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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79

   전승으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요정이란 순수한 순백의 존재라고 했다. 너무나도 새하얀 마음을 품어 순진한 웃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이들이라고 말이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즐거운 풍경을 상상하던 카리아였지만 현실은 잔악하고 잔혹했다.

   

   “저희 측이 요정의 숲에 바라는 조건은 이렇습니다. 우선, 숲 인근에 주신 교회를 설치할 생각입니다만.”

   “거절할 이유가 없네요. 저도 위대한 주신을 신앙하는 존재이니까요. 오히려 제 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을 지경입니다.”

   “과연 잘 된 일이네요. 여기에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요정의 숲 인근의 개발에 대한 내용입니다. 현재 요정의 숲 인근에는 왕국의 영지가 있는데…”

   “저도 배려를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저희 아이들이 좀 짓궂어서요. 숲에 들어온 인간 분들에게 어떤 장난을 칠지 저도…”

   

   서로의 이권을 가지고서 치열하게 대립하는 두 사람 사이에 순수라는 말은 존재치 아니했다.

   

   둘의 가운데에 있는 건 어떻게든 상대에게서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한 음험함 뿐이었다.

   

   요정에 대한 정보가 거의 실전되었다는 걸 이용해서 요정여왕이 1왕비를 농락하려 들고.

   

   그 농락 속에서 이전의 거짓말을 알아차린 1왕비가 의문을 내비치고.

   

   말실수를 했다며 사과한 요정여왕이 앞서 1왕비가 했던 무례를 지적하는 걸로 이번 일을 넘기고.

   

   진짜 더럽네. 실시간으로 서로의 손패를 쌓고 상대의 손패가 줄어들게 만드는 솜씨가 장난이 아냐.

   

   나라와 나라 간의 거래를 할 때도 이 정도의 음험함은 찾아보기 어려울걸?

   

   저 둘하고 거래를 하는 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어지간한 놈이라면 빈털터리로 만들어버릴 자신이 있는 나지만 저 둘을 상대하고 싶진 않아.

   

   이 둘이라면 내가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단 부분까지도 활용해서 날 압박하려 들 게 훤하니까.

   

   “으음. 이렇게 되면 저희 측에서 얻는 게 너무 적습니다.”

   

   대화의 도중. 처음으로 1왕비가 불만을 표시했다. 요정여왕이 여태 거절한 것이 너무도 많아서 직접 불평을 토해도 문제없다 여긴 거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쨌거나 숲의 구원을 지원했는데 요정여왕이 너무 고자세로 나오고 있잖아.

   

   물론 단적인 무력만 따진다면 요정여왕은 한 나라를 짓누를 수 있겠지. 여왕 개인의 강함도 강함이지만 요정들의 존재가 무척 까다롭거든.

   

   그치만 말야. 아예 토벌할 수 없을 정도는 아냐. 여론전을 잘해서 주변국을 끌어들이기까지 한다면 꽤 재밌는 일이 생길 걸.

   

   저 속 검은 요정여왕이 이걸 모를 것 같진 않아. 숲이 불탄 끝에 승리를 취하는 걸 바라지도 않은 것 같은데.

   

   뭘 노리는 걸까.

   

   “기사들은 신화 시대의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했단 영광으로 만족하겠지만 전 그럴 수 없습니다. 나라를 관리하는 입장에선 로망만을 추구해선 안 되거든요. 그러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안들을 재고해 주시거나 아니면 대안을 제시해 주십시오.”

   “1왕비님께서는 요정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남들만큼은 안다 생각합니다만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죠?”

   “1왕비님께서 바라신 대안을 설명하기 위해선 이게 필요하거든요. 그러니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잠시 생각하던 1왕비가 꺼낸 설명은 카리아가 지닌 지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요정여왕이 지닌 지식과는 큰 격차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속마음에 비릿함이 비쳤으니까.

   

   “과거 요정은 때때로 정령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보통의 인간은 다룰 수 없는 힘을 휘두르는 이들은 요정의 장난스러움과 구분되었거든요.”

   

   정령. 요정과 마찬가지로 신화시대에서 이야기로만 전승되는 존재. 서로 전혀 다르게 묘사되는 이 둘이 사실 동일한 존재였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카리아가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는 동안 요정여왕이 말을 이었다.

   

   “이제는 아득해진 과거 저희와 함께 정령마법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이젠 정령마법이 부활하는 것도 가능하죠. 그 선두에 설 기회를 드리는 것은 물론, 이번 전쟁에 참여하신 분들에겐 과거의 마법사들이 목숨을 걸고 행했던 계약을 안전히 시도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었네. 전승에 따르면 정령마법은 신화의 시대를 살아가던 마법사들조차도 탐을 내던 강대한 힘이야.

   

   개념에 가까운 존재에게서 힘을 빌린다는 건 얼핏 신을 모시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친숙하고 가깝고 쉽지.

   

   이번 전쟁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보상과 함께 왕국의 국력에도 도움이 될 제안인가.

   

   “저의 영웅께서 왕국에 속해 있기에 드리는 후한 제안입니다.”

   

   거기에 더해 다른 나라에는 이와 비슷한 제안을 할 생각이 없단 덧붙임까지.

   

   완벽하네. 이건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받아야하는 제안이야.

   

   1왕비라면 결코 거절할 리 없는 제안이고.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

   “당신의 영웅이란 건 어떤 분을 말하는 겁니까?”

   “아시잖아요?”

   

   확신이 서린 요정여왕의 말은 이름을 댄 것이 아님에도 누군가를 특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한 말은 그토록 빛나는 사람을 못 볼 수 있냐는 소리였으니까.

   

   그리고 그녀를 구원하는 일에 가장 빛났을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우리 고용주님이라고 답해야겠지.

   

   “그런가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안. 감사히 받겠습니다. 후일 실무진을 보낼 테니 자세한 협의는 그 때 하는 걸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솔라딘의 1왕비님.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후후. 저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와 당신은 비슷한 부류인 것 같거든요.”“정확히는 비슷해진 거랍니다.”

   

   카리아가 요정여왕을 따라 천막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

   

   “카리아.”

   

   1왕비가 카리아를 불렀다.

   

   “아시겠지만 지금은 당신을 해할 생각이 조금도 없답니다? 그랬다간 알른 영애께 미움을 받을 테니까요.”

   “그러니 영애의 밑에 잘 머무르라는 이야기시죠?”

   “정확해요. 역시 당신은 유능하네요.”

   “그 유능함 때문에 지워질 뻔 했지만요.”

   

   카리아의 뼈 있는 한 마디에도 1왕비의 웃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걸 본 카리아는 속으로 혀를 차고서 천막 바깥으로 나왔다.

   

   *

   

   정령마법!?

   

   에르기누스가 언급한 걸 들은 나는 내가 칼에게 안겨있단 사실조차 잊고 몸을 퍼뜩 치켜들었다.

   

   정령마법이라니! 완전 남자의 마음을 울리는 단어잖아!

   

   뭔데 그거! 나도 배울 수 있는 거지?! 요정들이랑 완전 친하니까 적성은 최고일 거 아냐!

   

   “물론 그대는 요정들의 호감을 받는 사람이니 정령마법을 배울 순 있다.”

   

   진짜!? 진짜지?! 어떻게 하면 돼?! 계약을 하면 되는 거야?!

   

   내 주변에 돌아다니는 애들 셋이랑 계약하면 나도 마법다운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냐고!

   

   “다만 효율적이진 못할 거다. 그대는 주신의 사도니까.”

   

   …응?

   

   “왜 의문을 표하지? 봐라. 지금 요정들은 어둠의 신격 중 일부를 품게 됐다. 주신의 빛을 품은 그대와는 상극이나 다름없단 거다. 그렇지 않나?”

   

   – 맞아. 루시는 너무 예뻐서 항상 곁에 있고 싶지만 계약은 좀 그래.

   – 너무 밝아서 타버릴 것 같은 걸.

   

   그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셋이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기에 축 늘어졌더니 칼을 비롯한 기사들이 허둥지둥거리며 날 위로하기 시작했다.

   

   <음? 마냥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데?>

   ‘할아버지까지 그러지 마세요. 헛된 희망이 생기면 더 슬퍼질 뿐이라고요.’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다. 왜. 네가 주신으로부터 포용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하지 않았느냐.>

   ‘…그게 왜요?’

   <포용이라는 것은 다른 걸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힘이다. 자신이 가능한 것만을 수용하는 것이나 자신이 바라는 것만을 용납하는 것과는 달라.>

   

   포용이란 전혀 다른 것조차도 기꺼이 품 안에 새기는 것이라고 할아버지는 설명했다.

   

   상당히 그럴 듯한 이야기네. 포용의 권능을 사용한다면 요정들이 지닌 어둠마저도 받아들이고 계약을 맺을 수 있단 거잖아!

   

   만약의 가능성에 전율하던 나는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포용의 권능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문제 말이야!

   

   <그거라면 네 앞에 해결책이 있지 않으냐.>

   

   앞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에르기누스였다.

   

   맞네! 인간의 노력으로 신의 권능에 닿았으며 이제는 어둠의 신격을 지닌 에르기누스라면 내게 권능을 다루는 법도 알려줄 수 있겠지!

   

   그 뿐만이 아냐! 나보다 먼저 이런 고민을 했을 변태사도도 있고! 숲의 주인이 되며 권능을 얻은 두 짐승도 있잖아!

   

   포용의 권능에 대해 설명해 줄 인선으로는 여기가 최고야! 개허접주신보다 훨씬 나아!

   

   “동정찐따님. 제가 모시는 개허접변태님이 누구인지 아시죠?”

   “알다마다. 그 분의 위대한 이름은 귀에서 지우고 싶다고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지.”

   “그 페도님이 자기도 끌어안아달라면서 이상한 걸 주더라고요? 근데 그 분이 참 한심한 게 일부러 욕을 먹으려고 하는 건지는 몰라도 제대로 설명을 안 해주셔서요.”

   “기적마저도 다루는 그대가 이해할 수 없는 힘이라면 권능인가.”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제대로 된 설명을 하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다행히 에르기누스는 자신의 뛰어난 지혜로 내 말을 해석해주었다.

   

   “하긴 그대에겐 권능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지.”

   “영애께서 주신의 권능을 부여받으신 겁니까!?”

   

   권능이란 단어를 들은 순간 나무에 기댄 채 시무룩해 하고 있던 변태 사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떤 권능입니까!?”

   “끌어안는단 단어를 언급한 걸 보면 포용의 권능이겠지.”

   “포용! 빛이 품은 힘 중 하나입니까! 주신께서 영애를 아끼는 게 분명하군요!”

   

   아니. 저기요. 당사자를 빼고 너네들끼리 즐겁게 대화 나누지 말아 주실래요? 당사자를 배려하라고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항의했더니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뭔데! 왜 기특하다는 듯이 날 보는 건데!

   

   “이건 자네가 설명해주는 편이 낫겠군. 나는 신의 관점밖에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앞으로 나선 변태사도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영애께서 신성을 다루는 것과 별 차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쉽죠. 힘의 주인이 당신을 인정했으니 힘은 이미 당신을 따를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이제 영애께서 할 일은 그저 명령을 내리는 것뿐입니다.”

   

   그으러니까 어디에 명령을 내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 변태 새꺄!

   

   네가 천재라고 자랑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딴 식으로 설명하면 어쩌잔 거야!

   

   그리고 옆에 있는 에르기누스 너도 잘했다면서 고갤 끄덕일 게 아니라 설명을 보충하라고!

   

   <짜증나는 건 알겠다만 일단 해보는 게 어떠냐.>

   ‘알긴 뭘 알아요! 할아버지는 둔재의 심정을 몰라요!’

   <그 말을 네 아카데미 친구들한테 들려주고 싶구나.>

   

   할아버지에게 한 방 먹은 나는 입을 다문 채 부들거리다가 푹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어떻게 명령을 하란 거야.

   

   포용의 권능이니까 뭐 대충 저 어둠마저도 끌어안을거라고 말하면 돼? 그러면 알아서 권능이 발동…

   

   – 뭐. 뭐야?

   – 치사해!

   – 왜 너만 반짝반짝이야?!

   – 나도 반짝반짝 할래!

   – 나도! 나도!

   

   …되네?

   

   <자. 방금 전에 네가 뭐라고 그랬더라? 둔재라고? 누가? 네가?>

   ‘모. 못 들은 걸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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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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