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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

       남들보다 빠른 개학을 맞이한 학생회는 분주했다.

         

       방학이 끝나서야 느지막이 돌아온 더스틴과 진작 등교해서 사무 노동을 하던 엘리는 쉴 틈도 없이 잡무를 처리해 나갔다.

         

       “2학년 기숙사의 깨진 유리창이 아직도 교체가 안 됐어. 하늘고래 날갯짓으로 깨졌던 그거 말이야.”

       “외주 상단은 뭐 하고 있길래?”

       “비행 생명체의 서식지 이동으로 하늘길이 변경된 바람에 물자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던데. 긴급 배송을 할 수는 있겠지만 기존 계약의 단가로는 곤란하다고 추가 계약금을 요구해 왔어.”

         

       피곤한 기색의 엘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해. 당장 유리창을 교체하든가 아니면 상단을 교체하든가 둘 중 하나가 될 거라고.”

       “그럴게.”

         

       더스틴이 수긍하고 통보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깃펜이 움직이며 검은 잉크로 된 글자를 하나씩 적어갔다.

         

       하지만 늘어나는 잉크 글자만큼이나 분주한 학생회에서 가장 분주한 사람을 꼽자면 엘리도 더스틴도 아닐 것이다.

         

       “바쁘다, 바빠! 우와아!”

         

       분홍 머리를 찰랑이는 소녀는 학생회 한복판에서 왔다 갔다 움직였다. 그때마다 흰색 톤에 분홍 색상이 곁들여진 가을 원피스가 흔들렸다.

         

       “허둥지둥! 버둥지둥!”

         

       파스텔은 양팔을 휘저으며 정신없이 책상 사이를 돌아다녔다. 손에 뭔가 들고 있는가 하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다.

         

       “바쁘다, 바빠!”

         

       서류를 뒤적이던 엘리가 새 안건을 찾고 멈칫했다.

         

       “멜리사 캐머롯의 휴학 신청서? 편지도 있네. 캐머롯은 아직 등교 안 하지 않았어? 이건 어느 편으로 들어온 거야?”

         

       더스틴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제 도착한 비공정 편으로 왔어. 마계 쪽 비공정인데 마계에서 만난 상단을 통해 보냈다고 해. 근데 그 상단도 도중에 해적을 만나서 편지 대부분이 유실됐다고 했던가.”

       “어디 보자. 일부 비공정이 망가진 바람에 마계 현지에서 수리해야 하는 탓에 개학에 맞춰 돌아가기 어렵다. 그러니 며칠 휴학을 신청한다.”

       “우아우아! 너무 바빠!”

         

       파스텔은 양팔을 휘저으며 엘리의 책상 옆을 바쁘게 지나쳤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바쁘게 지나쳤다.

         

       엘리가 휴학 신청서를 읽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에 잠긴 듯이 깃펜을 입에 물다가 더스틴을 돌아봤다.

         

       “상단에 보낼 통보문은 다 작성했어?”

       “아직.”

       “작성은 멈추고 일단 기숙사들의 유리창 현황부터 확인해 보자. 2학년 기숙사 유리창 외에도 그 상단이 담당한 영역도 살피면 좋겠어.”

       “제대로 경고하게?”

       “응. 시간이 얼마 없으니 레너드 타일러한테 인력 빌려서 지금부터 빨리 처리해 봐.”

       “알겠어.”

         

       더스틴이 책상을 정리하고 학생회를 서둘러 나갔다.

         

       엘리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학생회 문으로 걸어가 복도를 살피곤 문을 잠갔다. 문 잠그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밀실을 만든 흑백의 마족 소녀가 미묘한 눈빛으로 파스텔을 돌아봤다.

         

       파스텔은 여전히 양팔을 휘저으며 학생회 한복판을 돌아다녔다. 어쩐지 휘청이는 기색도 조금 있었다.

         

       “후아아! 이러다 과로사 할 거 같아아!”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양팔이 뻐근거리는 느낌 아닌 느낌이 들었다.

         

       이건 사무 업무를 너무 오래 하다가 팔 근육이 긴장하고 경직된 바람에 생기는 근육통이잖아?!

         

       나,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해버린 거야?!

         

       으아아.

         

       일중독 파스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돼버렸어!

         

       엘리가 멜리사의 휴학 신청서를 챙겨 파스텔에게 다가왔다.

         

       “파스텔, 이거 봐.”

         

       파스텔은 화들짝 놀랐다.

         

       “헛? 왜 그래, 엘리?”

         

       엘리가 휴학 신청서의 어느 한 항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학생회 상단 그러니까 크래프트 상단은 기숙사 신축의 자재 확보를 위해 마계 출입증을 발급받고 출항했어. 그런데 기숙사 신축이 끝난 여태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지. 다른 목적이라도 있었다는 것처럼.”

         

       오잉.

         

       “그렇네! 신기해라!”

         

       엘리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범죄자를 보는 시선~.

         

       잉.

         

       강렬한 시선에 영문을 몰라 하던 파스텔은 무언가 짐작이 가 돌연 눈이 동그랗게 됐다.

         

       허억.

         

       나, 밀무역이 들킨 거야?

         

       으아아.

         

       수갑이 철컹철컹.

         

       인생이 어둑어둑.

         

       생계형 범죄로 봐주세요……!

         

       덜덜덜.

         

       엘리가 이번엔 학생회 예산과 관련된 서류를 가져왔다.

         

       “2학기 예산이 어디로 갔는지 텅텅 비었어. 학생회 상단을 창설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예산도 서류상으론 숫자가 존재하는데 정작 실물은 존재하지 않아. 누가 횡령한 것처럼.”

         

       그렇게 말한 엘리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더 심각한 범죄자를 보는 시선~.

         

       허억.

         

       크래프트 상단을 창설하고 남은 예산까지 싹싹 긁어 밀무역품으로 바꿨는데 들킴!

         

       두 배로 덜덜덜!

         

       파스텔은 잔상이 남을 정도로 격렬히 온몸을 떨었다. 분홍 머리카락이 진동했다.

         

       붕붕 붕붕.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아니야아니야! 예산은 엘리가 틀렸어!”

       “응?”

         

       파스텔은 후다닥 달려서 새로운 2학기 예산서를 가져왔다. 의기양양하게 예산서를 펼쳐 들었다.

         

       “봐봐!”

         

       손가락이 수입 항목을 짚었다.

         

       하늘고래 채집으로 플러스플러스플러스된 수치를!

         

       “학생회는 불가피하고 우연한 사건 덕분에 곳간이 비었었지만 이젠 아니야! 내 활약 덕분이지!”

         

       파스텔은 양손으로 옆구리를 짚고 턱을 치켜 세웠다.

         

       “난 오히려 칭찬받을 자격이 있어!”

         

       응응!

         

       양팔을 번쩍 들었다.

         

       “학생회를 구한 영웅!”

         

       파스텔은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건 바로 나야!”

         

       예산의 마술사!

         

       마이더스의 손!

         

       오예오예!

         

       신나게 폴짝폴짝 뛰었다.

         

       나, 영웅!

         

       엘리가 어이없어했다. 반박조차 아깝다는 양 입을 벌린 채 계속해서 쳐다봤다.

         

       양심이 있으면 창피해져라 빔~.

         

       허억.

         

       갑자기 창피해지는 기분!

         

       폴짝폴짝 뛰던 파스텔은 천천히 쭈그러들었다.

         

       시선을 슬쩍 피하고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부학생회장 겸 총무부장 겸 기획부장 겸 홍보부장 겸 봉사부장 겸 선도부장은 아무것도 몰라~.”

       “말하기도 긴데 모르면 안 되잖아.”

         

       허억.

         

       진짜 그렇네?

         

       말하고 보니 스스로 자백한 꼴?!

         

       충격.

         

       추웅격.

         

       파스텔은 그대로 굳었다.

         

       얼음 꽁꽁 파스텔이 된 것이다.

         

       가을이면 얼추 겨울이니까 그럴 만하다.

         

       엘리가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어차피 크래프트니 이럴 줄 알았다는 묘한 태도로 예산 관련 서류들을 치웠다.

         

       그리곤 멜리사의 휴학 신청서와 편지를 건네줬다.

         

       “편지는 너한테 보내는 거니까 읽어봐.”

         

       앗.

         

       사실 가을은 전혀 겨울이 아니기 때문에 스리슬쩍 멀쩡해진 파스텔은 휴학 신청서를 결재하고 편지를 살펴봤다.

         

       서론을 제외하고 본론과 결론일 뒷부분이 거친 상행에 유실된 상태였다. 도착한 편지는 달랑 한 장이었다.

         

       한 장이면 충분한 분량일지 모르겠지만 본래도 굉장히 긴 내용이었는지 정작 도착한 한 장 동안 본문은 없고 서론일 격식 차린 안부 인사만 이어졌다.

         

       “우와.”

         

       진짜 귀족은 안부 인사를 한 장이나 쓰는구나.

         

       “다른 편지지는 없어?”

       “없어.”

         

       자리로 돌아간 엘리가 대강 대답했다.

         

       헤에.

         

       멜리사의 편지는 결국 안부 인사 한 페이지만 도착하게 된 거야?

         

       절친으로서 아쉬움이 가득해졌다. 파스텔은 그나마 도착한 안부 인사라도 꼼꼼히 읽었다.

         

       친구인 파스텔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뚝뚝 느껴지는 애절한 편지였다. 꾹꾹 눌러쓴 깃펜 자국은 감정의 무게를 나타내는 듯했고 긴 수식어구와 관용구는 솔직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부끄러움처럼 느껴졌다.

         

       우와우와.

         

       진짜 귀족은 이렇게 쓰는구나.

         

       읽는 것만으로도 멜리사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어!

         

       그때 조용히 있던 악마가 말해왔다.

         

       『필체에서 분노가 느껴지는군.』

         

       네에?

         

       『감정을 눌러 담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쓴듯하지만 결국 손힘을 자제하지 못했어. 깃펜으로 편지지를 긁듯이 적었다. 굉장한 분노가 느껴지는군.』

         

       파스텔은 눈이 동그래졌다.

         

       『게다가 격식을 지키자면 안부 인사엔 좋은 말만 써야겠지만 그러기가 싫었는지 긴 수식어와 관용구를 통해 반어법을 현란히 사용하고 있다.』

         

       으잉?

         

       파스텔은 편지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용을 다시 꼼꼼히 읽다가 눈을 비비곤 흐린 눈으로 살펴봤다.

         

       으응.

         

       으으응.

         

       전혀 모르겠어!

         

       『귀족 사회의 전통과 역사를 알아야 이해가 되는 반어법이다. 예를 들어 네게 튤립 같다고 표현한 부분은 튤립 가격 폭등 당시 튤립 도박에 전 재산을 탕진한 바보 같은 귀족들을 말하는 거다.』

         

       악마가 담담히 해설했다.

         

       『상행이 꽤 고단하나 보군. 밀무역은 도박이고 넌 도박쟁이라는 비난이다. 넌 백치로 지내느라 제대로 된 귀족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이런 뉘앙스를 알기 어려울 테지.』

         

       잉.

         

       그런가?

         

       파스텔은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깊은 생각, 깊은 생각.

         

       그러다 방긋 웃으며 편지지를 다시 펼쳤다.

         

       하여튼 읽는 것만으로도 멜리사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어!

         

       우와우와!

         

       오예!

         

       흥얼거리며 편지를 읽다가 책상 서랍을 뒤적여 편지지를 꺼냈다.

         

       나도 편지 써줘야지!

         

       귀족답게 안부 인사로만 한 페이지를 채워볼 테야!

         

       열심히 편지를 적었다.

         

       시계의 시침이 움직일 때쯤 엘리가 다가왔다. 서류 뭉치가 퉁 놓였다.

         

       “결재해 줘.”

       “앗, 잠시만.”

         

       편지를 책상 한편으로 치웠다.

         

       “특별히 내가 살펴야 할 안건은 있었어?”

       “이거.”

         

       엘리가 제일 위의 서류를 가리켰다.

         

       2학기 편입생에 관한 내용이었다.

         

       1학기에 개인 사정으로 인해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2학기부터 편입하게 됐다.

         

       이미 들은 내용이라 고개를 갸웃했다.

         

       “편입생 중에 학생회로서 주의해야 할 만한 인원이라도 있었나 봐?”

         

       기존 리스트엔 큰 문제는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서류가 넘겨지고 손가락이 갱신 리스트를 가리켰다.

         

       “공작가 내부에 사정이라도 있는지 북부 산맥을 개척하던 공작가 차녀가 갑자기 편입을 신청했어.”

         

       잉.

         

       파스텔은 낯선 단어를 더듬었다.

         

       공작.

         

       단순한 계급도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허억.

         

       나보다 높음.

         

       상위 귀족은 어떻게 상대해야 해?!

         

       신분제의 냉혹함이 순진한 아이를 덮쳐온다……!

         

       덜덜덜.

         

       반응을 본 엘리가 살짝 머뭇거렸다.

         

       “게다가 공작가 차녀는 같은 1학년이면서도 준기사급이니까……. 입학하게 되면 학생회 권위가 조금 흔들리지 않을까?”

         

       준기사급.

         

       파스텔은 입이 벌어졌다.

         

       1학년 최강 파스텔 → 그냥 바보 파스텔

         

       으에에?

         

       으에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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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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