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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4

   흔히 지상의 존재들이 신격이라 부르는 이들은 단순한 초월자들이 아니다. 신격이 지닌 강대한 힘과 능력은 어디까지나 신격이 얻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쉬이 말해서 흔히 신이라 불리는 자들은 그럴 자격이 있어서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신이 되었기에 그만한 자격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 여기에 계신 요정여왕께서는 언제부터 여왕이라 불리셨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아득한 과거부터 전 그리 불려왔습니다.”

   “또 다른 예시로, 숲의 주인께서는 왜 자신이 숲의 주인이 되셨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어느 순간 그리 되었기에 당연히 여기게 됐죠.”

   “여신께서 설명하신 바에 따르면 이 두 분과 신격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 분들은 개념의 바람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존재인 겁니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빛이 바라였기에 주신이 태어났다.

   

   그 빛의 반대에 어둠이 있었고 어둠은 빛을 넓히는 주신을 질투해 자신도 저와 같은 존재가 있길 원했다. 그렇게 어둠의 악신이 탄생했다.

   

   다른 신격들도 마찬가지다.

   

   미와 예술의 신은 그 두 개념이 바라여서 만들어진 존재이며 역사의 신은 역사가 바라여 탄생한 존재이고 무예의 신이나 이외의 다른 신들도 그러한 개념이 바라여서 태어난 존재다.

   

   “과연 어둠의 악신이 사라진다하여 어둠이 순순히 자신의 대리인을 포기할까요?”

   “그럴 리 없겠죠. 숲이 또 다른 주인을 바라듯 어둠도 또 다른 신을 원할 겁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경우. 어둠이 택할 다음 존재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곳에 어둠의 권능을 지닌 존재가 있는데 굳이 다른 이를 선택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럼 그냥 신이 돼버리면 되는 거 아냐?”

   

   옆에서 지루하게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검성 유덴이 한 마디를 던지자 프레테가 싱긋 웃으며 제발 멍청한 소리 좀 적당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루시 옆에서 하악 대고 있던 사람이란 걸 믿을 수 없는 거친 태도였다.

   

   “유덴님께서 쉬이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하자면 권능이란 일종의 마검입니다. 그건 분명 거대한 힘을 가져다주지만 그와 동시에 사용자를 침식하죠.”

   “어둠에 잠식될 수도 있단 건가.”

   

   어둠이 바라여서 태어난 존재인 어둠의 악신은 도저히 좋게 볼 수 없는 쓰레기였다.

   

   이 자가 대지에서 벌인 일은 큰 것만 따져도 영혼을 수십 번도 넘게 불태워야 할 만큼 끔찍하니. 에르기누스가 그 권능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식으로 바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에르기누스님께선 강대한 정신을 품고 계시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허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위대한 대마법사인 에르기누스가 어둠의 권능에 완전히 물들어 적이 되어버리는 상황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다.

   

   인간의 지혜만으로 신의 권능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천재가 신이 되어 그들을 죽이려 든다면 그를 누가 막을 터인가.

   

   “허. 짜증나는 폐급 년. 수백 년이 지나 성장하긴 했나 보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기 싫다며 발악을 하던 남자는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채였다. 자신에게 향하는 경악을 본 그는 히죽 웃으며 포박된 손목을 위로 들었다.

   

   “나보다 더한 어둠이 태어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지. 어쨌거나 난 어둠 속에서 태어난 존재니까.”

   

   숲의 주인이 다른 것보다 숲을 우선시하듯 자신도 다른 무엇보다 어둠을 중시한다는 남자의 말은 도저히 거짓이라 볼 수 없을 만큼 담백했다.

   

   “모든 게 다 연기였다고?”

   “그래야 이성이 날아가서 생각보다 먼저 손을 휘두를 것 아닌가. 아. 혹시나 저 개같은 꼬맹이가 나불거릴까 싶어 미리 말해두자면 열이 오른 건 진짜였

   다. 참 대단한 년이야.”

   

   지쳤다는 말이 진짜였던 듯 베네딕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루시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 남자는 이내 길게 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갤 들었다.

   

   “그래서 뭐 어쩔 테냐. 날 봉인할 것인가? 또 머나먼 후대에게 짐을 넘길 것이야? 마음대로 해라. 신의 시간은 길다. 언젠가는 네 놈들이 지키려 했던 모든 게 무너져 내리겠지.”

   

   지금에 와서 에르기누스는 과거 신화 시대의 전쟁 속에서 신격을 죽일 방법이 없다고 신들이 입을 모아 떠들던 것을 떠올렸다.

   

   죽여도 죽여도 부활하는 신격의 존재 앞에서 절망하던 자신들에게 봉인이라는 대안을 내밀던 데엔 이유가 있었군.

   

   저들은 사라지지 않아.

   

   사라질 수 없어.

   

   죽여도 새로운 무언가가 다시 태어날 뿐이야.

   

   이를 깨달은 나는.

   

   “허.”

   

   에르기누스, 정확하게는 에르기누스가 만들어낸 유사인격인 해골마법사가 쓴웃음을 짓는다.

   

   “이것 참.”

   

   나를 만들어내신 그 뿐께서는 이를 알고 계셨군. 그래서 내가 이 결론에 다다르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어두셨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이상한 이야기다. 신의 권능에 대해 연구하던 자가 이를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는가.

   

   논리적으로는 한없이 옳다.

   

   사명이라는 것을 알아도 수백년에 걸친 연구 속에서 언제 뒤틀릴지 모르는 자에게 어둠을 상상할 여지를 줘선 안 되지.

   

   그리고 나서 길고 긴 연구 끝에 사랑하는 이의 웃음을 마주한 순간 이 사명을 보게 만드는 것이야.

   

   에르기누스의 기억을 이은 도구는 결코 요정여왕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녀가 살아갈 이 세상을 버리고 도망치지 못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업 속에서 도주할 수 없다.

   

   정말 대마법사다운 논리야.

   

   내가 계획을 세운다 해도 그렇게 세웠겠지.

   

   “호오. 결심을 했나? 너라면 어둠을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보군. 난 그대를 응원하겠네. 역사에 남을 대마법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고 말고.”

   

   할 수 있다면 손뼉이라도 치며 응원할 것 같은 악신의 말을 무시하며 옆으로 고갤 돌린다.

   

   거기에 나의 사랑이 있다.

   

   나의, 에르기누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멍하니 날 바라본다.

   

   마법의 신이 보여주었던 역사상 최고이자 최대의 대마법보다도 더 아름다운 그녀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 영원을 빼앗아간다.

   

   여왕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수백년이니 수천년이니 하는 세월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 여기게 만든다.

   

   악질적인 것은 실제로 그랬단 것이다.

   

   난 이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기꺼이 수백년이란 세월을 바쳤으니.

   

   “에르기누스님?”

   

   아아. 위대한 대마법사여. 당신의 예상은 옳았소.

   

   당신의 도구는 겨우 이것만으로 길고도 긴 노력에 보답을 얻었소.

   

   그러니. 뭐. 남은 생 쯤이야.

   

   “위대한 순백이자 순수되시는 분이시여. 저는 분명 에르기누스이나 당신이 아는.”

   “찐따가 찐따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절로 보이네. 너무 같잖아서 동정도 안 가.”

   

   날 선 비아냥을 따라 고갤 돌리면 깨어나지 않을 잠에 빠졌을 여자아이가 눈을 뜬 게 보인다.

   

   그녀의 입에 담긴 내용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지만 기이하게도 그녀의 어투나 표정 같은 것은 도저히 그녀 같지가 않다.

   

   너무도 얄미워 한 번 때려주고픈 여자아이에게선 도전적이고 당당하며 직설적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배려를 품은 기사의 형상이 비치고 있다.

   

   꼭 그 머리가 딱딱하게 굳은 기사 놈 같은.

   

   “…루엘?”

   “오? 답잖게 눈치가 좋네? 죽기 직전이라 온 몸에 혈류가 도나봐? 그런 것치고 거긴 자그마하지만.”

   “그대가 어찌.”

   “저기 허세부리는 중2병이 얼마나 병신일지 모르니까. 개허접주신의 머리를 꾹꾹 밟아주고 대가를 받아냈어. 설마 이걸 병신이 아니라 동정찐따한테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여자아이의 입을 통해 왜곡된 내용은 실로 어질어질했다. 특히 에르기누스의 입장에선 저 말을 하는 루엘의 겉모습과 목소리가 연상되어서 진지하게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 기적이라면 훗날을 위해 남겨두는 게 나았을 터인데.”

   “너 머리에 여자 생각밖에 없어? 동정을 떼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이해해. 수백년이나 묵힌 건데 미칠 만도 하지. 응. 응.”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

   

   에르기누스가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자 여자아이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새겨진다.

   

   저 쪽도 바라여서 하는 말은 아닌건가.

   

   그렇겠지. 허례허식에 미쳐 사는 성기사가 저런 말을 할 리가 있나.

   

   후우. 진정하고 방금 전 말을 해석하자.

   

   “과연. 어둠이 약해지면 주어진 힘도 사라진다는 건가.”

   

   어차피 날아가버릴 기적이라면 유용하게 써먹는 편이 낫지.

   

   “그래서 왜 끼어든 것인가. 그러다 내가 결심을 바꾸면 어떡하려고.”

   “말했잖아. 찐따야. 동정을 너무 오래 묵힌 나머지 뇌까지 동정에 침식되어 버려선 머리를 못 굴리니까 답답해서 끼어든 거 아냐.”

   

   …직설적인 비난이다만 저를 굳이 해석하자면 이렇겠군. 사랑에 매몰되어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침착하고 넓게 생각해라.

   

   “그나마 머리는 잘 굴러가는 게 장점이었는데 그거 마저 못 쓰면 어쩌잔 거야? 넌 원래 그렇게 찐따 같은. 음. 이건 맞는 말이네.”

   

   어떡하지. 어떤 비유를 써야 할까. 하나 같이 맞는 말 뿐이라 곤란한데. 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한 에르기누스는 자신의 사고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넌 원래 그런 사람이냐는 말은 아마 내가 아닌 진짜 에르기누스님을 가리키는 말이겠지.

   

   에르기누스님께선 원래 그런 인간이었느냐.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자였나.

   

   …

   

   아니지.

   

   아니고 말고.

   

   에르기누스님께서 그런 분이셨다면 영웅의 일각이 될 수 없었다.

   

   그 분은 괴팍하지만 결코 악한 인간은 아니었어.

   

   최소한 수백년 동안 희생한 자에게 또 다시 희생을 강요할 사람은 아냐.

   

   특히 이 희생은 그 분의 미련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나도 슬퍼지고. 요정여왕도 슬퍼지며. 악신은 웃음 짓는 최악의 결말이 만들어지니까.

   

   어디지? 어디서 뭘 놓친 거지? 무엇이 잘못된 거지?

   

   “이렇게까지 말해줘도 못 알아 먹는 거야? 찐따 네가 유일하게 잘 하는 게 있잖아.”

   “내가 잘하는 것?”

   

   루엘이 내가 잘한다고 언급할 만한 것은. 분명. 이어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둘 사이의 융화.

   

   “여왕이시여!”

   

   번뜩 떠오른 사고에 튀어오른 에르기누스는 여왕의 두 손을 붙잡고서 열기가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느. 느에.”

   “당신에게 도움만을 바라야하는 못난 마법사라 죄스럽습니다! 허나 한 번. 단 한 번만 더 저를 도와주십시오!”

   

   가능하다.

   

   분명 가능하다.

   

   하나가 아닌 둘이라면 할 수 있다!

   

   “믿음직스럽지 않은 건 압니다! 허나 이 에르기누스! 평생에 쌓아 온 마법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당신의 끝이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테니 부디 제게 협력해주십시오!”

   

   단락적인 사고 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목소리를 낸 에르기누스는 얼굴이 벌개진 요정여왕을 보고 순간 굳었고.

   

   “이야. 동정찐따는 고백에서도 동정냄새가 나네.”

   

   옆에서 들려온 비아냥 어린 목소리에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를 이해했다.

   

   “아니! 저! 그!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 할 생각이긴 했는데. 그게. 뭐냐. 그. 그으으으!” 

   

   이 순간 대마법사 에르기누스는 시간에 관한 마법을 연구하지 않는 걸 진지하게 후회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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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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