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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

       “아,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마실 건 뭐가 좋나요? 있는 건 맹물밖에 없지만, 환상 마법으로 맛을 바꿀 수 있으니 전부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편하게 앉으시죠.”

       

       내가 활짝 웃으면서 응대하자, 추적자 3인방 중에서 두 명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성녀(야하게 입음)와 검사(얼굴 반쪽이 아픔)가. 마음이 넓어 보이는 단발머리 여학생만이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여 줬다.

       

       단발이 화이트보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단발이 예쁘네요. 머리카락을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맞춰 보죠. 상업 지구의, 입구로부터 세 블록 떨어진, 가로수가 특징적인 사거리 앞에 있는 가게에서 파는, 비단고래 향유인가요?”

       

       단발의 표정이 ‘헉 어떻게 알았지’로 변했다. 

       

       “하하, 제가 코가 좀 좋답니다. 그리고 저도 머리카락 관리에는 신경을 쓰고 있거든요.”

       

       사실 아니다. 여자친구가 향수 바꾼 걸 눈치챈 적이 한 번도 없고, 머리카락은 비누로 감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파다. 유일하게 받아 본 머리카락 관리는 마탑주의 나데나데가 전부다.

       

       핑발레즈에게 강의 신청자 3인방의 뒷조사를 부탁해서 받아 본 보고서에 적혀 있던 내용이다. 기왕이면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 공통적인 화제가 있으면 친해지기 쉽지 않은가.

       

       나는 테이블로 3인방을 안내했다. 성녀는 헐크마냥 화남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고, 검사로부터는 경계심이 느껴졌다. 내가 뭔가 수상한 짓을 했다가는 칼부터 뽑아 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해한다. 원래 학생들은 교수가 뭔가 사악한 꿍꿍이가 있으면 어쩌나 하루종일 걱정하게 되어 있다. 나도 학창 시절에 그랬다. 

       

       단발머리는 소파에 거리낌 없이 앉았고, 성녀는 약간 거리를 두고 그 옆에. 그리고 검사는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서 있기로 결정한 듯싶었다.

       

       하긴. 자신을 제외하면 여자만 둘인데, 어디에 앉아도 이상해질까 봐 걱정스러웠겠지. 

       

       분위기가 참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분위기를 풀고 싶었다. 나는 혓바닥으로 아랫입술을 핥고, 목을 푼 뒤에. 그들의 맞은편에 앉아 말을 꺼냈다.

       

       

       “우리가⋯⋯ 같이 휘말린 일이 있었죠?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접어두도록 합시다. 그걸 위해서 여기 모인 건 아니잖아요.”

       

       그땐 논문이 안 나와서 도망쳤지만, 너희들도 수업 시간에 논문 보지 않았냐. 그러니까 그날의 일은 잊고 재미있는 TRPG 할 생각부터 하자.

       

       “여러분의 탐구심을 존중합니다. 어려운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야, 학생분들이 관심을 가져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쁜 오산입니다.”

       

       되게 생경한 과목 이름이었을 텐데 용케도 신청해 줘서 고맙다. 메인 수업 시간에 떡밥 뿌리고 같이 놀자고 꼬드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벌써 참가자가 모일 줄 몰랐다. 기쁘다.

       

       “자, 이 물건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뭐게.

       

       

       나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겹친 손바닥 사이에서 끈적거리는 점액질이 늘어지더니, 순식간에 형태를 고쳐 액자의 모습이 되었다. 성녀는 드라이하게 대답했다.

       

       “텅 빈 액자.”

       

       “그래요, 하지만 그냥 액자는 아닙니다. 많은 것들을 비춰 내는 액자죠.”

       

       트레일러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준비해 둔 트레일러 영상을 재생시켰다. 시퍼렇고 푸르딩딩한 색감의 숲, 붉은 달이 떠오른 지옥, 기관총이 불을 내뿜는 현대 문명, 스페이스 콜로니, 깎아지를듯한 산꼭대기에서 검술을 나누는 무인들, 별을 관측하는 노인.

       

       영상만큼 단기간 내에 많은 정보를 때려 박을 수 있는 매체는 없다. 이 트레일러의 목적은 호기심을 끄는 거다. 눈뽕의 향연에, 3인방은 영상에 몰입한 듯싶었다.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세계를 체험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침묵하던 청일점은, 표정을 단단히 굳힌 상태로 말했다.

       

       “이게 목적이었나?”

       

       “그렇죠.”

       

       “바라는 게 뭐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언제나 사람이 부족하거든요.”

       

       전생에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니와, 지금은 하는 사람이 사실상 나랑 마탑주뿐이다. 좀 더 많은 사람이 TRPG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취향에 안 맞아서 안 하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일단 알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때다. 나는 정성껏 준비한 세션 소개문을 3인조 앞으로 내밀었다.

       

       “협력자의 도움을 구해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읽어보시고, 마음에 드셨다면 부디 함께해주시죠.”

       

       “의논하고 결정하지.”

       

       “자리를 비켜 주겠어? 교수⋯⋯ 님.”

       

       검사와 성녀가 더블어택을 날렸다. 플레이어들이 소개문을 읽으면, 그 반응을 보는 게 GM의 즐거움 중 하나인 것인데. 내가 있으면 한마디도 않겠다는 듯 성녀는 팔짱까지 껴버렸다.

       

       히잉.

       

       나는 내 집무실에서 쫒겨났다.

       

       ===============================================================

       

       미친 마법사를 방에서 내보낸 후, 베네트는 의견을 묻듯이 다른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성녀는 생각하는 바가 있던 듯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지만, 니오레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베네트는 얕은 한숨을 뱉어내며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마법사는 차원 이동 마법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동의해. 나도 그렇게 들었어.”

       

       [저도요!]

       

       액자에 비춘 영상들은, 개인의 환상 마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했다. 하나 정도였다면 상상의 영역이라고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나, 영상이 스쳐 지나간 세계는 각자의 디테일을 유지한 채로 수십 개나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시종일관 즐거운 듯이 웃고 있던 마법사의 표정. 진심으로 즐기고 있던 것 같았다. 자신의 연구에 사로잡힌 마법사들이 종종 그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저 미친 마법사를 중심으로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베네트가 의심하던 것보다 좀 더 커다란 판인 것 같았다. 동화책에서나 언급되던, 먼 과거에 실전된 차원 마법이라니.

       

       “⋯⋯2황자와 마법사 간에, 이런 거래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데.”

       

       베네트는 마력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그림을 그렸다. 2황자는 마법사의 연구를 지원하고, 마법사는 2황자의 정치 공작을 돕는다. 일종의 거래 관계로 묶여 있는 것이다.

       

       “저 마법사가 색출해 낸 흑마법사들⋯⋯ 그 공적은, 명령서를 발행한 2황자에게 가겠지. 작은 공적은 아닐 터다.”

       

       “⋯⋯그 대가로 2황자는, 마법사가 아카데미에서 벌이는 일을 지원하거나 묵인하고?”

       

       “그래.”

       

       아카데미 학생들을 이세계 탐사 인원으로 쓰려는 것이다. 아카데미는 실력과 재능을 증명받은 이들만이 입학할 수 있으니, 인재 풀의 퀄리티는 최상에 가까웠다.

       

       성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이내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위험해. 마법사의 뒷조사를 위해서 신청은 했지만, 생판 모르는 다른 차원에 뛰어드는 건, 알잖아?”

       

       [하지만 여기, 생존은 보장된다고 적혀 있는데요?]

       

       “그게 거짓말이면 어쩌게?”

       

       [⋯⋯]

       

       니오레가 할 말이 궁해져서, 화이트보드에 지렁이 세 마리를 그리고 있을 때.

       

       팔락. 팔락.

       베네트는 빠르게 보고서를 넘겼다. 주요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간단하게나마 견적을 내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리스크가 생각보다 높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

       

       “보고서에 따르면, 이세계의 일반인들은 대부분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은의 황혼 교단이라는 적성 세력이 있기는 하지만, 마력으로 신체를 보호하면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을 시전한다고 했고.”

       

       “그러니까, 보고서가 거짓말이면⋯⋯.”

       

       “내용이 빠지거나 수정된 흔적은 없었어. 그리고, 목표를 봐라. 마법사는 다른 세계에서⋯⋯ 이, 빛나는 부등변다면체라는 아티팩트를 확보하고 싶은 거다.”

       

       마법사는 관심이 없다는 마냥 적어놓기는 했으나, 그렇다면 굳이 적어 놓을 이유가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탐색자들을 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강력한 아티팩트를 얻어내려는 게 목적으로 보였다.

       

       “아티팩트를 회수하려면, 우리를 귀환시켜야겠지. 그러니, 다른 차원에 영원히 버려질 일은 없다고 판단한 거야. 그리고.”

       

       베네트가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보고서의 마지막, 부자연스럽게 끊긴 교전 기록은 조사원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고서의 두 번째 문단에서는, ‘죽음을 맞이하여도 끝이 아니며, 상처 하나 없이 본래의 세계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이들은 나름대로 권세가 있는 이들이 많았다. 성녀 또한 이름값이 작지 않다. 한 교단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아닌가.

       

       “머리가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은 마법사지만, 마검에 대한 논문과 명령서를 준비하는 등, 뒷일을 제대로 생각하고 있어. 성녀를 다른 차원에 집어넣었다가 일이 이상해지면, 어떤 꼴이 나는지는 잘 알고 있을 거다.”

       

       역풍이 불 거다. 치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그 정도를 고려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물론 추측일 뿐이지. 하지만 확실하게 안전을 확인할 방법이 있어.”

       

       “뭔데?”

       

       “이 조사원이⋯⋯ 살아있는지 물어보는 거다.”

       

       성녀는 작게 감탄했다.

       

       “너,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걸. 그렇게 안 생겼는데⋯⋯.”

       

       “옷 고르는 솜씨만큼이나 안목이 없군.”

       

       “시끄러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리턴. 마법사의 의도대로 이세계에 들어갔을 때, 과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베네트의 머릿속에 보고서의 어떤 문장이 스쳐지나갔다. 

       

       사악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무한한 지혜를 제공한다고 알려져 있는 신비한 유물이라⋯⋯.

       

       흑마법사들이 시전할 『악몽 소환』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무한한 지혜가 거짓이 아니라면, 어쩌면. 동생의 몸으로부터 『공포 먹는 시체꽃』을 쫒아낼 수 있는 방법을⋯⋯ 얻어낼 수 있는 건 아닐까.

       

       성녀 타라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한마디도 의논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에서 탐욕을 보았다. 

       

       3인조는 의견을 정리하고 마법사를 불러냈다.

       

       ===============================================================

       

       그렇군, 황자 황녀님들이야 ‘이 새끼가 미치지 않고서야 나를 죽일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통은 이렇게 되는 법인가. 일리가 있었다.

       

       친하지도 않은 마법사가 ‘다른 차원에 들어가보지 않을래?’라고 하면 불안하겠지. 나는 조사원의 생존 여부를 묻는 말에, 옆에 멀뚱히 서 있는 핑발레즈를 가리켰다.

       

       “이쪽이 조사원입니다.”

       

       “예, 제가 조사원입니다.”

       

       핑발레즈는 더블피스를 날렸다. 나한테만 장난스러운가 했는데, 거의 초면인 상대한테 더블피스를 박는 모습을 보니 참 사람이 한결같아서 좋았다. 황자 앞에서도 저럴 것 같았다.

       

       안전장치라. 진짜 용암 속으로 뛰어들어도 안전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입을 한번 털어보려고 하자, 검사-성녀 듀오가 끼어들었다.

       

       “조사원과 검증을 해 보고 싶다.”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마법사님?”

       

       또 쫒겨났다⋯⋯.

       

       ===============================================================

       

       다각도로 검증하는 시간을 가졌다. 핑발레즈가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 질문을 하기도 하고, 성녀는 거짓말 탐지기 주문을 냅다 켜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의심되면 들어가서 함 죽어보면 되는 거 아니냐 싶어서, 한 명 화끈하게 한번 테스트해 보라고도 했고. 의심 많은 베네트가 직접 시뮬레이션 안으로 들어가서 죽어 보고 나왔다.

       

       2황자의 경우에는, 죽음을 일단 맞이한 뒤에 => 사라지는 이펙트로 구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3인조의 경우에는 뭐랄까, 돌다리를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이 있어서. 직접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좀 위험하게 느껴질까 봐. 겁먹고 세션 안 한다고 할까 봐⋯⋯.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 주변에 실드가 생겨나 공격을 막아 낸 뒤에- 공간이동으로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연출로 바꿨다. 이러면 좀 더 안심해 주지 않을까.

       

       

       귀찮지는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뭐든지 의심하고 헤집어보는 사람은⋯⋯ 크툴루가 딱이었다!

       

       가슴이 뛴다. 이렇게 집요하게 의심하고 파고들고 해야지 분위기가 사는 장르인 것이다. 코즈믹 호러라는 건. 

       

       서로 이해하고 납득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날짜도 잡았다. 바로 내일, 목요일에 첫 세션을 개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지각⋯⋯! 입니다⋯⋯!
    그래도, 17분⋯⋯ 용서를 구하옵나이다 마이 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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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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