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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

       

       

       

       

       

       

       “…대체 왜 안 오시는 거야.”

       

       제 3 외성의 출입문.

       마리엔이 쌀쌀해진 밤 날씨에 어깨를 움츠리며 팔짱을 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홀로 용무를 보고 오겠다는 아가씨께서 감감무소식이었던 터라,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용무이길래 이리도 오래 걸리는 걸까.

       터덜대던 걸음이 언제라도 자빠질 것 같아 불안했지만, 한사코 동행을 거부하는 아가씨에 어쩔 수 없이 기다리고 있는 마리엔이었다.

       

       겔우드 경을 만나고 온 이후,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었다.

       한쪽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데다, 갈피를 찾지 못 하던 눈동자는 혼이 나가있었다.

       그에 휴식을 연거푸 권유했음에도 직접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나선 아가씨였다.

       

       “날도 점점 추워지는데…….”

       

       그러다 결국.

       

       투둑.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에, 마리엔이 다급히 우산을 꺼내왔다.

       나무뼈대에 천을 이어붙힌 것이지만, 보슬비 정도는 충분히 막아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아가씨-!! 어디 계세요-!!”

       

       그렇게, 드넓은 대공성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제 아가씨를 찾아 헤매는 마리엔이었다.

       

       

       **

       

       

       “흐윽… 흐으윽…….”

       

       길한복판에서 대체 왜 울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는 르미앙이 그리 한참을 울었다.

       내리는 보슬비 속에서, 눈물을 쏟아낸 것이다.

       엘든이 건네준 연고를 쥔 채로.

       빗물일지 눈물일지 모를 것이 연고통 위로 떨어진다.

       빗물일지 눈물일지 모를 것이 제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가 야속했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서야 도움을 건넨 것이, 그 도움이 괴물을 잡으려다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에게 건네는 애도인 것 같아, 슬펐다.

       

       그리고.

       

       이 도움으로써 그의 변화가 진실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이제껏 부정하고 외면했던 그의 변화를 인정했다면 결말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들어 괴로웠다.

       한 마리의 미꾸라지에 집착치 않고, 세 마리의 벌레들에게 집중했다면 이러한 파국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은밀히, 조용히 치뤄진 혼약대전을 통해 지옥에서 해방되었을 텐데.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탈력감, 지독한 무력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인간의 천성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이 얼마나 우매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눈물의 의미도 그것들을 담아낸 것이리라.

       미련한 집착이 빚은 광증, 후회, 절망, 그리고 자괴감.

       그들이 어리석다 여기며, 짓밟힌 자존감을 비뚤어지게 쌓아올리던 자신이 진짜 머저리였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운 르미앙이 눈물을 닦았다.

       어느새 온몸이 젖어있었다.

       

       머리도.

       옷도.

       얼굴도.

       목도.

       손도.

       

       그리고.

       

       마음도.

       

       딸깍.

       

       연고가 담긴 통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새하얀 반고체 상태의 연고였다.

       새까만 어둠에 잠식된 제 마음과 너무도 대비되는 백색이었다.

       북부령의 설원처럼 너무도 눈부신 백색이었다.

       더러워진 자신에겐 너무도 과분한 백색이었다.

       

       왼손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손바닥에 남겨진 그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채 아물지 못한 4개의 손톱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검지로 연고를 떴다.

       멍하니, 상처 위에 연고를 발랐다.

       한차례 따끔거려왔다.

       욱씬거려왔다.

       그 통증이 좋았다.

       자신은 통증과 고통을 느껴도 싼 인간이니까.

       치유를 위해 느껴진 통증이 오히려 죄인이 행해야 할 것을 알려왔다.

       

       히죽.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비스듬히 틀어 경사를 주었다.

       그 위로 떨어지는 빗물이 연고를 씻어내기 시작한다.

       

       죄인에게 치유가 가당키나 한가.

       그릇된 시작으로써 겔우드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고, 곧 있으면 제 아버지도 막내딸의 추악함에 쓰라린 고통을 느낄 터다.

       더 나아가, 이대로라면 혼약대전의 우승자와 자신을 위해 성대한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수고를 헛수고로 만들고, 퍼레이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북부인들에게도 큰 실망과 상처를 안겨주게 될 터였다.

       

       아이들은 울 것이고, 어른들은 침통해 할 것이다.

       이제껏 혼약대전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었던 기억이 망가지고, 다음의 혼약대전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은, 데론 일행보다 더 큰 죄악을 저지르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켈리드 공작가와 로스펠 후작가에 직접 서신을 부친 것이었고.

       그런 자신이 상처를 치유한다는 건, 죄악에서 피하겠다는 것과 같지 않은가.

       

       죄를 저질렀으면 죗값을 달게 받아라.

       데론 일행에게 그리 말해놓고서는, 자신은 죗값에서 회피하겠다니.

       어리석었던 과거를 반복하겠다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었다.

       4개의 손톱 자국은 선명한 각인으로 남아 그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평생동안 상기시키고 증명해 주어야 할 터다.

       

       피식.

       

       ‘그래.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쓰레기니까.’

       

       재차 실소를 지은 르미앙이 점차 씻겨나가는 연고를 보았다.

       깨끗이 씻겨내려가길 바랐다.

       감히 치유를 꿈 꾸었던 자신의 못난 바람과 함께.

       감히 그들과 다르다 여긴 바보 같은 신념과 함께.

       

       그때였다.

       연고를 씻어내던 빗물이 별안간 그쳤다.

       

       “…….”

       

       고개를 들었다.

       

       우산을 들고 있는 엘든이 보였다.

       

       연고를 씻겨내던 빗물을 막아선 엘든과 마주한 것이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얼 의미하는 걸까.

       

       왜 비를 막은 걸까.

       

       왜 상처를 각인으로 남겨 펑생을 후회하겠단 다짐을 막아선 걸까.

       

       왜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씻지 않겠다는 결심을 막아선 걸까.

       

       필요할 때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 필요하지 않을 때는 불쑥 나타나 거들떠 보는 것일까.

       

       왜.

       

       대체 왜.

       

       자꾸만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걸까.

       

       아카데미에서는 도움을 바라던 손을 짓밟아 비참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그 손에 쥐어진 도움을 버리려는 자신을 막아세워 비참하게 만드는 걸까.

       더 이상 비참해질 것도 없는데 말이다.

       

       연고를 씻어내지 말라는 거야?

       상처가 깨끗이 아물도록 두라는 거야?

       흉터를 보며 자책하지 말라는 거야?

       이제야 건네준 도움을 버리지 말라는 거야?

       

       그렇지만 난 가족에게, 북부인들에게 실망과 상처를 안겨준 죄인인걸.

       윈터펠 대공가의 사람으로서 자격이 없는 죄인인걸.

       그런 내가 어찌 상처를 치유하겠어.

       혼약대전이란 만인의 경사를 무너뜨린 내가 어찌 일어서겠어.

       

       생각해보면 전부 내 잘못으로써 빚어진 일들이야.

       

       저주의 위험을 무릅쓰고도,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로 간 것이 잘못이었고, 모진 학대를 당하면서도 버텨낸 것이 잘못이었고, 그 끝에 졸업장을 따낸 것도 잘못이었고, 가문의 신성한 전통과 북부령의 대축제임을 알고도 혼약대전을 이용하기로 한 것도 잘못이었고, 너의 기권을 막아세운 것도 잘못이었고, 그 끝에 네 뺨을 때려버린 것도 잘못이었어.

       

       그리고 이젠 아버지와 만백성들에게도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겠지.

       더 이상 숨길래야 숨겨질 수 없으며, 숨기고픈 생각도 없어.

       고결한 척 유난을 떨었던 난, 데론과 블런드, 카일과 다를 바 없는 쓰레기니까.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더러울지 몰라.

       그런 내가 네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하나뿐이야.

       

       말없이 미소 짓고 있는 그를 따라 환히 웃었다.

       메말랐으리라 여긴 눈에서 재차 눈물이 차올랐다.

       할퀴었던 그의 오른쪽 뺨을 향해 손을 들어올리며, 나직히 전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제 입으로 해내리라곤 꿈에서도 상상치 못 한 말이었다.

       

       

       “…미안해. 엘든.”

       

       

       일렁이는 그의 미소.

       흐려지는 그의 얼굴.

       

       곧.

       

       “아, 아가씨-! 정신차리세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정신을 잃고 마는 르미앙이었다.

       

       

       

       

       

       **

       

       

       

       

       

       엘페리온 왕국.

       

       트미리아스 대륙의 서북부를 호령하고 있는 왕국으로 대륙에 집권하고 있는 다섯 개의 왕국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었다.

       대륙의 심장을 통치하는 아테리아 제국, 다음으로 영향력이 강한 왕국인 것이다.

       

       왕국의 남부엔 광활한 곡창지대가 펼쳐져 먹을 거리가 끊이지 않았고, 수해 자원이 풍부한 바다와 인접한 서부, 캐는 족족 유용한 광물이 나오는 동부, 그리고 뛰어난 기술력으로 개발된 보온 제품과 유지력이 뛰어난 얼음의 수출로 척박함 속에서 풍족함을 누리는 북부까지.

       

       게다가 수도성에 갖춰진 뛰어난 학문, 그리고 최강의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는 엘페리온 국왕은 어진 성품으로 나라를 다스려 살기 좋은 곳이었다.

       

       물론.

       

       물자가 풍족하고 살기가 좋다고 해서 평화를 장담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외적으론 평화로운 왕국이었으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듯, 귀족 사회의 암투는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가진 이들이 덜 가진 이들을 부려 원하는 것을 꾀하는 것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지성체의 습성이고, 고대 시대 때부터 이어지고 있는 암행단은 시대를 거칠수록 더 간교해지고 더 간악해져갔으며,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든 뿌리를 펼쳐갔었다.

       

       그리고 윈터펠 북부령.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암행단 한 곳에.

       

       익명의 의뢰자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거금의 의뢰가 들어온다.

       

       

       [르미앙 윈터펠]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본 그 이름에 영원한 어둠을 바라는 의뢰였다.

       

       그것은 복수심이 낳은 또 다른 복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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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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