌀쌀한 4월의 어느 날, 시계들이 열세 번 울리고 있었다.]

       

       

       1984는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봄을 상징하는 4월을 춥다고 표현하고, 열두 번밖에 울리지 않을 시계가 열세 번 울린다고 이야기한다.

       

       이 기묘한 문장을 접하는 순간, 독자는 직감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 세계는 무언가 잘못되어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에 의문을 가져야하는’ 거짓으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거, 흥미롭군. 굉장히 흥미로워…. 마치 정말로 실존하는 하나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허구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지….”

       

       

       편집장은 이 소설을 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듯했다.

       

       순식간에 원고를 전부 읽어내리고 핵심을 요약하는 솜씨는 ‘출판업’의 베테랑이라고 할만했다.

       

       원고를 돌려준 편집장이 한손에 얼굴을 기대고 스스로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무언가를 고민할 때의 버릇인듯 보였다.

       

       

       “그런데, 난해한 탓에 잘 팔릴지는 모르겠군. 그리고 이걸 지금 출판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르지 않나? 아직 레미제라블이 꽤 불티나게 팔리고있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조금 간격을 두고 출판하면 딱 적당할듯싶은데…. 만약 이 소설이 나쁜 평가를 받아서 레미제라블까지 팔리지 않게 되면 곤란하니 말이야. 문학이라는 게, 결과를 짐작하기 어려운 분야 아닌가.”

       

       

       확실히 1984의 이야기가 난해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물론 전생을 기준으로 ‘조지 오웰’은 디스토피아적인 사회상을 굉장히 명료하게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작가이지만, 그것은 ‘세계대전’이라는 암흑기를 거친 현대인의 기준일뿐이다.

       

       이 세계에서는 아직 ‘디스토피아’라는 개념조차 낯설게 느껴질 터였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꽤 잘 팔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집필을 권유하신 소설이지만 그렇다면 출판은 나중으로 미루어야─.”

       “─라고는 하지만! 자네의 소설은 굉장히 훌륭해! 이런 건 설령 팔리지 않더라도 반드시 출판해야하고 말고! 상업성을 이유로 예술이 발목을 붙잡힌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일 아니겠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1984가 보여주는 ‘미래’는 결국 나태왕이 걱정하던 미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부정하고 거짓을 휘두르며 진실을 그저 쓰기 편한 도구로 여기는 미래.

       

       모든 국인들에게 존경받고 숭앙받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 권위를 영원불멸한 것으로 만들어 모든 국인을 예속시키는 미래.

       

       나라의 모든 역량을 동원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 그 권세를 휘둘러 한 개인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자유를 앗아가는 미래.

       

       모든 권리에 우선하는 순수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오직 순수한 권력 자체를 위하여 권력을 휘두를 때 발생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미래.

       

       

       [Tutto nello Stato, niente al di fuori dello Stato, nulla contro lo Stato.]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주의에 의한 독재.

       

       독재에 의한 전체주의.

       

       철인 정치니 체제의 효율이니 하는 허상에 가려져 모든 것을 어둠으로 몰아넣는 인간성의 종말이 바로 이러한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 ‘하렌’의 사람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이었다.

       

       

       – “후에 태어날 용의 후예가 이 재능을 폭력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하겠나? 하렌인들의 영혼에서 자유와 사랑을 앗아가고, 사람을 그저 도구나 부품으로 취급한다면 어찌 하렌의 아이들이 그에 저항할 수 있겠나?”

       

       

       모든 하렌인의 하늘이 이미 그것을 염려하고 있었으니까.

       

       부모가 염려하는 바를 자식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단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릴뿐이었다. 세상에는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한 일들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문학의 힘이란 무지를 추문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니.

       

       하렌인들은 그 사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나?”

       

       

       모든 하렌인들의 어버이가 자식에게 대답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 질문에 대답해도 괜찮은 것은 표절작가인 내가 아니었다.

       

       오직 하렌인들만이 그 질문에 대답할 권리가 있었다.

       

       

       “폐하께서 바라시던 책이라면 아예 인쇄기 라인을 전부 사용하는 게 좋지 않겠나? 아예 수만권씩 인쇄해도 모자랄 터인데!”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음?”

       “아예 주변에 있는 인쇄소를 전부 빌리죠.”

       

       

       편집장의 호들갑에 고개를 끄덕인 내가 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갑 안에 들어있던 여러 상단의 어음들을 꺼내들었다.

       

       나의 계좌와 서명이 적혀있는, 하지만 금액만은 비워져있는 ‘백지 수표’.

       

       그것들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나는 편집장에게 물었다.

       

       

       “며칠 동안 주변 인쇄소를 전부 사용하고 싶은데, 얼마를 적으면 되겠습니까?”

       

       

       얼마면 되냐고.

       

       

       .

       .

       .

       

       맑고 쌀쌀한 하렌의 어느날.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 ‘기묘한 일’을 처음 느낀 것은 신문에서였다.

       

       

       “신문 사세요! 오늘의 새로운 소식이 들어있는 오늘자 신문 있습니다!”

       “얘야. 신문 한 부 주겠니?”

       

       “네! 어떤 신문으로 드릴까요? 하렌순보랑 기사신문, 하렌의 하루, 이반일보─”

       “종류별로 하나씩 주려무나.”

       

       “네!”

       “어디보자, 오늘은 무슨 일이… 음?”

       

       [‘레미제라블’을 쓴 소포클레스의 신작. ‘1984’ 출시.]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하렌에서 나름 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신문의 1면이 한 ‘책’의 광고로 채워져있던 것이었다.

       

       신문에 광고가 실리는 일이야 대수로울 일도 아니라지만, 모든 신문의 1면이 같은 광고로 채워진 것은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

       

       심지어 광고임에도 소설의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저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장과 함께, 한 남자의 얼굴이 인쇄되어있을뿐이었다.

       

       그것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며 평소처럼 하루를 보내던 사람들이었으나, 그 ‘기묘함’은 점차 심해져만갔다.

       

       

       “아니, 뭔 광고가 여기에도 있어?”

       

       

       잡지, 포스터, 식당이나 사무소의 게시판, 공연장─, 거의 모든 장소에 그 ‘1984’라는 책의 광고가 있었다.

       

       빅 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뭐하는 책인가 싶어서 서점에 가니, 모든 서점의 가장 앞 열이 그 ‘1984’라는 책으로 채워져있었다. 마치 다른 책은 팔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정신 나간 마법사가 하렌의 모든 출판물이 이 ‘1984’로 향하도록 확률을 조작한 것 같은 풍경이었다.

       

       

       “대체 뭐하는 책이길래….”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1984’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고.

       

       곧 거리는 1984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봐, 자네. 1984라는 책 읽었나?”

       “으음? 광고는 봤네만, 읽어보지는 않았다네.”

       

       “아이고, 이 사람아. 자네 인생 절반 손해보고 살고있군…! 1984도 안 보고 어떻게 책을 읽는다고 할 수 있는가?”

       “그정도인가?”

       

       “당장 같이 서점으로 가세! 내 한 권 사줌세!”

       “허, 됐네. 내 돈으로 살 테니 자네는 술이나 한 잔 사게.”

       

       

       1984를 읽지 않았다면 이야기 자체가 통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세계 최초로 행해진 도시 단위의 ‘미디어 독점’은 도시의 모든 화제를 빨아먹을만한 위력이 있었다.

       

       

       “허, 이런 소설이 있다니….”

       “이건, 끔찍하군….”

       

       “하지만 진실성이 있어!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몸서리를 치며 책을 덮은 도시의 사람들을.

       

       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광고 포스터가 지켜보고 있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

       .

       .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허, 자네, 참 재미있는 짓을 해줬더군. 지금 하렌은 그놈의 빅 브라더 이야기밖에 없어.”

       

       “폐하께서 걱정하시던 것이 그것 아닙니까?”

       “…끄응. 그래! 내 고민을 아주 적나라하게 전시해주었어! 그래서, 해결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 자네의 대답이야? 모든 하렌인들은 결국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설마요.”

       “그렇다면 이런 짓을 한 저의가 뭔가?”

       

       “하렌인들이 직접 고민하고 선택하게 하십시오. 서로 다투고 윽박지르고 반론하고 실수도 좀 하다보면 적당한 타협이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

       

       “그게 폐하께서 말씀하신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는 일’ 아닙니까? 고결한 하렌인들의 의무이자 특권이요.”

       “…허.”

       

       “적어도 최악의 존재는 알게 되었으니, 최악은 면할 수 있을 겁니다. 시행착오를 한번 줄이게 된 것만으로도 썩 괜찮은 시도 아닙니까.”

       “…자네는, 대체 뭔 미래를 보고있는 건가?”

       

       “저는 단지 문학이 검열당하지 않는 미래라면 어느 것이든 만족합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죠. 제가 문학을 제외한 일에는 좀 나태해서 말입니다.”

       “하하….”

       

       

       내가 서점 매대를 독점해버린 탓에 묻혀버린 신간들이 여럿 있었다.

       

       오늘부터는 그 신간들을 다시 홍보할 생각이다.

       

       내가 고민하는 일은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문학이 조금 더 발전하는 일 말이다.

       

       나머지는 정말로.

       

       아무래도 좋았다.

       

       

       [“인류의 선택은 자유와 행복 사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그중에서 행복을 선택하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You are a slow learner, Winston.”]
    [“Two and two are four.”]
    [“Sometimes, Winston. Sometimes they are five. Sometimes they are three. Sometimes they are all of them at once. You must try harder. It is not easy to become sane.”]

    [“당신은 배우는 게 느리군요, 윈스턴 씨.”]
    [“2 더하기 2는 4입니다.”]
    [“가끔씩은 말입니다, 윈스턴 씨, 그것이 5가 되기도 합니다. 가끔씩은 3, 때에 따라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윈스턴 씨는 더 노력해야합니다. 제정신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1984는 전체주의 독재를 비판하기 위해 쓰인 소설입니다.

    전체주의 중에서도 국민 개개인을 국가가 감시하고 사상을 통제하는 구소련 체제가 직접적인 모델이었고, 작중 오세아니아(주인공이 속한 국가이자 작중의 배경)의 정치 체제는 구소련 사회에서 직접적인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

    조지 오웰는 ‘동물농장’과 ‘1984’ 등의 소설에서 이러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러한 조지 오웰의 집필 성향에 대한 부분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니 한번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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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iving as a Plagiarist in Another World

Surviving as a Plagiarist in Another World

Surviving as a Plagiarizing Author in This World 이세계에서 표절 작가로 살아남기
Score 4.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literature of this other world was atrocious.

So, I plagiarized.

Don Quixote, Anna Karenina,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The Metamorphosis… I thought that unraveling the literature of the original world would advance the literature of this other world.

“Those who dream and those who do not, who really is the mad one?”

“To live or to die, that is the question.”

“No matter how fatal the mistake, it is different from a sin.”

But then, people began to immerse themselves too deeply in the novels I plagiarized.

Can’t a novel just be seen as a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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