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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8

       영상의 도입부 자체는 그리 특이할 게 없었다. 산업용 로봇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며 농업용 임시 쉘터를 짓고, 땅바닥에서 이따금 자이언트 웜이 고개를 내밀곤 퉷, 하고 뭔가를 뱉어내는 게 다인… 1일차와 거의 다를 게 없는 화성의 일상.

       

       그러나 영상 속 시간이 채 15초도 지나기 전에, 이변이 벌어졌다.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차원 장벽을 뚫고 대기권내에 곧장 나타난 함대의 모습에, 천마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뭣이…?!”

       

       그것들이 설마 진윤이 있는 곳까지 쳐들어갔단 말인가. 그럼 지금 진윤은 대체 어떻게 됐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구하러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하지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겼다면 영상이 올라오진 않았을 텐데.

       

       그런데 영상은 또 왜 엄한 사람이 올린 거지? 천마는 혼란스러워하며 일단은 영상을 계속 시청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온몸에 잔뜩 힘을 준 채로.

       

       한껏 긴장하고 있던 그녀의 표정은, 영상이 진행될수록 점점 밝아졌다. 육상부대원들을 짓밟고, 수송기를 탈취하고, 마침내 적의 전함에 진입하기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마치 진윤이 자신의 제자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한 눈으로 웃었다.

       

       그야 당장 내일부터 무공을 가르칠 생각이긴 했으니, 어느 의미로는 제자(예정)이라고 봐도 되겠지만. 어찌 됐든, 천마는 자신의 유일한 교인이 대활약하는 모습에 행복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역시 내가 눈여겨본 남자답구나! 사내라면 모름지기 더없이 열악한 전황에도 제 몸 하나만 믿고 뻗대는 패기가 있어야지!”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녀석이 저렇게 잘 싸운다면, 그녀에게서 무공을 사사한 다음에는 대체 얼마나 강해질지 벌써부터 기대됐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영상에 몰입하던 그녀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콰아앙ㅡ

       

       대체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진윤이 침입한 우주전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체에 불이 붙은 채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저 정도 높이에서 저만한 질량과 함께 추락했는데,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천마는 자신의 교인을 믿었다. 직접 만져봤을 때도 거의 외공만을 단련한 고수처럼 더없이 견고한 몸을 가지고 있었으니, 기껏해야 중상일 터.

       

       다만 진정한 문제가 있다면, 이제는 탈취할 이동수단도 마땅히 없는 상태로 남은 두 척의 전함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서.

       

       그런 그녀의 걱정은 그만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다. 충돌로 인한 흙먼지가 가시고 나자 드러난 진윤의 모습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다리를 다쳤는지 걸음걸이부터가 정상이 아니었고, 부상과 별개로 호흡에 지장이 생긴 건지 갈수록 움직임이 둔해졌다. 아마 정신이 점점 멍해지고 제대로 된 사고가 안 되고 있을 터였다.

       

       “진윤…”

       

       더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보이는 그의 모습에, 천마가 이번에야말로 은하정부를 박살을 내려 자리를 뜨려는 참이었다.

       

       파아앗ㅡ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두 번째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화면을 가득 메우는 찬란한 빛무리에, 천마는 멍한 눈으로 영상을 들여다봤다. 사방이 황금빛으로 충만했기에 일반적으로는 도저히 뭐가 뭔지 구분할 수 없는 게 정상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천마는 초월적인 인지 능력으로 빛이 휘고 꺾이는 모양새를 읽어냈다.

       

       빛줄기 속에서 분명한 사람, 그것도 여자의 실루엣을 인식한 순간.

       

       두근ㅡ

       

       천마는, 파천무는.

       어째서일까, 지금껏 맛본 적 없는 강렬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가시고, 성검을 쥔 용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천마는, 드디어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영상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이어지는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적의 총격은 장막에 가로막혀 닿지도 못했고,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려던 두 전함은 참격 한 번에 형태를 잃고 터져나갔다.

       그녀는, 용사는 강했다. 비록 무공을 모르는 몸이라고는 하나,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강했다. 천마는 상대와 싸워도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위기에 처한 진윤을 구한 것이, 자신이 아닌 용사ㅡ

       바로 그녀라는 것. 그 사실에 천마는, 더없는 박탈감을 느꼈다.

       

       그를 자신의 교도로 받아들일 때 그를 모든 적으로부터 수호하겠다고 했으면서, 정작 자신의 힘이 필요할 땐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리고 저 자리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 그것도 여자라는 사실에, 천마는 어째선지 자신이 있을 자리를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쾅ㅡ

       

       마치 공주를 구한 영웅처럼, 진윤을 들쳐안고 우주선 안으로 사라지는 용사의 모습에.

       그렇게 영상이 끝나버림에 천마는, 그저 멍하니 스크롤을 내렸다.

       

       [콜드슬립* : 아니 씨1발 주딱이 웬일로 새벽에 자리 비웠다 했더니 저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화룡점정* : 저새끼들 왜 저기서 교미각 잡고 있냐????]

       ㄴ[지나가던선비* : 아니 씨불얼 년놈들아 떠들지 말고 가서 글삭이나 하라고]

       [수상할정도로돈이많은* : ??? 주딱이 윾동 늒네랑 좆목하네 갤 망했네]

       [ㅇㅇ* : 시즌 제19384895호 갤 망했다 선언 입갤ㅋㅋㅋㅋㅋㅋ]

       [에반데용* : 아 ㅋㅋㅋ 좆목의 좆이 진짜 그 좆이었냐고 ㅋㅋㅋㅋ]

       [ㅇㅇ(023.708) : (잘 봐둬라 신입,,,, ‘야스각’이다,,콘)]

       [ㅇㅇ(114.603) : (충분히 걸어볼만한 야스각이다,,콘)]

       [시우멈춰* : 아니 왜 예고편만 보여주고 본방을 안 보여주냐고 십련아 ㅋㅋㅋㅋ]

       [순결의수호자* : 애초에 이걸 왜 늒네가 아니라 주딱이 올림? 그새 질펀하게 허리 좀 쉐이크하고 유전자도 좀 쉐이크하고 아기씨 받아가는 김에 덤으로 영상도 좀 받아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인가???]

       ㄴ[웨않덴뒈* : 무친련 워딩 천박한 거 봐 ㅋㅋㅋㅋ]

       ㄴ[불의세례를받아라* : 실례지만 불타고 계십니다]

       ㄴ[세상에나쁜노루는없다* : 이새끼 오랜만에 발동 걸렸네 ㅅㅂㅋㅋㅋㅋ]

       ㄴ[순결의수호자* : 아니 처녀면서 처녀충인 동지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시발]

       ㄴ[순결의수호자* : ㄹㅇ 배신감 말 안 되네…]

       ㄴ[수상할정도로돈이많은* : 이종간은 좀]

       ㄴ[순결의수호자* : 퍼리충년아 그런 거 아니라고]

       ㄴ[순결의수호자* : 유니콘은 그냥 종족 특성상 순결한 처녀를 좋아하는 거지 처녀한테 박으려는 미친 말이 아님 시ㅡ발련아]

       [삼강오륜* : 에잉,,, 쯧쯧,,,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거늘. 과년한 처녀가 사내와 동석하다니. 말세구나~~~]

       

       갤럼들이 있는 대로 몰려와서 시끌벅적하게 난리를 피우고,

       

       [대수림숲지기* : 왜 용사만 씨뿌리기 받아…? 왜 나만 은인님 아기씨 없어…?]

       [ㅇㅇ(001.124) :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왜 나만 좆반인이야?]

       [섹무새* :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왜 나만 야스 못해?]

       

       이 사태에 ‘진심’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이 댓글창 한구석에서 격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지만.

       

       천마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그저 흰 바탕 위의 검은 무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활자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정신의 여유가, 지금의 그녀에게는 없었다.

       

       “……”

       

       과연 저 문이 닫히고 나서,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녀가 우주전함과 조우한 것이 새벽 2시 가량, 그 뒤처리를 마치고 온 지금은 5시 반이 좀 안 되는 시각이었다.

       

       대체 3시간 반의 빈 시간 동안,

       진윤과 용사는 저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무엇을 했을까?

       천마는 그것이 너무나 궁금하면서도, 또 동시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신도인데.

       저런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년이, 감히ㅡ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이내 스스로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신도면 어떻고 교인이면 뭐 어떻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가장 도움이 절실할 때 손을 내민 것은 자신이 아니라 용사, 그녀가 아닌가. 잔뜩 방심하여 틈을 내준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 아니던가.

       

       “진윤…”

       

       애초에 교인이 이성과 뭘 하든, 그것이 교주인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야 교주인 자신이 마음에 안 들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힘으로 인간 관계를 전부 해결해서야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그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광신도들? 천마는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저 무인으로서, 천마로서의 자신을 때때로 내려놓고. 진솔하게 진심을 부딪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했다.

       

       그렇다면 친구로 남으면 되는 게 아닌가? 굳이 남녀로서 연인 관계가 되지 않아도, 단순한 벗으로서 사귀어 나가는 것은 아무 문제 없지 않은가.

       

       분명 그럴 터인데.

       

       무에 있어 정점에 이르렀듯, 그에게 있어서도 최고가 되고 싶다고. 설령 상대가 그가 사랑하는 여자라 할지라도, 인간관계의 우선순위에 있어 밀리고 싶지 않았다. 뒷전으로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분하고, 서글펐다. 그리고 겁이 났다.

       

       만약 지금 그를 찾아갔다가, 우주선 안쪽에서 꿀처럼 달콤한 밀담이 오고 가고 있다면. 혹은 애타는 신음소리가 들려온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떤 얼굴로 그를 맞아야 하는 걸까. 그것이 두려워, 천마는 차마 진윤이 있는 화성에 들이닥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으으……”

       

       분명 그녀는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강적을 기다려왔건만.

       패배를 알고 싶었건만, 처음으로 맛본 패배는 너무나도 괴로웠다.

       차라리 싸움에서 패해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진윤, 진유우운……”

       

       무의 길에 발을 들인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주체할 수 없는 심마에,

       천마의 눈망울에 애달픈 이슬이 방울방울 맺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천마란 지상최강의 아싸(암컷)을 말하는 것
    암흑대제의 ‘수상할 정도로 수상한 동영상 유포’! 효과는 굉장했다! 파천무는 눈앞이 흐릿해졌다…

    김민재_574님, Arund님, 트릭시폭스시님, 이광상님, 태극펭귄님, 606606님 후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금융치료, 확실히 받았읍니다…!

    천마님 불쌍해… 하지만 귀엽지 않아?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사실 천마님께서 마지막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원통일 마도천하의 재림천마 시절이셨다면 아마 이런 히규읏… 스런 인간미 넘치는 느낌이 아니라, 자기 마음도 제대로 자각 못해서 언짢아하면서도 왠지 신경이 쓰이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냉혈집착녀’ 같은 느낌이었겠네요! 어느 쪽이고 상상만 해도 사랑스럽습니다!

    추가)아, 그리고 세부묘사를 좀 수정했습니다! 제가 패배자위에 미쳐서 묘사를 좀 서두른 감이 없잖아 있어서요…! 조금 더 천천히 풀어나가려 합니닷…!

    다음화 보기


           


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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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FLAD 종말 후 외톨이 갤러리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community for the last people who survived on Earth. This is ‘The Lonely Gallery After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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