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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5

    안녕, 일기장아.

    아무한테도 말 못할 얘기가 있는데, 한번 들어봐.

    요즘 살도 찌고 영 몸상태가 좋지 않다 했는데, 아무래도 임신인 것 같아.

    언제지? 역시 그날인가?

    피임마법을 사지 못했던 건 그날 뿐이니 아마 맞겠지.

    돌이켜보면 나도 참 제정신은 아니었어.

    돈 조금 더 벌려고 했다가 애 떼는 비용만 더 나가게 생겼잖아!

    그런데 그건 뭔가 싫다.

    그거 잘못되면 영영 아이를 못가지게 될 수도 있다던데.

    게다가 그 돌팔이 의사들한테 내 몸을 보여주는 것도 꺼림칙하고.

    무서워.

    제대로 된 의사라면 이런 시궁창에 있지는 않겠지, 안그래?

    안녕, 일기장아.

    오늘은 배가 더이상 숨길 수가 없어져서 실장한테 걸렸어.

    일 계속 할건지, 아니면 관둘건지 빨리 말하라더라?

    결국 안하기로 했어.

    요즘 몸상태가 진짜 안좋아져서 말이야.

    도무지 일을 할 기운이 안 나더라.

    손님 비위맞춰 주는것도 어려운 일인데 말이야, 안그래?

    빚 갚으려면 쉬면 안된다는 건 알지만.

    힘들다.

    그래도 빚 갚고 도시로 이주하려고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을거야.

    안녕 일기장아.

    오늘은 고민을 많이 했어.

    역시 아이를 지우는게 나을지, 아니면 낳는 게 나을지.

    듣기로는 이제는 애가 너무 커서 지우기 쉽지 않을 거라던데, 하려면 할 수는 있대.

    그래도 지체하면 본인만 위험해지니까 빨리 결정하라더라.

    하지만 역시 무서워.

    전에 그 사람들한테 수술받은 여자 하나가 영영 일터에 돌아오지 않는 걸 직접 봤으니까 말이야.

    나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겠어?

    그래. 

    그냥 낳지 뭐, 애 낳는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몇백년 전엔 다 그냥 병원도 안가고 잘 낳았을 것 아냐.

    그러니까 나도 할 수 있을거야.

    —-

    안녕, 일기장아.

    나 결국 아이를 낳았어!

    하마터면 낳다가 죽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카셀 이모가 도와주셨어.

    역시 출산도 경험자는 다른가봐.

    아이 받는 것도 뭐가 능숙한 것 같더라.

    엄마는 이걸 대체 어떻게 했지?

    나 낳을 때 생각하면 지금도 종종 힘들다고 하셨던 거, 이젠 다 이해가 되는 것 같아.

    며칠동안 제정신도 아니었는데, 그동안 카셀 이모가 도와주셔서 살았어.

    아, 오늘 처음 아이를 안아봤는데, 완전 쭈글쭈글한데도 너무 귀엽더라.

    눈 색이 너무 예뻐!

    금색으로 반짝반짝해서, 마치 별빛같아.

    그래서 이름은 루미라고 지었어.

    귀여운 루미.

    안녕 일기장아.

    아기 보느라 바빠서 한동안 일기도 까먹었어.

    루미는 정말 귀여운 애야.

    아무리봐도 나 어릴때랑 똑 닮은거 있지.

    그런데, 요즘 루미가 아파.

    열은 없는데 이상하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안보여서, 결국 그 사람들한테 보여줬어.

    루미가 아픈게 눈 때문이래.

    마력시라는 희귀한 유전질환이라나.

    아무래도 돌팔이가 틀림없어.

    애가 눈 때문에 아프다는게 말이 안되잖아?

    그 사람들도 분명 우리 루미의 눈이 예뻐서 탐내는 걸거야.

    비싼 값까지 쳐주겠다고 회유하는 걸 보면 말이야.

    —-

    루미가 계속 아파.

    어제까진 울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울지도 못해.

    어떡하지?

    정말 그 사람들에게 가봐야할까?

    —-

    안녕 일기장아.

    오늘은 결국 루미의 눈을 적출하는 수술을 했어.

    더 버티다간 루미가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아서 할 수 없었어.

    다행인건 그래도 의사들이 수술을 제대로 했다는 거야.

    혹시나 잘못돼서 루미가 사라질까봐 걱정했는데, 사람의 장기는 신체에서 떨어져도 꽤 긴 기간동안 주인과 마나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그동안 제 값을 받아내려면 아기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거 있지.

    루미가 그 사람들 물건취급 당하는 것 같아서 엄청 기분나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러니까 루미가 어쨌는 살아있을거라고 말하는 거니까 안심했어.

    하지만 이제 루미의 예쁜 눈을 볼 수 없게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

    .

    .

    .

    —-

    마력시는 제어할 수 없을 때엔 생명을 깎아내는 역날검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은 비단 마력시의 소유자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열달동안 뱃속에 아이를 품은 채로 그 육신을 빚어내야하는 어미도, 막대한 생명력을 소모해야만 하는 일이다.

    따라서 마력시를 지닌 아이의 출산은 반드시 극도로 주의를 요하는 일이었다.

    산모의 건강상태가 좋아야 함은 물론이고, 깨끗하고 마나가 풍부한 환경과, 혹시나 있을 변수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인력과 시설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조건을 전부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았고, 이는 결국 제대로 성장한  마력시 사용자가 세상에 그토록 적은 이유이기도 했다.

    헌데,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는 건, 그 자체로 이미 도박이나 다름없다.

    그 아이가 마력시까지 타고났다면, 그건 그야말로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재앙이다.

    만일 산모나 아이, 둘 중 하나만이라도 체내 마나가 부족한 체질이라면 양측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병에 불과하다.

    어떤 이점이라기보단, 희귀한 확률로 발발하는 일종의 유전병에 가까운 질환에 가까운 취급.

    만약 신체가 마력시를 부담하지 못하는 경우, 해결책은 오직 둘 뿐이다.

    평생동안 마나투과를 막는 특수재질 안대를 착용하고 살던가, 눈을 적출하던가.

    마나의 흐름을 보는 특성상, 마력시는 눈을 감는대도 얇은 눈꺼풀 따위는 손쉽게 투과해 여전히 부담으로 작용되기 때문에, 그러한 특수재질 안대가 필수적이다.

    그런데다 마력시의 소유자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은 이식받을 수도 없다.

    시신경의 구조자체가 일반인과 다르니.

    그나마 보편적인 방법은 안대이지만, 의료보험조차 없는 빈민이 소모품인 안대를 계속해서 구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그녀는 자식의 눈을 적출해내기를 강요받은 셈이다.

    다행히 이곳에 있던 갈무리꾼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의사란 자들이 본업에서 실수하지는 않았던 덕분에 적출은 성공적으로 끝나 루미는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과연, 그녀는 딸의 눈에 제 값을 받을 수 있었을까?

    마력시는 그 희귀성과 연구적 가치 때문에 굉장히 비싼 값에 거래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힘도 없는 빈민가의 인간에게 그렇게 양심적인 거래를 해주리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루미의 눈에 제시한 값은 아무리 따져봐도 ‘서류작성을 위해 생색내기식 거래를 했다’에 가까운 소액.

    그녀가 루미와 함께 이 시궁창에서 벗어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 돈을 받지 않는 선택지는 없었으리라.

    결국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 돈을 받고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었겠지.

    이미 망가진 몸을 이끌고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게.

    “전부 그녀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다. 너는 이걸 본 적이 없었나?”

    루크는 그렇게 말하며 루미의 앞에 그녀가 그동안 작성한 일기를 내려놓았다.

    루미는 일기를 향해 손을 가져가는 대신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전, 글을 읽을 줄 몰라요.”

    “……음.”

    루미의 말에 루크는 잠시 움찔했다.

    그런가.

    생각해보면, 루미가 글을 읽지 못하는 것도 무리도 아니다.

    글은 눈으로 읽는 것이고, 루미는 태어날 때부터 눈을 적출당해 글을 배울 시기를 놓쳤으니까.

    눈이 회복된 것도 비교적 최근이라 했으니,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거겠지.

    “…그런데, 정말… 거기 적힌 글이 그런 내용이었던… 건가요?”

    “그래.”

    “언니는 그걸 어째서 저에게 알려주신거죠?”

    “그게 진실이니까.”

    “진실…….”

    루미는 루크의 즉답에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언제 숨이 멎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몰골의 여인.

    루미는 그녀의 눈에띄게 주름진 얼굴을 매만지다,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진실을 몰랐다면, 원망하면서 보내드릴 수 있었을텐데.”

    “이러면, 원망도 할 수 없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신을 위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야 할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자신은 그 존재만으로 그저 그녀의 삶에서 1순위였다.

    그것을 이해하게 된 루미는 그동안 억눌려있던 추억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양념된 꼬치를 먹었던 기억, 칼인지 모르고 집어올리다 자기 얼굴을 그어버리는 바람에 놀란 엄마가 안아주었던 기억, 혼자 문 앞에 앉아서 엄마가 오는 발소리를 찾아내며 기다리던 기억…….

    그 모든 기억들을 함께했던 유일한 사람이 곧, 영원히 사라진다.

    어린아이가 하루만에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커다란 비극이었다.

    그러니 지금껏 참고 참았던 감정들이 모조리 터져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루크에게는 루미가 충분히 상실감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줄 시간이 없었다.

    “루미. 슬픈건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넌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절 이해하신다고요.”

    루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가 절 어떻게 이해하죠? 언니같이 훌륭하고 좋은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루미는 그렇게 울부짖었다.

    당연하다.

    오늘 처음만난 사람이, 그것도 토레프 외부에서 온 사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빈민가는 커녕, 자신처럼 모두에게 업신여겨지는 삶을 겪어봤을 턱이 없는데 그녀는 어떻게 뻔뻔하게 이해한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언니같은 사람은 이런 슬픔은 겪어보지도 못했을게 뻔해!”

    그러나 그런 루미의 외침에도 루크는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했다.

    “글쎄, 그럴까.”

    루크도 루미가 겪는 상실감과 슬픔을 절절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또한 과거 수많은 이들을 잃었고, 사랑해마지않던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하던 시기 또한 있었으니까.

    불행했던 일들을 나열하듯 말하자면, 루미의 짧은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경험들이 축적되어있다.

    아마도, 루미가 자신이 겪은 어떤 불행이든 말하면 곧바로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쌓여있을 것이다.

    그리고 툭 까놓고 말하자면 현대 기준의 신분으로 따져도 자신은 부모없는 실험실의 탈출한 키메라이니, 루미의 말처럼 좋은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비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다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애초에 루미를 위로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사실, 이미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아무래도 상관 없어. 눈물을 추슬러라.”

    그리고 루크는 무어라 대꾸하려던 루미의 말을 가로막고, 냉정함을 자아내며 말을 이었다.

    “난 지금부터, 네 심장에 박힌 파르바티의 조각을 빼내야 하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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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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