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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

       회의가 끝난 후.

       

       대회의실을 나서는데 우리 교수들이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저쪽에 몰려 있는 게 보인다.

       

       “야, 너네 거기서 뭐하냐?”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저녁 회식 관련으로 이야기 나누는 중입니다. 나중에 결정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웨이버가 웃으며 대답했고 나는 그러려니 하며 몸을 돌렸다.

       

       회식 관련은 무슨. 우리가 이론학과도 아니고 언제부터 계획 짜고 회식했다고.

       

       당장 오늘 회식부터가 카자다르가 공짜 술 준다는 곳 있다는 말에 곧바로 잡은 거잖아.

       

       저것들, 아마 아까 회의 때 내가 한 말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막 부임했을 때 교수들은 내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물밑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황제가 워낙 철두철미하게 나에 대한 기록을 말소해 버려서 다들 고전을 면치 못했을 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대부분의 교수들은 어디 특임대 소속이었겠거니 하고 넘어간 것 같지만 펠레미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번에 나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진 것을 심리전 실습으로 돌리자고 이야기를 할 때 내게 심리전을 걸어온 것이었다.

       

       내 속을 들여다 보고 과거를 캐내기 위해서.

       

       역시나 지금도 펠레미아가 가운데에 서서 나를 힐끔거리며 교수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중.

       

       그러든지 말든지.

       

       황성에서 아카데미에 내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굳이 나도 내 입으로 나불대고 싶지도 않다.

       

       황성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용사파티 일원이었다고 해서 얻는 게 없거든.

       

       용사파티에게 쏠리는 막중한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도망쳤는데 이제와서 깝칠 이유가 전혀 없잖아.

       

       그리고 진실도 감당할 수 있을 때에야 진실이 되는 거다.

       

       정작 내가 라이너스와 함께 했던 일들을 줄줄이 읊으면 대부분은 미친소리하지 말라며 안 믿을 걸?

       

       당장 나이틀리만 해도 그랬으니까.

       

       아, 그런데 그때 나무에 딱밤 한번 때려서 보여줄 걸 그랬나.

       

       

       # # # # #

       

       

       “가셨다.”

       

       디안이 멀어지자 곁눈질하던 펠레미아가 말했다.

       

       “오렌디. 주변에 차단마법 걸어.”

       

       “잠깐잠깐!”

       

       카자다르가 손을 내저었다.

       

       “나랑 브로그는 빠질 테니까 너희들끼리 이야기 나눠라. 디안이 예전에 뭐하던 놈인지는 하나도 안 궁금해. 지금 우리 학과에 도움이 되면 그만이다.”

       

       “저기… 저도….”

       

       애나가 음침하게 손을 들었다.

       

       “저도 애들 아침밥 주러 가야 해서….”

       

       “저도 갑니다. 되살아난 마왕만 아니면 수석교수님이 누구인지는 신경 안 써요.”

       

       웨이버와 브로그, 카자다르, 애나가 떠나자 오렌디는 교수들 주변에 차단마법을 활성화했다.

       

       공기중의 떨림을 차단해 외부로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는 마법이다.

       

       “방금 다들 느꼈죠? 이상하다는 거.”

       

       “저는 잘 모르겠는데….”

       

       펠레미아가 낮게 입을 열자 오렌디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브로니크 성 탈환전 때 마왕군이 독기랑 지뢰를 썼다는 건 다 아는 거잖아요. 역사시간에도 나오는 거고 학생들도 아는 상식인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 수석교수님의 뉘앙스는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긴 한데….”

       

       “이런 건 어때요?”

       

       듣고 있던 리나 교수가 말했다.

       

       “혹시 이브로니크 탈환전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요?”

       

       “흐음, 참전용사다 이거야?”

       

       “브룬스웰에서 10년 동안 사셨다면서요. 그럼 딱 전쟁 직후인데, 만약 전쟁 때 이브로니크에서 싸우셨다가 전역 후 바로 브론스웰로 가신 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브룬스웰은 제국이랑은 먼 곳이니까. 관심 없으면 그후에 이브로니크 성이 어떻게 됐는지 아예 모르실 수 있죠.”

       

       “혹시 여기 이브로니크 현장에 있으셨던 분 안 계시죠?”

       

       “없어.”    “저도요.”

       

       사실 전투학과 교수들 모두 직간접적 참전경력이 있지만 이브로니크 성은 예외다.

       

       거기는 양측 모두 거의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끔찍한 전투. 살아남는 게 기적인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펠레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참전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 그냥 특임대 출신인가 보죠. 괜히 아무 경력도 없이 수석교수가 되신 건 아닐 거니까요. 전쟁 때에 활동하던 특임대가 많았잖아요.”

       

       오렌디가 과거 교수들 사이에서 몇 번이나 나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특임대라고 해서 저 유명한 마왕사살특임대만이 전부는 아니다.

       

       제국에서는 그 이전부터 여러 특임대를 만들어 전장에 투입했고 대부분은 어디서 누가 어떤 작전을 했는지 베일에 싸여 있다.

       

       당장 말하고 있는 리나 교수만 해도 과거 특임대원이었다는 것만 알지 정확히 뭘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그냥 특임대 출신이다, 라고 하면 다 이해가 되는 일.

       

       “만약 특임대라 해도 왠지 그냥 보통의 특임대원은 아니었을 것 같아.”

       

       펠레미아가 턱을 매만지자 지금껏 가만히 있던 모턴 교수가 입을 열었다.

       

       “수석교수가 마왕사살특임대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마왕사살특임대는 유독 비정상적으로 활약상이 많이 알려져 있다. 황성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기 때문이다.

       

       용사 라이너스, 사냥꾼 셀린느, 마법천재 카이든, 신탁사제 로르마네.

       

       마왕의 모가지를 딴 것이 제국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데 굳이 소속원 한 명을 은폐하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다는 뜻.

       

       “그건 아니지만 그에 준할 수도 있죠.”

       

       “그래서, 어떻게 알아볼 생각이지? 특임대의 과거를?”

       

       “그야….”

       

       펠레미아가 말을 더 잇지 못하자 모턴이 계속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수석교수가 군경험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 겉모습만 보고 장거리 순찰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만 해도 그렇지. 그래서 나도 현역 때의 인맥을 통해 이리저리 알아봤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어.”

       

       “저도 마찬가지.”    “저도요.”

       

       다른 교수들이 동조했다.

       

       “나와 연이 닿는 자들 중에는 현재 군단의 고위장교로 있는 이도 있지. 그런 이들조차 모른다면 특임대원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뿐이야. 정말 특임대원이 맞다면 그대로 두는 것이 맞다.”

       

       모턴의 맹금처럼 노란 눈이 리나 교수를 향했다.

       

       “리나도 특임대원이었지만 황성과의 비밀유지서약으로 절대 과거를 발설하지 않고 우리 또한 묻지 않는 것처럼. 비밀유지서약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깨지지 않는 엄중한 서약이야.”

       

       “뭐… 그렇긴 하죠.”

       

       “당장은 졸업반을 황성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졸업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수석교수의 과거를 캐는 건 그와는 하등 관련 없는 일이다.”

       

       “그런가요….”

       

       “정 궁금하면 펠레미아 너는 계속 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아카데미의 발전에 무의미한 짓에 더는 노력과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다.”

       

       그 말을 끝으로 모턴 교수는 차단마법의 범위를 벗어나 강의동으로 가버렸다.

       

       모턴 교수의 뒷모습을 보던 펠레미아는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제네브를 쳐다봤다.

       

       뭔가 의견이 있으면 내보라는 눈빛이었다.

       

       “비밀황자.”

       

       그러자 제네브가 조용히 말했다.

       

       “뭐라고?”

       

       “비밀황자. 황성에서 숨겨둔 망나니 황자.”

       

       “하하! 제네브 교수님. 무슨 말씀이세요, 평소답지 않게.”

       

       리나가 깔깔 웃었다.

       

       “황족이라면 은발이어야죠. 하지만 디안 교수님은 아니잖아요.”

       

       “비밀황자에 얽힌 소문 중에는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출신인 첩의 자식이라는 것도 있지.”

       

       “그런 식이라면 정말 한도 끝도 없어요. 차라리 마왕이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마왕에 관한 온갖 미친 소문들이 자자하다.

       

       나중에 신체를 해부해 보니 여자였다거나 죽은 건 대역이고 실제로는 살아 남아 뿔을 자른 채 인간계에 섞여 들었다거나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라거나.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가장 유력한 건 특임대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특임대라면 과거를 캐내봐야 소용없다는 것 정도.”

       

       즉 비밀황자라는 제네브의 주장은 진짜 그렇게 믿어서가 아니라 디안이 특임대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일 거라는 가정 자체가 그만큼 허황된다는 것.

       

       그런 추측은 철없는 학생들 사이에서나 나도는 거지 교수들이 언급할 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저는 수석교수님이 예전에 뭘 하셨든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해요.”

       

       오렌디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임 후로 몇 달 동안 팠지만 건진 거 하나도 없잖아요. 어쨌든 수석교수님 오고 나서 사정 좋아진 거 사실이고 유능하시고 저희 잘 챙겨 주시니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오렌디의 선언에 리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요. 저번에 제가 직접 여쭤봤을 때 그냥 웃기만 하시는 게 저랑 비슷한 사정이신 것 같기도 해요. 정말 곤란하거든요. 비밀유지서약이라는 거.”

       

       “그럼 이제 우리 슬슬 수업준비하러 가죠?”

       

       오렌디가 종탑의 시계를 가리켰다. 잠시 후면 첫 교시가 시작된다.

       

       디안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그렇듯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교수들은 강의동으로 흩어졌다.

       

       처음부터 관심 없다며 떠나버린 애나, 웨이버, 브로그, 카자다르.

       

       뒤를 캐내는 게 의미없다는 모턴과 제네브.

       

       어쨌든 잘해주니 그만이라는 오렌디와 리나.

       

       결국 디안의 과거가 궁금한 것은 펠레미아 혼자다.

       

       펠레미아는 멀어지는 교수들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에는 다들 알아보려 노력하더니 결과물이 없자 이제는 포기하는구나.

       

       하긴, 지금 디안 수석교수의 체제에 모두 만족하고 있고 수석교수의 과거야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

       

       특히나 특임대였다면 과거를 파는 일이 아무 쓸모도 없는 짓이고.

       

       하지만 나는 좀 더 파고들고 싶어.

       

       펠레미아가 괜한 심술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10년 전 제국군 심리전 전문가로 활동할 때의 일 때문이다.

       

       그때 펠레미아는 사로잡힌 고위 마족들을 심문하면서 엇비슷한 공통점이 있는 진술을 획득할 수 있었다.

       

       우회침투시킨 습격조가 증발했기에 탈영한 줄 알았더니 인간 두 놈과 조우했다더라.

       

       천막의 램프가 갑자기 꺼졌다 켜지더니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군단장의 머리가 없어졌더라.

       

       지휘부 회의가 너무 길어지기에 가보니 전부 죽어 있더라, 등등.

       

       모두 노랑머리와 갈색 더벅머리 인간을 봤다는 목격담이 포함된 진술들.

       

       이에 펠레미아는 황성에 관련된 정보를 요청했으나 묵살당했고 이에 그들이 대충 특임대 중 하나겠거니 추측만을 했었다.

       

       종전 후에서야 그 노랑머리가 용사 라이너스라는 것을 알았지만 갈색 더벅머리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

       

       황성에서 발표한 4인의 마왕사살특임대 중 갈색머리를 지닌 이는 한 명도 없다.

       

       용사 라이너스와 전장을 누볐으면서도 정작 마왕사살특임대에서는 제외됐다? 말도 안 돼.

       

       그게 아니라면 모종의 이유로 황성에서 존재 자체를 숨기고 있는 것일지도.

       

       그래서 정말 가능성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펠레미아는 혹시 디안 교수가 그 갈색 더벅머리 병사가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것이다.

       

       여기에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오랜 심리전 경험에서 나오는 직감이었다.

       

       한번 더 기술을 써봐야 하나. 하지만 저번에 받아치면서 들통이 나버려 두 번은 어려운데….

       

       아무래도… 이번 회식 때가 마지막 기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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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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